[사도신경 해설 57] “아멘” (1) 아멘의 삶
신경이 ‘아멘’으로 마무리됨으로써 이 신앙 고백문이 일종의 기도임이 확실히 드러난다. 아멘은 모든 기도문의 히브리어 끝말이다. ‘그렇습니다’ 혹은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는 뜻으로 번역될 수 있다. 동의 및 희망의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방금 끝난 기도의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그것이 하느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의미다. 신경의 내용이 진실로 참되므로 이에 ‘그렇습니다’ 하고 온전히 동의하고 아울러 그 믿음대로 신경의 진리가 완전히 구현되기를 바란다는 희망을 표명하는 것이다.
신경은 ‘믿는다’는 믿음 고백으로 시작하여 ‘아멘’이라는 희망 표명으로 마감된다. 믿음과 바람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뿌리에서 나온 한 쌍이다. 사랑의 두 가지 측면이다. 사랑은 서로 믿고 바라는 것이다. 서로 믿고 바람으로써 사랑은 자라난다. 사랑은 믿음과 바람에 의해 깊어진다. 사랑한다 해도 믿지도 바라지도 않으면 그 사랑은 이내 사라진다. 신경은 하느님의 진리를 믿고 하느님의 은총을 바라며 하느님의 뜻을 사랑한다는 것 즉 믿음, 바람, 사랑의 표명이다. 하느님의 계시진리에 동의하고 하느님의 전능에 신뢰하며 하느님의 뜻에 승복함을 고백하는 것이다.
신앙은 고백으로 끝나지 않고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예수님은 베드로로부터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는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그가 그 고백을 실천하기를 바랐으므로 고백 후 당신 수난과 죽음의 길에 대해 말씀하시고 그 길에 동참해 주기를 원하셨다. 그런데 스승님의 수난예고를 듣자 베드로는 그에 반발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베드로의 저항에 직면하여 예수님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라고 화를 내며 꾸짓으셨다(마태 16,22-23). 신앙고백 뒤에는 당연히 고백내용대로 행하는 실천이 따라야 한다. ‘아멘’은 머리만의 단순한 동의가 아니라 마음과 몸의 투신이기 때문이다.
‘믿는다’로 시작하고 ‘아멘’으로 마감되는 신경은 믿고 고백하는 바가 실천 즉 희망과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지기를 우리에게 요청한다. 베드로에게서 당신의 정체에 대한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이 그에게 당신 십자가의 길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신 것처럼 신경으로 신앙 고백하는 우리들에게도 그 실천을 요구하신다. “주님이 가시는 길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라는 제자의 질문에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 응답하셨다. 길이며 진리이고 생명이신 주님을 온전히 따르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신 · 망 · 애다. 진리를 믿고, 길을 바라며, 생명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믿음, 바람, 사랑은 각기 우리의 시간들과 연관된다. 믿음은 과거와 관련되고 바람은 미래를 향해 열려 있고 사랑은 현재에 실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온 삶, 매 순간이 신 · 망 · 애의 삶이 되는 것이다. 삶의 모든 순간에 그런 삶이 되어야 한다.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야고 2,26)이고 또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갈라 5,6)이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 실천하고자 노력한다. 신앙은 그리스도의 진리에 동의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며 하늘나라와 영생을 기대하고 갈망한다. 희망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지상생활이 끝날 때까지 항구하도록 이끌며 도와준다. 예수님은 사랑을 새 계명, 율법의 완성으로 선언하신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이고”(골로 3,14)이고 모든 것의 바탕으로 그것들에 활력을 불어 넣어주며 질서를 준다. 사랑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고 또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1코린 13,1-3) [2009년 6월 28일 연중 제13주일(교황주일) 가톨릭마산 8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거창본당 주임)]
[사도신경 해설 58] “아멘” (2) 아멘이신 그리스도
동정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을 낳아 달라’는 요구 앞에서 갈등과 망설임 끝에 “제게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동의와 바람으로써 마침내 하느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예수님은 수난을 앞두고 불안과 공포 가운데서 깊이 번민하시다가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은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하고 하느님의 뜻에 동의하고 수락하려는 바람을 표명하셨다. 예수님과 마리아가 심각한 갈등과 번뇌 속에서 하느님께 동의하고 하느님의 희망을 자신 것으로 삼은 행위는 놀라운 신앙이다. 두 분은 ‘아멘’ 덕분에 받아들이기 힘든 ‘고난의 잔’을 받아 마실 수 있었다. 이처럼 믿음은 받아들이기 전혀 불가능한 일을 흔쾌히 수락할 수 있게 해주는 위대한 힘이다.
믿음은 신뢰 때문에 생겨나고 신뢰는 확고하다는 확신에서 생긴다. 그래서 믿음은 확고성과 신뢰성, 두 특성을 지닌다. 신앙은 확고한 하느님의 약속, 거짓이 없고 진실한 말씀 위에 근거하므로 ‘바위’처럼 견고하다. 견고한 바위 위에 선 집이 기초가 튼튼하여 흔들림이 없는 것처럼 신앙은 바위같은 하느님 위에 굳건히 서있어서 동요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확실히 신뢰할 수 있는 분이므로 우리가 그분을 믿는 것이다. 성경은 하느님의 주요한 특성들 중 두 가지, 어지심과 신실하심 즉 사랑과 진리를 역설한다. 믿음, 아멘, 신의, 진리 등이 같은 말 뿌리에서 나왔다. 하느님만이 사랑과 진리 자체이므로 진실하고 신실하며, 그분만이 신뢰할 수 있는 분이시다. 그분의 말씀에는 진실만이 들어있고 또 그분은 약속을 어김없이 지키므로 신뢰할 수 있다. 그래서 ‘아멘의 하느님’이다. 언제든 우리가 ‘아멘’하고 고백할 수 있는 하느님이다. 그런데 우리의 하느님에 대한 신뢰는 우리에 대한 그분의 신뢰에서 나온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마태 21,33-46)는 하느님의 신뢰와 인간의 사악함을 대비시킨다. 포도밭 주인(하느님)은 소작인(인간)들을 너무 신뢰하므로 온갖 정성을 쏟아 가꾼 포도밭을 그들에게 맡겨주었고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오라고 종들을 보냈다. 소작인들이 주인의 신뢰에 보답하고 책임을 다하기는커녕 주인의 선의를 온전히 무시하였다 사악하고 난폭해져서 종들을 때리고 죽이는 만행을 저지른다. 그럼에도 주인은 끝까지 믿고 신뢰한다. 유일한 상속자인 아들까지 보낸 것은 ‘죽기까지’의 신뢰 때문이다. 소작인들에 대한 전폭적 신뢰에서 아들까지 보낸 주인에게 돌아온 것은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어 버린” 아들의 무참한 죽음이었다. 그들에게 살육당한 주인의 상속자 아들은 무한한 믿음과 신뢰의 선물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멘’이다. 그분은 “아멘 그 자체이고 성실하고 참된 증인이시다”(묵시 3,14). 하느님의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해 그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분에게서 “하느님의 그 모든 약속이 ‘예’가 되기”(2코린 1,20) 때문에 기도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라고 끝맺는다. 신앙고백 끝의 ‘아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동의이자 감사이고 찬양이다. 기도 끝의 ‘아멘’은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는 열렬한 바람을 표명하는 것이자 간청을 하느님이 들어주신다는 확고한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마지막 성경의 마감 부분에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20)이라 쓰여있다. ‘아멘’ 에는 하느님께서 친히 약속한 바를 실현해 주시기를 또한 하느님의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청원이 담겨있다. 아울러 하느님께서 당신 뜻에 따라 청을 들어주신다는 확신도 포함된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2009년 7월 5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가톨릭마산 8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거창본당 주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