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편 믿을 교리
제 1 장 천주[天主=하느님]
35. 이제 가톨릭 교리의 본론의 첫 장, 믿을 교리에 대한 차례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교리가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은 따로 반복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도 세 가지로 구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편의상 그렇게 구별을 하는 것뿐입니다.
36.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꼭 그렇게 여겨서 의심하지 않다’는 것으로 설명하는 우리말 ’믿다’라는 단어의 뜻입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우리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전에 나오는 말도 아니고, 우리가 쉽게 쓰는 말도 아니지만, 저는 좀 다르게 해설하려고 합니다. ’믿는다’ 또는 ’믿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37. ’믿는다’는 것은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람의 눈이 볼 수 있는 형태를 갖추지 않는 것을 가리킬 때, 우리가 그런 말을 사용할 것입니다. 누구도 본 적이 없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있다’라고 하는 형태는 제시하지 못해도, 우리 생활에는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있습니다. 공기가 그 가운데 대표적일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의 호흡기관은 그 공기 가운데 산소와 몸에 필요한 것을 받아들여 생명이 유지돼 나가는 데 사용합니다. 이렇게 과학으로 분석하고 따질 수 있는 것이 있는데 비해서, 그렇게 과학으로 따질 수는 없지만 우리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다른 것도 있습니다.
38. 사람 사이에 등장하는 믿음이 그 한가지일 것이고, 신앙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이 또 다른 한가지 일 것입니다. 붕우유신(朋友有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륜의 하나, 붕우의 도리는 믿음에 있음’이라고 설명합니다. 친구 사이에 주고받는 많은 형태의 것이 있지만, 이 믿음[信]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큰소리치지 않고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훨씬 오래 전부터 이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강조해 왔는지도 모릅니다.
39. 이 믿음의 힘은 대단히 강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이 힘을 이용해서 자기 잇속을 채우려는 사람들 때문에 참으로 좋게 남아있어야 할 믿음의 기초가 흔들립니다. 농작물을 키울 때 농약을 친 것을 무농약 또는 저농약 제품과 섞어서 팔고, 자신과 가족이 먹을 것은 따로 경작하는 사람들도 있고, 모든 것을 다 빼내어 줄 것처럼 확신을 주면서 동업하던 사람들이 친구의 재물과 모든 것을 빼앗아 달아나고, 욕심 때문에 빚이 생기자 그것을 잘못된 방법을 동원하여 보험금을 타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도, 우리 사회의 한 바탕을 이루고 있는 이 믿음의 기초를 흔들고 깨트려버리는 행동이라고 할 것입니다.
40. 제가 천주교는 골치 아픈 종교라고 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믿음에 대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이란 눈에 보이지 않으니, 그것을 드러내는 방법은 행동으로 보이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이런 일에 대하여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신약성서의 야고보 서간(443-444면)에 나옵니다. 거기에 나오는 말씀의 일부분을 여러분들에게 읽어 드리겠습니다. <(2,14) 나의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15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는데 16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7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24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람이 믿음만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
41. 이런 골치 아픈 요소를 안고 있는 믿음, 이런 믿음을 어떻게 해야만 골치 아프게 대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누구나 해결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제가 한가지 방법을 제시한다면, 우리의 이성(理性)과 지성(知性)이 가 닿을 수 없는 부분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늘 꼭대기까지 우주선을 쏘고, 우주선이 비행기처럼 착륙하고, 인간의 힘이 동물복제를 해 내는 시기 까기 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의 지성과 이성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은 존재합니다. 그런 일들에 대한 응답의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렵긴 하지만 그대로 수용(受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천주교의 신앙, 특히 이 믿음에 대한 것은 후자의 경우처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아무리 따지고 확인하려고 해봐야 형태도 없죠, 눈에 잡히는 근거도 없죠. 누구도 내가 사물을 대하듯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이 믿음의 요소에 대한 것입니다.
42. 천주, 하느님은 인간의 오관(五官)으로 체득할 수 없는 분이라는 내용을 몇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입장에서 이 분을 묘사하는 방법은 몇 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래 14번부터 21번까지 이어지는 내용들은 가톨릭 교회에서 받아들이는 하느님에 대한 묘사입니다. 함께 읽어보시죠.
358-14. 천주께서는 누구십니까? : <답> 천주께서는 만선만덕을 갖추신 순전한 신(神)이십니다.
358-15. 천주께서는 어떠한 일을 하셨습니까? : <답> 천주께서는 우주만물을 만드시고 사람을 내셨습니다.
358-16. 천주께서는 영원하십니까? : <답> 천주께서는 영원하시어, 시작도 마침도 변하심도 없으십니다.
358-17. 천주께서는 전지(全知)하십니까? : <답> 천주께서는 전지하시어 모르시는 것이 없으시고, 사람의 은밀한 생각까지 다 아십니다.
358-18. 천주께서는 무한(無限)하십니까? : <답> 천주께서는 무한하시어 유한(有限)한 모든 곳에 다 계시고도 무한히 남아 계십니다.
358-19. 천주께서는 의(義)로우십니까? : <답> 천주께서는 의로우시어 선(善)을 상주시고, 악(惡)을 벌하십니다.
358-20. 천주께서는 전능(全能)하십니까? : <답> 천주께서는 전능하시어 무엇이든지, 원하시는 것을 하실 수 있으십니다.
358-21. 천주께서는 선(善)하십니까? : <답> 천주께서는 무한히 선하시어, 통회하는 자를 용서하시고 당신께 청하는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43. 이러한 믿음은 세상에 사는 사람 누구나 갖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믿는다고 생각하고, 다짐하고 선언했다가도 다음 날 다르게 말하는 것이 바로 믿음에 대한 것입니다. 친구사이의 우정이, 신의가 이익 때문에 자주 바뀌는 이 세상의 모습과 유사하게 설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44. 신(神)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애초에 그렇게 보이지 않는 힘을 고백하면서 그 대상을 인간이 고백하는 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을 가리켜서 신(神)이라고 했다면, 우리는 그 신을 가리켜서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눈에 보인다는 것은 언젠가 사라질 수 있기에 그럴 것입니다. 제 아무리 엄청난 권력을 가진 사람 또는 사물이라고 하더라도 형태를 갖추면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중국의 진시황제도 그가 가진 절대권력을 무한정 누리고 싶어 불로초를 찾아 나섰지만 실패하고 말았던 사실이 그 한가지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45. 그러나 가톨릭의 신앙에서는 하느님을 ’신’이라 부르고 그에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여러분들은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만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아닐 것입니다. 과학으로도 엄연히 그 존재를 알아낼 수 있는 요소들조차도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습니다. 우리 몸 안에 들어가 있는 많은 장기(臟器)들이 그 중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상호 작용해서 우리를 움직이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또 우리의 손바닥에는 얼마나 많은 세균들이 사는지 아십니까? 누군가 그러더라구요. 조그만 차 수저로도 살짝 하기만 해도 거기에는 몇백만 마리, 몇천만 마리의 세균들이 우글우글 한다구요. 물론 저도 제 눈으로 그 녀석들을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녀석들 때문에 우리가 어느 정도는 도움과 영향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없으면 우리가 건강하게 살기 힘든 세균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월권행위입니다.
46. 이러한 의미와 생각을 갖고 인간이 정한 단어 ’신(神)’이라는 말, 특히 사람 세계에서 그 종류를 다양하게 생각하는 가운데 최고의 신, ’하느님’께 적용하는 인간의 고백을 교리서 14항에서부터 21항까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이고, 신앙으로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산다’ 또는 ’가톨릭 신자가 된다’는 것은 하느님을 그러한 분이라고 고백하고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신앙인이 된다’ 또는 ’신앙에 입문하는 예비자가 된다’는 말도 이러한 과정에 참여하겠다는 자유의지의 동참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가 입으로 쉽사리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가톨릭이라는 종교는 골치 아픈 종교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47. 여기 8가지의 요소는 인간이 신앙으로 고백하는 하느님의 속성입니다. 속성이라는 말 역시도 우리가 어느 대상을 분석해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이겠지만, 여기서는 체험이라는 단계를 생략하고 그렇게 표현합니다. 하느님은 세상 만물을 있게 하신 원동자(原動者)이며, 창조주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가톨릭 기도의 ’사도신경’의 첫 부분에서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48. 하느님의 속성으로 표현하는 내용의 두 번째는 ’하느님은 영원하시다’는 것입니다. 영원(永遠)이라는 말도 사람의 인식과 지식의 수준에서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의 세계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기껏 생각할 수 있는 말이라면, 그저 생각할 수 있고 찾아볼 수 있는 한계보다도 그 삶의 길이가 훨씬 더 길다는 것 정도일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말의 의미는 ’시작도 마침도 없다,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미래를 향하여 한없이 계속된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49. 이 하느님의 다른 속성으로 언급하는 것이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①전지, ②무한, ③공의, ④전능, ⑤전선하시다는 것입니다. 유한한 길이 밖에는 살 수 없는 인간이 하느님께 적용되는 이러한 속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에서 알아채지 못하는 것도 이 세상에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 또는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서울-부산의 거리를 보름이나 한달씩 걸려야 이동할 수 있다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동차, 기차, 비행기를 이용하는 방법에 따라 그 소요시간이 다르고, 전화라는 것을 이용하면 지구 반대편의 거리라고 하더라도 시간의 차이를 그다지 많이 느끼지 않고도 통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존재와 인간의 존재의 상관관계
50. 하느님의 속성을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방법에 따라서 살펴본 다음, 그 하느님은 인간의 세계에서 무엇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는가 돌아볼 차례입니다. 교회는 인간의 탄생과 존재 목적에 맞추어 한 가지를 설명하고, 다른 한가지는 인간 세계 사이에서 일어나는 불화와 불평등의 문제와 하느님 사이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22번째 항목과 23번째 항목의 <문>, <답>입니다.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358-22. 천주께서는 무엇을 원하십니까? : <답> 천주께서는 당신의 영광과 사람의 구원을 원하십니다.
358-23. 천주께서는 전지, 전능, 전선하시다는데, 이 세상에는 죄악과 전쟁과 온갖 병고가 왜 그대로 계속되고 있습니까? : <답> 천주께서 전지, 전능, 전선하시면서도 현세에 죄악과 전쟁과 병고가 계속되는 것은, 천주께서 지극히 귀중하게 여기시는 자유를 인간들이 남용하기 때문이고, 또 현세의 온갖 고통으로 인하여 인간들은 죄악을 보속하고 공덕(功德)을 세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51. 우리는 그 누구도 자신이 원해서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이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태어나고 자라고, 왜 성장하다가 영원히 살지 못하고 죽는가하는 문제는 질문한다고 해도 우리가 그 해답을 명확하게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은 없습니다. 다만 신앙에서, 가톨릭이라는 종교에서 그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응답하는지를 찾아볼 수 있을 뿐입니다.
52. 인간으로서 하느님을 만났거나 본 사람은 없다고 했습니다만, 단 한 사람 예외가 있습니다. 구약성서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가 그 사람입니다. 구약성서 출애굽기 33,11(구약 141면)을 보면, <야훼께서는 마치 친구끼리 말을 주고받듯이 얼굴을 마주 대시고 모세와 말씀을 나누셨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이 원하신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인류의 구원과 하느님이 마땅히 받으셔야 할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교회는 그 믿음을 고백하고 그것을 교리의 한가지로 정의합니다. 저도 역시 인간이기에 하느님이 왜 인간을 만드시고 난 다음에 그렇게 가슴앓이를 하고 계셔야 했는지 알지는 못합니다. 몇 차례 말씀드리기는 합니다만,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이 있고, 몰라도 엄연한 사실이 있기에 그런 내용에 대해서는 인간으로서 믿음으로 응답하는 수밖에는 따로 방법이 없습니다. 인간을 만들어놓고, 그 인간이 구원되기를 바라시는 것은 우리 사람의 생활과도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들 역시도 결혼하시면서 사랑의 열매인 자녀를 얻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자녀도 어릴 때에는 부모의 뜻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느끼다가도, 다섯 살만 넘으면 그런 판단이 달라집니다. 미운 일곱 살을 넘기면서 부모의 힘이 자꾸만 멀어져간다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아마 하느님이 느끼시는 입장도 이와 비슷할 것입니다. 세상에 당신의 힘을 전하고 실천할 대상으로 인간을 선정하셨는데, 그 인간이 그 뜻을 따라 올바로 나아갔으면 좋겠다는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신앙의 내용(22항)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53. 이렇게 하느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세상에 좋지 않은 모습이 어찌하여 드러나는지 그 원인에 대한 질문과 응답의 내용이 23항의 내용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알고 싶어하는 것이 죽음과 고통에 대한 문제입니다. 태어난 목적이라든가 이유에 대해서 분명한 자의식을 갖고 있지도 않으면서 우리는 삶 안에 드러나는 문제들에 대하여 질문과 응답을 수없이 반복합니다. 한 순간 응답이 되었다고 하는 것도 시간이 흐르면 똑같은 질문을 다시 하게되고, 또 같은 응답의 과정이 반복됩니다.
54. 하느님은 앎의 근원, 모든 능력의 근원, 모든 선의 근원이라고 신앙에서는 고백하는데, 어찌하여 그 하느님이 만들었다고 하는 세상, 그 하느님이 다스린다고 하는 세상, 거기에 그 하느님의 특성이나 속성과는 충돌하는 모습이 횡행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23항과 관계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감정을 앞세우는 사람들은 이 질문에 덧붙이기도 합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태어난 아이가 왜 몹쓸 불치병에 걸린 채 태어나는지, 왜 전쟁은 일어나서 아무런 원인 제공도 하지 않은 어린아이와 여성들과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만 하는지 따지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중요한 본질적인 응답 한가지를 빠트리고 있는 것입니다.
55. 신앙이 아니라면, 이 질문에 대해서 효과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감정이 앞서서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지성이 설명하고 싶지 않은 탓이고, 남을 단죄(斷罪)하던 기세(氣勢)등등한 칼날을 자신의 책임을 인정해야 하는 쪽에서는 슬그머니 내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탓은 모두 조상에게 있는 것이며, 나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주장이 주류를 이룹니다.
56. 교회의 입장은 이러합니다. 적어도 예비자 교리에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수 있는 내용은 이것입니다. 세상일에 이런 고통과 고난의 모습이 함께 하게 된 원인은 ’인간에게 주어졌던 자유의지의 남용’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자유의지를 남용한 적이 없다고 하고 싶은 마음과 생각은 굴뚝같을 것입니다.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는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다른 한가지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는 공동체입니다. 나는 다 잘하고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행한 일들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공동체에 주어진 운명입니다. ’강(江)의 상류(上流)’에 사는 사람이 오물을 내버리면, 강의 하류에 사는 사람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하더라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싫다고 한다면, 강을 오염시키는 상류에 사는 사람보다 더 상류로 올라가서 사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피해 올라간다고 해서 세상에서 겪는 모든 문제로부터 초탈(超脫)할 수 있는가하고 묻는다면, 그것은 또한 절대로 그렇지를 못합니다.
57.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할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난 다음에 그 삶의 질곡(桎梏)에서 효과적으로 벗어날 일을 찾는 것이 올바른 순서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세상에 고통이 있고 그 고통을 통하여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교회는 <현세의 온갖 고통으로 인하여 인간들은 죄악을 보속하고 공덕(功德)을 세우게 하시는 것>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가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날 수 있는 문제들을 정의한다고 해서 세상의 어려움에 ’나 몰라라’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가오는 고통을 피할 수 있는 것이라면 피해야 합니다. 물론 없앨 수 있으려면 자신과 남을 위해서 없애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값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치뤄야 한다면, 무조건 피하는 것이 올바른 일인지는 따로 생각해 봐야 합니다.
58. 사도신경의 말미에 보면,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가톨릭 교회의 특성을 한가지 더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 지상에서 아쉬움 없이 살려면 어느 정도는 재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내가 번 것이라고 해서 내가 살아있는 동안 모두 쓰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흘러갈 것도 있고, 자녀들에게 물려줄 것도 있습니다. 내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지상에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난을 겪으면서 쌓는 덕행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또한 교회의 정신입니다.
59. 그리고 이러한 고통의 문제가 인간 세상에 싹튼 것은 인간의 죄악에 대한 것입니다. ’악(惡)’의 존재에 대한 교회의 입장은 ’선(善)의 결핍’이라고 합니다. 물론 악이라고 하는 것은 형태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선이라고 하는 것에도 같은 주장을 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형태가 나타나지 않으니 그것을 없애거나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도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60. 성서에 나오는 최초의 악에 대한 문제는 연약한 인간성에 있다고 기록합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은 하느님이 창조해 놓으신 세상을 올바로 관리해야 하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인간의 어느 구석에 욕심과 자만심, 그리고 남들보다 더 높아지려고 하는 마음이 숨어있었는지, 피조물의 하나인 인간보다 훨씬 더 못하다고 할 만한 ’뱀’으로 등장하는 힘에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자율권, 자유의지를 남용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교회의 입장입니다. 이 자유의지의 남용으로 인간은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는 되었지만 차라리 몰랐던 것보다 좋지 않은 결실을 거둘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악은 점차로 퍼져갑니다. 선이 사라진 자리가 악이라고 했으니, 악의 힘은 커져 갈 수밖에 없죠.
61. 우리 속담에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도 같은 내용일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해주신 하느님의 명령과 훈령을 소홀히 내 맘대로 해석했으니, 형제가 서로 죽게 하는 것은 오히려 그 정도가 약한 범죄에 해당하는 것이고, 요즘 세상에 일어나는 범죄들, 다른 사람들을 상하게 하고 죽게 하고, 다른 사람을 향하여 사기치는 일은 오히려 자신에게 부담감이 덜한 죄악이 되고 말지 않겠습니까?
62. 전통적인 이야기에서 악의 힘이 탄생한 것은 ’하느님의 자리를 탐한 천사’의 행위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천사의 이름은 ’루치펠<Luchiper> 또는 루시퍼<Lucifer> 또는 루이스 사이퍼<Louis Saipher>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 역시 그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63. 결국 이 세상에 사는 사람으로서 악의 힘을 줄이는 방법은, 악을 극복할 수 있는 선을 더욱 많이 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궁창 물이 지저분하다고 해서 우리가 어디론가 퍼내어 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 영향을 어디선가 그대로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 숟가락, 한 숟가락씩 우리가 맑은 물을 옮겨 넣고, 그렇게 해서 함께 머물고 있는 바탕이 맑아지게 만드는 길 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그것이 고통을 통하여 인간이 죄악을 보속하고 공덕을 세우게 하려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23항의 의미입니다. 죄악은 어느 누군가 한 사람이 없애버리고 싶다고 해서 없애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