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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교리문답 해설 (3): 삼위일체
작성자이철희 쪽지 캡슐 작성일1999-03-29 조회수10,348 추천수3

제 2 장 삼위일체

 

 64.  이제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하느님의 속성에 대해서 말씀드릴 차례입니다.  이 하느님의 속성을 신학적인 용어로 이야기하면, ’삼위일체(三位一體)(Trinity)(Trinitas)’라고 합니다. 셋이 한 몸을 이룬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용어로는 이렇게 설명을 하고 말씀을 드릴 수 있기는 합니다만, 설명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가리켜 지난 시간에 언급했던 ’계시(啓示)’라고 합니다.  계시라는 행동의 주도권은 하느님이 쥐신 것입니다. 인간의 지성이 발달한다고 해서 그것을 알아듣거나 설명할 수 없다고 신학에서는 정의합니다.  하나이긴 하나인데, 역할은 셋으로 드러나는 것, 부르기는 한가지 이름으로 부르는데, 우리가  그 내용상의 구별을 따로 할 수는 없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이요,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느님에 적용된 속성입니다.  이 정도로 설명을 드린 다음에, 교리에서는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358-24. 천주께서는 어떻게 계십니까? : <답> 천주께서는 다만 한 분이시지만, 성부, 성자, 성신(성령) 세 위로 계십니다.

358-25. 세 위 서로 관계는 어떠합니까? : <답> 지극히 신묘하여, 성부는 성자를 낳으시고 성자는 성부께 낳음을 받으시고, 성신(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여 계십니다.

358-26. 성부, 성자, 성신(성령) 성삼위께서는 상하(上下) 선후(先後) 관계가 있습니까? : <답> 성부 성자 성신(성령) 성삼위께서는 상하 선후 관계가 없으시고, 온전히 같으신 한 천주이실 따름입니다.

358-27. 성삼위에 관한 진리를 사람이 충분히 깨칠 수 있습니까? : <답> 성삼위에 관한 진리는 사람의 지능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충분히 깨칠 수 없고, 다만 계시로서 알려주신 바이니, 믿고 흠숭하며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합니다.

 

  65. 이 세상에는 우리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할지 모르기에 그런 요소가 더 강할 것입니다.  신학에 대한 용어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 삶에서도 한가지 용어로만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모습에 비교한다면, 신학용어로 표현한다면 ’삼위일체’에 해당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66. ’불켜진 초’에 대해서 묘사할 때도 그럴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빛과 열이 나오죠. 물론 몸체도 있습니다. 그 어느 한가지만을 가리켜서 설명할 때, 그것을 우리가 ’불켜진 초’에 대한 설명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눈으로 본적은 없지만, 하느님에 대해서 학문적으로 정리한 사람들은 그러한 용어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교회라는 단체에서는 그 용어를 받아들여 사용하는 것이구요.

 

  67. 그렇다면, 교회에서는 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사람들이 알아들은 하느님의 활동을 표현하면, 창조주요, 구원자요, 지속시키는 힘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인간의 구별입니다. 어디까지나 인간이 알아들은 몸짓입니다.  그리고 유한한 인간의 세계에서 무한하신 분을 규정한다는 것도 사실은 어렵고 무모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해야하죠.  세상을 창조하신 분을 거룩하신 아버지,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셔서 사시다가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그 희생(犧牲)의 본보기를 보여주신 분을 거룩하신 아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힘을 통하여 교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며 사람들의 생활을 이끄시는 힘을 가리켜 거룩한 영이라고 구별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용어해설입니다.

 

  68. 세상의 처음, 또는 교회의 처음부터 이 용어가 등장한 것은 아닙니다. 대략 4세기경에 살았던 아우구스티누스(354-430)라는 교회학자는 이 신비에 대해서 탐구했던 유명한 사람입니다. 이 분에 대한 생활은 따로 전기가 있고, 자서전이 있을 만큼 파란만장한 전력이 있는 분입니다.  그 어머니 모니카 성녀 때문에 잘못된 생활에서 돌아선 유명한 분이기도 합니다.  이 분은 북아프리카 타사스테 출신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교를 믿는 어머니 모니카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15년 이상이나 정신적인 방황을 거듭합니다. 그러다가 당시 유명한 사조였던 마니교를 통해서 진리를 얻으려고 9년간이나 시도하다가, 로마로 가서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오를 만나고 성바울로의 독서를 통해 개종하고 387년 부활전야에 세례를 받습니다. 그후 죽을 때까지 북아프리카 발레리우스에서 주교직을 수행한 분입니다.

 

  69.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들려드릴 이야기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체험담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 분이 어느 날엔가 이 신비에 대한 탐구를 하기 위해서 해변가를 거닐고 있었답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을 어떻게 알아들었으면 좋겠는가?’를 고민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걷던 도중에 파도가 출렁이는 물가 곁에 앉아서 어린아이가 모래 사이에 조그만 구덩이를 파놓고, 조가비 껍데기로 바닷물을 조금씩 옮겨 넣는 모습을 보았답니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 어린이 혼자서 말입니다.  그래서 질문을 했다는 것이죠,  왜 그렇게 하느냐고?  네가 거기에다 물을 옮겨 넣어 봐야 곧바로 모래로 스며들고 또 해야 하는데.... 라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그 어린아이가 한다는 정색을 하고서 한다는 말이, ’제가 바닷물을 이 구멍에 모두 담을 수는 있어도, 아저씨가 고민하는 삼위일체라는 말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답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고개를 들어보니, 아이는 사라지고 없더라는 것입니다.

 

 70.  머리가 명석했던 학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제서야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해서 탐구하기를 포기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남긴 일화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가 그 소년을 직접 보았는지 어쨌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학자였던 사람도 자신이 탐구할 수 있는 범위였는지, 아니었는지를 빨리 구별했던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서 자신의 삶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에, 그 소년을 통하여 계시를 접하고 인간의 행동을 빨리 접을 줄 알았던 것입니다.

 

 71.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헤아리지는 못합니다.  사람의 생성자체도 그렇죠.  남성의 정자와 여성의 난자가 만나 조화를 이루면, 생명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생명이 시작된다는 것만 알지, 왜 그런지 어떤 과정을 통해서 그렇게 되는지, 거기에 무슨 구조가 있는지 알지는 못합니다.  설사 안다고 해도, 그것을 우리가 인위적으로 진행시키지도 못합니다.  다만 돼있는 구조에서 뭔가를 바꿀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얼마 전에 뉴스를 통해서 소개되었던  ’쥐 인간’이라고 하는 실험도 사람이 할 수 있는 정도의 것뿐입니다.  인간은 없던 것을 창조할 수는 없습니다. 있던 것을 가지고 이리저리 조작하다가 훗날 인류에게 득(得)이 될지 실(失)이 될지는 알지 못하는 일에 매달리는 것뿐입니다.

 

 72.  삼위일체에 대한 것은 신비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계시에 의한 만큼만 우리가 알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설명으로 이해하거나 그 진리의 본체에 가 닿을 수 없는 것이 그 신비입니다.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요소 가운데는 이러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차차 말씀드려 나가기로 하죠.  

 

 73.  위의 25항에 나오는 내용한가지를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인간으로 표현하면 출생에 대한 문제입니다. 애초에 하느님의 속성이라고 규정했으니, 인간의 지식과 상식수준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인데도, 이것을 인간이 지식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한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성령에 대한 것입니다.  성령이 성부에게 종속된 것이냐, 성부와 성자에게 종속된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성서에 나타나는 시기로 보면, 성령은 분명,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이 있고 난 다음에 등장합니다.  물론 구약성서에서 이러저러한 표현이 성령의 별칭(別稱)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그 얘기는 여기서 생략합니다.  

 

 74.  수많은 세월과 역사를 두고 이루어져 왔던 이야기는 접어두고, 이 종속성에 대한 문제 때문에 동방교회와 로마가톨릭, 서방교회가 갈라지는 교리적 원인이 됩니다. 동방교회란 흔히 여러분이 아시는 러시아정교회를 가리킨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즉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오시는가, 아니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는가의 차이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서방교회인 가톨릭에서 받아들이는 부분은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는 것입니다. 학자들만이 할 수 있는 골치 아픈 문제들이고, 이론적인 싸움입니다.  어찌되었든 한가지 분열의 원인이 되었기에 여러분에게 알려 드립니다.  사랑은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출발점이 있으면 가서 부딪히고 돌아올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겠죠.  교리를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좀 지루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해를 위해서는 참고가 참고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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