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원죄(原罪)
이제 그중 부담스러운 문제로 갑니다. 이 세상에 죄악이 생긴 원인에 대해서는 그저 설화형식의 이야기라면 족했는데, 이제는 언제까지나 우리의 꼬리표처럼 따라 다니는 죄에 대한 것입니다. 그 가운데 처음 다루는 이 원죄는 내가 행한 것도 아니고, 내가 할 의지도 없었고, 나는 참여하고 싶었다는 것과도 전혀 상관없는 죄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도 분명 교리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이 표현을 통해서 우리가 뭔가를 알아들으려면 함께 고민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함께 읽죠.
358-47. 원조 아담의 죄와 벌이 후손들에게는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답> 원조 아담의 죄와 벌이 후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모든 인류가 원조의 후손으로서 원죄에 물들어 있으니 이것을 원죄라 합니다.
358-48. 모든 사람이 다 모태에서부터 원죄가 있습니까? <답> 모든 사람이 다 모태에서부터 원죄가 있으며, 성모 마리아만이 원죄가 없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원죄의 모습은 하느님의 명(命)을 어긴 것으로 우리의 본성에 달라붙은 죄악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만드신 에덴 동산을 최초의 인간인 아담에게 다스리게 하십니다(창세기 2,15). 그러면서 그 동산 한 가운데에 있는 나무에 대해서 보통과는 다른 명령을 내리십니다. "이 동산에 있는 나무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창세기 2,16-17).
"왜 먹지도 못하게 하는 나무를 동산에 만드셨을까?" 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질문일 뿐입니다. 아담은 그런 불만 섞인 질문을 하지도 않았고, 그 명령을 그대로 수용합니다. 처음에는 말이죠. 왜 아담은 우리가 요즘 할 수 있는 것처럼 하느님을 향하여 항의하지 않았을까요? 아담의 말과 생각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우리가 그 생각을 추측할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 입장이라면, 하느님을 향하여 어떻게 항변하시겠습니다. 왜 그렇게 인간을 불완전하게 만들었는가 탓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응답은 뒤로 접어두고라도, 하느님의 슬픔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기껏 세상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제대로 다스리라고 능력을 주어 파견했더니, 알량한 자유의지로 내 속마음을 후벼 파?" 그냥 놔둘 수가 없죠. 그러나 참으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흙으로 만든 그릇에 해당하는 인간을 통하여 그래도 뭔가 하실 일이 있으셨기에 그러셨을 것입니다. 신약성서 고린토 후서 4,7에 보면, ’질그릇과 같은 우리 속에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을 알아듣고 전할 수 있고, 하느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는 보화를 담아주셨다’고 합니다. 또한 같은 신약성서 로마서 4,20-21에 보면, "만들어진 물건이 만든 사람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옹기장이가 같은 진흙 덩이를 가지고 하나는 귀하게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어낼 권리가 없겠습니까?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지도 못했던 세상 최초의 인간들이 저질렀다는 ’원죄(原罪)’에 대하여 우리가 왈가왈부하며 슬퍼하기보다는 우리 모습, 우리 삶에 남아있는 그 찌꺼기들을 어떻게 하면, 치워낼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합당한 순서가 될 것입니다.
다음의 두 가지 항목은 이 원죄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항목에 대한 것입니다. 먼저 읽어보시죠.
358-49. 성모 마리아는 어떻게 원죄에 물듦이 없이 잉태되시었습니까? <답> 성모 마리아께서 원죄에 물듦이 없이 잉태되신 것은 천주의 특별한 은혜로 예수의 공로를 미리 입으사, 미리 보호를 받게 되신 것이니, 이 특은을 무염시태(無染始胎)라고 합니다.
358-50.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원죄 중에 그냥 버려 두셨습니까? <답>하느님께서는 인류를 원죄 중에 그냥 버려 두시지 아니하시고 무한하신 자비로써 즉시 구세주를 허락하시고 후에 과연 보내셨습니다.
첫 번째 항목은 교회의 신앙이요, 믿음입니다. 신앙과 믿음은 논리(論理)로 해설할 수 없습니다. 애초에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생활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을 가리켜서 ’원죄’요 그 찌꺼기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그것에서 탈출 할 수 있는 방법은 다음의 제 6장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49항, 50항은 6장의 이야기로 가는 발판에 해당합니다.
성모 마리아라는 여인에 대해 처음 언급입니다. 이스라엘에는 ’마리아’라는 이름이 참으로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남산에서 돌 10개 던지면, 몇 개는 어느 성씨(姓氏)가 맞을 거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처지입니다. 많고 많은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들 가운데, 하느님의 구원업적에 인간으로서 참여한 특정한 여인을 가리켜 우리가 ’성모 마리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하느님의 업적에 참여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신약성서 루가복음 1장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소설과 같은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천사가 찾아왔고,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갖게 될거라고 전하고, 고민하다가 받아들이고, 천사는 돌아가고..... 이 과정을 기도문으로 바꾼 것이 ’성모송’입니다.
이 여인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몸을 취하시어 태어나실 때, 그 바탕이 된 분이십니다. 하느님을 모셔들이기에 합당(合當)해야 했으니, 바로 거기에 교회의 신앙은 보통의 인간들처럼 ’원죄에 물들지 않고 태어나셨다’라는 믿음을 더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도 귀한 것과 덜 귀한 것을 구별합니다. 다른 사람의 사진은 귀중하게 여기지 않아도, 부모님의 사진이라면 우리가 갖는 마음자세는 달라집니다. 그리고 그 사진에 대하여 누군가 모독한다면, 우리는 흥분합니다. 왜 그럴까요? 똑같이 종이에 옮겨놓은 그림에 불과한 건데...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은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것입니다.
이 여인의 순종을 통해서 하느님이 원하신 것은 무엇일까? 바로 인류의 구원작업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역할을 인간세계에 하신 ’그리스도’를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낳게되는 것입니다. 역사학자들은 이 예수는 기원전 4년경에 태어나서 기원 후 30년 4월 7일에 이 세상을 떠났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 분을 통하여 세상의 창조주요, 최고 관리자로서 우리가 굳이 구별하자면 성부로 부르는 하느님이 의도하신 구원 사업을 수행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업적은, 최초의 인간들이 자유의지를 행사하여 하느님의 뜻을 거슬려 멸망의 길로 나아갔던 것에 비해서,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순종으로서 하느님의 아프신 마음을 위로해 드린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