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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교리문답 해설 (8): 구세주의 구속사업
작성자이철희 쪽지 캡슐 작성일1999-04-25 조회수5,237 추천수0

제 2 절 구속(救贖)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내용은 인간으로 나신 하느님, 우리 사람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신 ’예수님의 활동내용과 그 목적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은 목적없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나 혼자만의 편리와 기쁨을 위하더라도 그것은 분명 목적이 있는 행동입니다. 지난 시간에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때, 하느님이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인간을 구원하신 목적은 사후(事後)봉사(奉仕), 영어로 이야기하면 ’After Service’차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애프터서비스’를 해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행동이 경제적 이익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훗날을 위해서라도 해야하고 또 당연히 그렇게 하는 행동의 한 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경험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사람이 만든 일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는데, 하물며 하느님이야말로 인간과 세상 만물을 만들어놓으시고, 그 사물이 올바른 길로 나아가기를 바라셨다면, 우리가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입장에서 해석한 소리입니다.  

 

  본론으로 갑니다. 시작하면서 말씀드린 내용과 중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만, 60번 항은 하느님의 아들로써 성자가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신 목적에 대한 것입니다.  

358-60. 천주 성자께서 무엇을 위하여 사람이 되셨습니까? : <답> 천주 성자께서 강림하심은 우리를 사랑하사 구원하고자 하시었음이니, 우리 죄를 대신 보속하시고, 우리를 마귀 지배에서 속량하시고, 당신의 교훈과 표양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입니다.

강림이라는 말과 강생이라는 말을 같은 뜻으로 사용합니다.  둘 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어 이 세상에 태어나셨다는 뜻을 갖는 말입니다.  이 하느님의 아들은 기원전 4년경,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다스릴 때, 인구조사를 할 때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조상의 뿌리에 대한 기억은 중요했는가 봅니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은 예수님을 기르신 아버지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었고, 다윗은 베들레헴 출신이었으므로 아기를 가진 마리아와 요셉은 베들레헴으로 호적 신고하러 갑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아기를 낳게 되죠.  그러나 짧은 기간에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모였으니, 요셉과 마리아가 숙소로 정한 곳은 말과 소가 머무는 외양간이었습니다.

 

  예수님 탄생의 목적을 인간의 죄를 보속하고, 악의 지배에서 값을 치뤄 구해내시고, 우리가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은 신앙고백입니다. 세상의 처음부터 하느님은 모든 것을 계산하시고 모든 것이 돌아갈 순서를 꿰고 계셨겠지만 그것을 우리가 알아듣는 언어로 표현된 적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과거로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던 예언자들의 소리를 정리하고, 그 말을 따라 살던 사람들의 변화된 생활을 통하여 정리한 믿음이라고 생각하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값을 치룬 방법은 목숨을 바치는 일이었습니다. 돈으로 계산하는 요즘시대와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역할을 가리켜 미사 때에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합니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은 목자로 비유되어 나타납니다.  목자의 사명은 양들을 보호하고, 맛있는 풀과 물가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의 사명을 띠고 오신 분이 양이라고 고백합니다.

 

  신약성서 마태오 복음 25장 최후의 만찬 이야기에 보면, 하느님에게서 옳은 사람으로 판단된 사람들은 양으로, 옳지 못한 사람으로 판단된 사람들은 염소로 비유합니다. 또한 구약성서 레위기 16장에 보면, 사람들이 지은 죄를 대신 지고 광야로 쫓겨가 죽음으로써 그 사람들이 지은 죄를 없애주는 염소 이야기가 있습니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나오는 같은 소재가 어떤 의미변화를 겪었는지 말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만, 예수님을 가리켜서 ’어린양’이라고 부르는 것은 목숨을 바쳐 인간의 죄를 없애주신 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다음 항목은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행위에 대한 요약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358-61. 예수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습니까? : <답>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방법은 고통을 즐겨 참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써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보면서 우리는 해야 할 일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다른 사람들의 좋은 행동을 보고 감탄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칭찬하는 일에서 머문다면,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좀 더 나은 신앙인으로 성장하고 자라려면 그것 말고 다른 입장의 일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모든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는 욕심이 생기고, 불화가 생기고, 다툼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생명까지도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하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구원자로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의 방법, 삶의 철학은 닥쳐오지 않은 고통을 찾아가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결국에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로마 국가의 반역죄인들에게 내리는 십자가 형벌’의 죄수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으로 끝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일 죽음으로 끝나고 만 일이었더라면,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희망은 아무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다음 항목인 62항과 63항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한 내용입니다.

358-62.예수께서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신 것을 천주로서 하셨습니까? 혹은 사람으로서 하셨습니까? : <답> 예수께서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신 것은 인간으로서 하셨으나, 동시에 예수께서는 천주시므로, 비록 미소한 고난의 일부까지라도 무한한 가치가 있습니다.

358-63. 예수의 미소한 고난이라도 무한한 가치가 있다면, 왜 그처럼 혹독한 고난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셨습니까?: <답> 예수의 미소한 고난이 무한한 가치가 있는데도 그처럼 혹독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천주의 공의(公義)를 원만히 채우시고, 당신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고 또 죄악을 미워하고 온갖 고통을 참아 받는 용기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보태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의미와 목적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살더라도 그것은 변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기쁨과 행복을 다른 사람이 대신 누리고 살기를 바라지 않을 것처럼, 그렇기 위해서는 최소한 우리에게 다가올 어려움도 우리가 겪어야 합니다.  한자 성어에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지금 당장은 우리가 바라지 않을 쓴 입장에 처한 일이겠지만 그것을 올바른 마음과 자세로 극복했을 때 달고 맛있는 결실이 온다는 뜻으로, 현실에 우리가 어떤 자세이어야만 하는가를 알려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첫 항목은 고통과 죽음의 주체에 대한 것입니다. 배고픔을 느끼고 울고 슬퍼하고, 수난의 고통을 겪은 것은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동시에 하느님이셨기에 같은 역할을 하느님도 하셨다는 믿음의 고백이 바로 교리의 내용입니다.  우리 몸에 손가락이 아프면 온 몸이 아프고, 다리가 한쪽이라도 구비되어 있지 않으면 듣기 싫은 소리로 ’병신’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내게 부족하고 빠진 것은 한 가지 지체이지만, 전체의 의미에서 볼 때 그렇게 부족한 것의 빈자리와 그가 해야 할 역할이 더 커진다는 소리도 될 것입니다.

 

  교회 초창기의 역사의 한때는 이 고통을 받은 주체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가현설> 또는 <성부 수난설>등의 이론이 그것입니다. 지금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남아있지는 않습니다. 없어지게 된 원인은 <가톨릭 교회의 교리를 잘못 해석하고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난 적이 없고 그를 따랐던 사람들이 만들어냈던 가공(加工)인물이라는 것이 <가현설>이론이고, 성자이신 분도, 성부이신 분도 같은 분이라고 했으니 성자가 겪은 수난의 일은 결국 성부가 겪은 것이라고 주장하던 이론이 후자의 이론입니다.

 

  사람들은 고통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은 오래 살고 싶어합니다. 좋은 일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했던 몇 가지 좋은 일들의 효과는 영원히 가기를 바랍니다. 그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껏해야 100년 이상을 내 정신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갖는 욕망도 그러하다면, 사람의 인식수준을 넘어서 영원히 사시는 하느님이 인류를 위해서 하신 일의 효과는 사람이 흔히 생각하는 수준을 넘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보이신 일의 효과는 영원히 간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좋은 일의 결과는 그저 하늘에서 만들어져서 뚝 떨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다른 사람이 거둔 일의 성공에 대해서는 그렇게 바라보고 생각하고, 그래서 시샘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세상일에는 같은 법칙이 적용됩니다.  기본으로 준비되는 요소의 정도 차이에 따라서, 약간씩 차이가 나긴 합니다만, 성공을 바란다면 열심히 해야 합니다.  63항에 기록된 것처럼, 하느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한 고통을 예수님에게 허락하시고 그 고통을 극복하게 하신 것도 우리가 바라고 생각하는 차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인간으로 오셔서 그 모든 고난을 가볍게 뛰어넘으실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을 그대로 채우신 이유는 같은 입장에 처했을 때 우리도 그 같은 본보기를 보일 수 있도록 하라는 소리입니다.

 

  다음 세 가지 항목(64-66항)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련된 것입니다.

358-64. 예수께서 죽으신 후에 그 육신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답> 예수께서 죽으신 후에 그 육신은 제자들이 거두어 새 무덤에 장례 지내었습니다.

358-65. 예수께서 죽으신 후 그 영혼은 어디로 가시었습니까? :<답> 예수께서 죽으신 후 그 영혼은 고성소(림보)로 가시어 그때까지 천당에 들어가지 못한 성인 성녀들을 위로하여 주셨습니다.

358-66. 예수께서 죽으신 후 다시 살으셨습니까? : <답>예수께서 죽으신 후 미리 말씀하셨던 대로 제 3일에 당신의 전능으로 영혼과 육신을 결합하시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을 ’예수부활’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죽으면 땅 속으로 갑니다.  예전부터 그래왔습니다.  인간이 흙에서 만들어졌기에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죽으면 무덤을 만들고 후손에게 그 관리를 맡깁니다.  죽은 사람은 모르죠. 자신의 무덤이 올바로 관리되는지 어떤지를 말입니다.  그러나 죽은 자를 무덤에 모시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자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우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무덤에 묻혔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스라엘 종교의 예절 한 가지가 적용됩니다.  당시 국가는 없어진지 오래였지만, 이스라엘 민족들을 지탱시켜 오던 정신에는 율법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율법은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시나이 산 위에서 받았다는 십계명을 시대에 따라 해석하고 해설한 내용들로 아주 구체적인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안식일이 시작되면 죽은 것을 손에 대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시간 규정에 따르면, 그 안식일은 금요일 해가 지면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은 금요일 오후 세시 경이었습니다.  죽음의 위협 때문에 상당수의 제자들은 줄행랑을 친 뒤였고, 안식일의 시작시간은 다가오고 있었으니, 예수님의 시신은 서둘러 무덤에 안장됩니다.  시신이 썩을 때 나는 냄새를 중화시키기 위한 몰약(沒藥 : 올리브과의 관목. 아라비아와 아프리카에 분포하는데 고대로부터 방향 및 방부제로 쓰이고 즙액은 향수, 의료품, 구강, 소독 및 통경제, 건위제 등에 씀.  몰약의 즙액으로 만든 약)도 바르지 못하고 매장하게 됩니다. 서둘러 무덤에 안장하고 입구를 막아 놓습니다.

 

  사람은 육신과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보이는 육신은 죽고 나면 땅 속에 묻히고, 그 영혼은 분리됩니다.  신앙에서는 사람의 영혼은 하느님께로 올라가 ’사람으로 살 때에 이룩했던 삶의 결과에 따라 천국이나, 지옥이나, 연옥으로 간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의 영혼은 보이는 육신을 무덤에 남겨두고, 하느님의 아들이 나타나 구원을 기다리던 영혼들이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의 이름을 림보(臨報. 라틴말: limbus : 지옥과 천당 사이에 있어 그리스도교에 접할 기회가 없었던 이나 세례를 받지 못한 어린이, 다른 종교인들이 머물고 있던 곳)라고 합니다. 마태오 복음 27,50-52(예수께서 다시 한번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바로 그 때에 성전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지고 땅이 흔들리며 바위가 갈라지고 무덤이 열리면서 잠들었던 많은 옛 성인들이 다시 살아났다)에는 임보를 기억하게 하는 성서구절의 내용이 나옵니다. 지금 말씀드린 성서 구절의 내용에 나오는 성인들의 부활은 예수님이 거기에 찾아가셨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다음의 66항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에 대한 것입니다.  거기에 나온 내용처럼 예수 부활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은 부활입니다.  이 지상의 삶이 아무리 화려하고 내가 쌓아놓은 재물이 많다고 하더라도, 만족하게 이 세상의 삶을 마치지 못한다면 별 의미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는 것도 자녀를 이 세상에 낳고 기르고 자라게 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이외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뭔가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흘만에 부활하십니다.  시간상으로 따지면 그보다 못하지만 날짜 계산으론 그렇습니다.  금요일 오후 3시경에 돌아가셨고, 저녁 해가 떨어지면서 안식일 시작되었으니 이틀째이고, 다음날 해가 떨어졌을 때는 안식일이 끝난 다음날이니 세 번째 날이지만, 밤이 되었으므로 다음날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 날 해가 떴을 때, 여인들 몇 명이 시신에 몰약을 바르기 위해서 무덤에 왔다가 시신이 없어지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다음의 두 가지 항목은 부활 후 이루어진 일에 대한 것입니다.

358-67.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시었습니까? : <답>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이 세상에서 40일 동안 가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의 신덕을 굳세게 하여 주시고, 당신의 가르침을 마치시고 교회창립을 완성하셨습니다.

358-68.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 40일에 무엇을 하시었습니까?  : <답>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 40일에 당신의 전능으로 하늘에 오르셨으니, 이것을 ’예수승천’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뒤, 40일간 제자들 곁에 수시로 나타나시며 이제까지 3년간에 걸쳐서 교육시켰던 제자들에게 다시 확신을 심어주시기 위해서 움직이십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만족하실 기간, 40일이 다 되도록 제자들에게 나타나고 가르치시는 일이 계속하십니다.  그 만족한 기간을 채우신 다음에 예수님은 하늘로 오르십니다. 제자들을 추가로 그 정도 교육시키고 그만큼 했으면 충분했다 싶으셨을 것입니다.  사람의 약한 입장에서 생각하면 또 다른 판단을 하겠지만 예수님은 40일만에 제자들을 떠나십니다.  육신과 영혼이 합쳐진 채로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이것을 가리켜 ’예수 승천’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보여주는 한 가지 이야기가 요한복음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20,24-29에 나오는 ’토마의 불신앙’(216면)이야기입니다. 처음 나타나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않았던 토마스가 두 번째 나타나실 때는 함께 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토마에게 당신의 몸을 만져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성서에는 40이라는 숫자가 몇 번 곳곳에 나옵니다.  설화적인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노아의 홍수는 40일간 내린 비로 시작됩니다(창세기 7,17).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시는 자리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400년 동안 남의 나라에 가서 종으로서 압제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도 하십니다(창세기 15,13).  모세가 계약의 십계명을 받기 위하여 시나이 산에서 40일을 머뭅니다(출애굽기 24,18=126쪽). 여호수아 때에 이르러서는12명의 선발대를 파견하여 40일간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옵니다(민수기 14,25).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대로 믿지 않았기에, 하느님은 하루를 1년으로 쳐서 40년간 광야에서 반역의 무리들이 죽을 때까지 광야를 헤매게 합니다(민수 14,34).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유배를 떠났던 기간 40년이었고,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유혹을 이겨내신 기간이  40일입니다. .

 

  다음, 69항은 믿음에 대한 내용입니다.

358-69. 예수께서 부활승천 하시어 성부의 오르편에 좌정하신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  <답> 예수께서 부활승천 하시어 성부의 오르편에 좌정하신다는 뜻은 예수께서 천주성으로는 이미 천주 성부와 같은 한 천주이시나, 인성으로도 천주의 위엄과 영광을 만유(萬有)위에 누리신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에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 하늘에서 성부의 오른편에 자리잡고 앉으신 것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우리가 그렇게 고백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고백할 때의 의미는 <문><답>에 나온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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