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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장자 교리 교안 (3): 성서
작성자이철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0-02-25 조회수5,702 추천수3

3. 성서(聖書)

 

 

 3.0 인사

어르신 여러분!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오늘은 어르신들을 만나 뵙는 세 번째 시간입니다. 첫 번째 만남에서는 인사소개와 더불어 간단한 식사로 끝냈고, 지난 시간에는 천주교에 대해서 말씀드렸읍니다. 간단한 요약을 다시 하자면, ①하느님이 보내신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삶의 자세와 방법들을 따라 살기로 다짐하며 모인 사람들의 공동체를 교회, 그리스도교라 한다. ② 그 교회는 인간의 생각과 실천 방법의 차이 때문에 역사적으로 1517년 이후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또는 천주교와 개신교로 분리되었다.  ③ 겉모습을 달리하여 발전해온 과정 가운데서 처음에는 같이 생각하던 성서마저도 인간의 생각을 담아 ’하느님의 말씀이네! 아니네!’하며 주장을 달리해 왔다. 천주교에서는 73권의 성서를 받아들이고 사용하지만, 개신교에서는 그 중에 7권을 뺀 66권만이 성서라고 주장한다.  ④ 한국 천주교의 역사는 1784년에 정치 권력에서 밀려나 있던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현실개혁의 학문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렇게 독자적으로 연구하고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된 나라는 우리나라의 조상들이 최초이고 독자적인 자생적인 교회였다는 사실을 말씀 드렸읍니다.

 

오늘은 그 이후의 내용가운데서, 성서(聖書. THE BIBLE)에 대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읍니다.

 

 3.1 시작기도

시작기도로 ’가톨릭 기도서 101면’에 나와있는 ’성서 사도직을 위한 기도’를 바치겠읍니다. 물론 기도문의 앞과 뒤에는 첫 시간에 알려드렸던 ’성호경’을 하겠읍니다. 전체를 천천히 함께 하겠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사람을 귀하게 지으신 하느님 아버지...

 

 3.2 성서(聖書)에 대한 말씀을 드리는 의도

오늘 말씀드릴 내용은 <성서>에 대한 것입니다.  성서라는 주제를 통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성서를 어떠한 마음자세로 보아야 하는지, 그 자세에 대한 것입니다.  짧은 시간에 여러 어르신들에게 모든 것을 설명할 재주는 없읍니다. 시간이 짧은 탓도 있지만, 제가 인간적으로 가진 지혜의 길이도 짧기에 제가 가진 것을 다 풀어놓는다고 해도 여러 어르신들이 가지실 법한 의문의 해소에는 아주 조금만이 도움될 것입니다.  <성서에 대한 이야기의 목적>은 어르신들에게 교리를 준비하기 위한 선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성서>에 대한 이야기 시작합니다.

 

 3.3 성서(聖書)라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성서(聖書)라는 말의 낱말 풀이는 우리말 사전에 ’(聖書)=그리스도교의 성경, (聖經)=종교상 신앙의 최고 법전이 되는 책. 그리스도교의 신구약성서. <불교의 팔만대장경, 유교의 사서오경, 회교의 코란등>’로 설명하고 있읍니다. 말은 복잡합니다만, 여러분에게 보여드리는 ’이 책’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성서에 대한 가톨릭 사전의 정의(定意)는 ’하느님께서 자기 자신과 인류에 대한 자신의 의지에 관하여 계시한 바를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기록자가 작성한 책들의 집합체로서 교회가 정전(正典:CANON)으로 인정한 것’을 말합니다.

말은 복잡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의 순수한 기록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인간이 읽고 알아들을 수 있는 글로 쓰여진 하느님 자신에 대한 것과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의지를 담은 믿음의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4 성서의 구분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성서는 크게 구분하면, 구약(舊約)과 신약(新約)으로 구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맺은 옛 계약을 가리켜 ’구약’이라 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히 새로워진 계약을 ’신약’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말과 글자인 ’히브리어’로 쓰여졌고, 신약성서는 그리스어로 전해지고 있읍니다. 그런데 구약성서 가운데 7권에 해당하는 책은 ’이스라엘 히브리어’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개신교에서는 성서로 인정하지 않기에 천주교에서는 제 2 경전이라는 말로 포함하여 사용하고 있읍니다.

 

구약과 신약의 구별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을 기준으로 합니다. 그가 하느님의 아들로 오셔서 ’인간이 하느님의 뜻에 일치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신 구원사업의 완성’이후에 쓰여진 것은 신약성서라 하고, 그 이전에 쓰여진 것은 구약성서라 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예수님의 구원사업 완성시기를 기점으로 해서 이야기할 때, 농담 비슷한말로 묻는 내용이 있읍니다. 구약과 신약의 시기상 구별은 언제부터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을 때,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갈라진 때(마태 27,51)를 말하기도 합니다. 인간이 하느님께 다가가는 길을 제한하거나 어렵게 하던 그 가로막이 장애물이 제거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내용입니다.

 

 

 3.5 성서는 믿음[信]의 고백(告白)서(書)입니다.

이제부터는 성서의 내용을 몇 가지 주제로 말씀드리겠읍니다. 그 첫 번째는 ’성서는 믿음을 고백하고 그것을 기록한 책’이라는 것입니다.

 

요즘은 과학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저 모든 것을 과학의 힘으로 만들고 조작하고 맘대로 할 수 있다고 믿는 시대가 됐읍니다. 얼마 전에는 살아있는 양의 세포를 떼어내서 똑같은 양을 만들었다고 하는 ’복제 양 돌리’파동이 있었읍니다. 그런 것도 잠시 뿐, 이제는 인간 생명의 유전자까지도 좌지우지(左之右之)하겠다고 덤비는 세상이 됐읍니다. 유럽연합에서 인간 유전자 조작에 대한 특허권까지 내어주었다고 합니다. 막연히 그네들의 일이겠거니 할 수만은 없는 일이지만 사람이 진짜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다고 하느님이 한탄하셨던(창세기 11장, 바벨탑사건) 일들을 과학이라는 이름을 앞세워 지금의 인류는 자행(恣行=방자한 행동)하고 있읍니다. 굳이 그렇게 되는 시대에 참회(懺悔)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과학이라는 이름을 앞세워 인류는 모든 것을 맘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서는 세상을 그렇게 바라보지 않읍니다.  과학의 이름과 기준으로 재면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여지지도 않지만, 세상의 시작은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믿음을 고백하고 있고, 그 기록을 담고 있는 것이 성서입니다.

 

구약성서 첫 번째 창세기(創世記)에 보면, 하느님은 세상을 당신의 순서에 따라 만들어내시며, 자그마치 7번에 걸쳐서 ’보시니 참 좋았다’고 기록합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금수강산에 대한 예찬과 별 차이 없는 낱말입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 날에 인간을 만들어 내시면서,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1,26).....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셨다(1,27)’고 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태어나고 지어졌으니,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을 고백하는 성서의 모습입니다. 이런 성서의 배경에는 ’유전자 조작’이라는 소리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성서의 배경에는 신분의 높고 낮음이나,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른 차별은 없는 것입니다. 모두 평등한 것이죠. 왜냐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태어났으니까 말이죠.

 

 3.6 성서는 삶의 지침서(指針書)입니다.

두 번째, 성서의 특징 사항으로 말씀드릴 것은 ’성서는 삶의 지침서’라는 것입니다.  성서는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언어로 쓰여지긴 했읍니다만, 단순히 머리 좋은 한 사람이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쓴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공동의 작품입니다.

 

만일 성서가 순수한 인간의 기록이었다면, 우리가 곳곳에서 읽을 수 있는 위대한 인간들의 오점이나 오명(汚名)에 해당하는 것들은 빼고 기록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일기를 쓰시는 분이 있다면, 아마 쉽게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가급적이면 책임이 있더라도 적게 기록했을 것이며, 욕먹을 일이 있다면 어쩔 수 없었던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바꿔 기록할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에 대한 언급을 최소한으로 적거나  아예 기록하지 않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한 일도 사실 그대로 적혀 있기도 하고, 그 잘못을 다시 범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기록하고 있으며, 잘못을 범하여 하느님에게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도 기록하고 있읍니다.

 

성서에는 참된 마음과 삶의 자세로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는 방법들을 기록하기도 합니다. 지금부터 2400~2500년 전에 기록되었다고 믿기 어려운 지혜들을 우리가 읽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지혜서가 그렇고 잠언서, 집회서가 그런 책에 속합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내용,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들이 적혀 있는지는 우리가 읽어봐야 할 일들입니다.

 

 3.7성서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하느님 사랑의 기록입니다. - 부활

세 번째, 성서의 특징사항으로 말씀드릴 것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하느님 사랑의 기록’이 바로 성서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복잡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서 이 세상을 삽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목적을 정리한다면 아마도 ’행복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복을 찾아가기는 해도 구체적으로 행복이 어떤 모양인지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읍니다.

 

그 행복의 모습을 구약성서에서나 신약성서에서나 동일하게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라고 알려주고 있으며, 그 목적에 이르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것은 부활(復活)이라고 가르치고 있읍니다. 우리는 부활의 본보기를 보인 분을 신약성서 복음에 나오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마르코1,1)으로 찾을 수 있읍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이 각각 저자로 알려져 있는 복음서들에는 우리에게도 다가올 행복, 부활에 대한 모습을 기록하고 있읍니다. 사람으로 부활의 영광에 참여 한 기억을 갖는 이들은 아무도 없읍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마지막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먼저 얻으려고 애를 쓰기도 하지만,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얻으려고 인생에서 많은 시간을 사용합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선물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선물을 구체적으로 누가 받을 수 있고 없는지 구별할 수는 없읍니다.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인간의 짧은 생각을 내세워 하느님의 뜻을 거역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활에 대해서 재미를 느끼며 그것을 즐기고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 성서를 읽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인간의 생활에 재미를 느끼고 있고 내가 하는 일들이 모두 내 뜻대로 잘 이루어지고 있는데 굳이 이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의지(意志) 따위를 알아서 무엇하겠는가?’하는 생각을 갖기 쉽기에 그렇습니다.  혹시라도 내가 지금 현실에서 성서를 제대로 읽지 않았다거나 현실에서 소홀히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인간의 재미에 지나치게 심취(深醉)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분명 이렇게 사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은 가끔씩이라도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속된 말로 ’도둑질도 해 본 사람이 잘 한다’고 했습니다.  평소의 삶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까이 대하고 살지 않았던 사람이라고 한다면, 정말로 다급할 때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여유를 마련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3.8 우리 삶에 성서를 가까이하고 친숙하게 하기

우리 신자들은 과연 성서를 얼마나 접하고 사는가?  성서에 대한 이야기를 해 나가면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서를 지나치게 어려운 것으로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성서는 내가 공부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공부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삶의 결실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지, 그 열매가 결코 나에게 영향을 끼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혹시라도 성서를 공부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간의 손해를 본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과나무 아래에 누워서 맛있는 사과를 보면서 "저 사과가 언제나 나에게 떨어지는가?  난 여기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데....."라고 생각하면서 기다리면 위험합니다.  우리가 그 사과를 먹으려면 사다리를 놓거나 펄쩍펄쩍 뛰거나 막대기를 휘두르거나 해야 합니다.  또한 그렇게 해서 떨어지는 사과를 씻어서 먹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무작정 누워서 기다리다가는 떨어지는 사과의 힘에 내 이빨이 부러지거나 내 눈두덩은 밤텡이가 됩니다.

 

여러분들은 미사에 오실 때, 성서를 가져오십니까?  매일미사만 가져오시죠?  성가집과 더불어서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에서조차 성서를 직접 읽을 수 있는 기회를 뺏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개신교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가 비판하기는 합니다만 그들 가운데서 우리가 배울 점은 있습니다.  공자 할아버지도 그렇게 말씀하셨다나요?  삼인행(三人行)이면, 필유아사(必有我師)라고 말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남을 비판하면서 닮기도 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개신교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것 정도는 닮았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3.9 마침 기도 -- 성서 사도직을 위한 기도와 성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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