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강생구속(降生救贖)
6.0 인사
사람은 항상 현실의 모습에 불만을 갖고 삽니다. 꼭 불만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면, 현실 변화를 위한 다짐이요, 욕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다짐과 불만이 적절히 그러나 올바로 발휘되어야만 인간의 세계는 자꾸만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발전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말입니다.
이것저것 바꿀 것 많고, 이것저것 얻고 싶은 것이 많은 세상에서 우리가 잘 사는 방법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정말 말 그대로 많이 얻고 사는 방법이 있을 것이고, 우리가 마음을 바꿔 이미 세상에서 내가 얻고 싶은 것을 다 얻었다고 생각하며 사는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의 경우에는 아직도 할 일이 많다고 느끼는 것이 당연하지만, 둘째 방법에서 꼭 피해야 할 것은 ’포기하는 마음’이 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 어르신들에게 하는 교리의 내용, 제목은 강생구속에 대한 것입니다. 이 내용은 우리에게 인간으로 오셨던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시작기도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을 가장 많이 담고 있는 사도신경의 부분입니다.
6.1 예수에 관한 역사적 사실
사람은 진실을 좋아합니다. 당연한 것이겠죠. 거짓보다는 뭔가 더 나을 것이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이 진실인지 그리고 진실이라고 이야기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 그 평가는 달라지게 돼 있습니다. 바꾸어 이야기하면, 사람은 자신이 세우고 있는 목적에 따라 그 평가를 달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라면, 이 자리에서 지금 말씀드리는 예수에 관한 사실도 우리가 평가를 달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받아들이건 받아들이지 않건 사실인 것은 따로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이득이 되고 도움이 되는 일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비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엄연한 사실도 거짓으로 둔갑시키는 특징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함께 자리하고 계시는 교회에서 기억하는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등장한 것은 로마제국 황제 아우구스토 치세(治世 B.C64-14A.D)때의 일이었습니다. 이 황제는 자신의 통치기간 중에 인구조사를 실시합니다. 이 인구조사는 조상들의 혈통을 따라 조상들의 고향으로 가서 등록하도록 조치가 내려졌던가 봅니다. 이 내용은 루가 복음서에도 나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었고, 다윗은 베들레헴 출신이었기에 인구조사에 따른 호구등록을 그곳으로 하러 갔던 것이었습니다. 그때에는 부인 마리아가 만삭(滿朔) 때였으므로 그곳에 가서 아기를 낳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방이 없었던 마리아는 하늘의 이슬을 피할 동물들의 집에 가서 몸은 풀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출발한 인생은 훗날 성장한 몸으로 대략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자신이 말했던 여러 가지 일들의 결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십자가형은 로마 제국을 향하여 반기를 들었던 사람들에게 내렸던 정치적인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로마 제국 황제의 직접통치대신 총독을 역임했던 빌라도 시대에 예수는 죽음을 맞게 된 것입니다. 이 날은 역사적으로 기원 후 서기 30년 4월 7일 금요일이라고 학자들은 말을 합니다.
6.2. 비판적인 견해
위에서는 제가 사실적인 견해를 말씀드렸습니다. 사실적인 견해라는 것은 해석을 붙이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것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런 사실적인 견해에 인간의 생각이 들어가고 융합될 때에 최초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합쳐서 비판적인 견해라고 부르겠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는 여러 가지입니다. 제가 다 설명을 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역사적인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것, 다음으로 먼저 다루어야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신앙으로 형성된 내용에 대한 불만 때문에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일, 사실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자신 삶의 한 부분으로 바꾸는 것을 거부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그 모습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되었든 간에 그렇게 거부한다고 해서 달라질 역사적인 사실은 없다는 데에 사람이 갖는 비판적인 견해의 한계(限界)가 있는 법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었다든지, 예수는 아예 이 세상에 태어난 적도 없는데 몇몇의 사람들이 조작해서 만들어 낸 가공의 인물이라든가, 예수는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한 것도 아니었고, 십자가의 죽음을 당한 것도 아닌데 후대의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는 등 여러 가지 비판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한결같이 반대급부를 노린 설명들입니다. 자신의 잘못된 견해가 계속 빛을 보자면 반드시 예수라고 하는 인물과 그에 대한 추종자들의 삶을 거부해야만 하는 것들이기에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그런 주장들을 반대로 읽으면, 그만큼 예수는 독특하고 남다른 인물이었다는 판단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6.3 역사적인 사실에서 신앙으로
훌륭한 일들의 의미는 훗날에 드러나는 법입니다. 제가 위대하고 뛰어난 사람이라고 외쳐도 야박한 세상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 명예와 명성에 흠집을 내고 깎아 내리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 노력들 때문에 일부는 흠집을 받는 경우도 있읍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사람이 일부러 보인 가식적인 행동이 아니라면 수포(水泡)로 돌아가는 것이 그 일들의 결과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봐 왔던 일들이 우리에게 특수한 의미로 새롭게 다가오고, 그것이 일정한 체계를 거쳐 우리에게 다시 다가오면 그것이 신앙의 힘이 됩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완벽하게 구비돼서 신앙으로 다가오지는 않읍니다.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저는 그 분이 남기신 뜻을 이리저리 해석하며,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일을 하고 있지만, 신앙의 과정으로 형성되는 데에 그와 같은 과정을 거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도 어찌하면 ’인간의 오만’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을 인간이 꿰고 해석할 수 없는데 마치도 그것이 가능한 것처럼 여러 어르신들에게 말씀드리고 있으니까요. 제가 처음부터 꿰지 못하는 과정에는 말 그대로 엄청난 힘,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힘’이 있었을 것입니다. 후대에 신앙인으로 살고 있는 우리는 그 기억의 힘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보는 것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이 가장 뛰어났던 민족인지는 모릅니다. 사람의 판단기준은 자꾸만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던 때는 지금부터 약 2000년 전이라고 말씀드렸읍니다. 이 때의 사회적인 상황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있던 곳은 이미 오래전에 몇 개국의 지배를 거쳐 로마제국에 편입된 상태였고, 처음에는 자치국의 형태로 관리되다가 예수님이 태어나기 얼마 전, 로마제국 총독의 직접통치체제로 바뀌어 있었읍니다.
과거 인간의 힘을 넘는 엄청난 ’하느님의 도움’으로 역사에서 놀라운 일[=엑소더스]을 경험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월이 지나긴 했지만, 그 영광이 다시 한번 더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읍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때가 되어 그 역사를 실행한 것이었읍니다. 백성들의 바람이 이루어진 듯 했으나,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라던 모습 그대로는 아니었읍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활동하신 것은 말 그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모습으로 활동하신 것이었지, 백성들을 다스리고 통치하던 사람들의 생각대로 움직이신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일을 도와줄 일꾼을 찾아 다윗의 후손, 요셉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의 부인이 되기로 약혼했던 마리아에게 천사를 보내어 혼전(婚前) 임신(姙娠)의 예고와 그 결과로 태어나게 될 아기와 아기의 이름과 그 아기가 할 일을 알려줍니다. 인간의 수락을 얻으신 하느님은 그대로 실행하십니다. 여기서 인간이 수락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에게 좋은 결과를 미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하느님은 인간의 동의가 없으면 실행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어르신들은 그 응답을 늦게 하신 것입니다. 늦게 하신 것만큼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도 깨달아야 합니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그렇게 인간의 몸을 빌려 태어나게 된 하느님의 아들은 베들레헴 근교의 마굿간에서 태어납니다. 그러나 태어남의 기쁨을 느낄 사이도 없이 정치권력자였던 헤로데왕의 시기를 받아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아서 에집트로 피난을 갔고 어린 시기를 거기에서 보냅니다. 그 후 12살이 되었을 때, 유다인으로서, 율법을 지킬 사람으로서 서약을 하게되고 서른 살에 이르러서야 하느님의 파견명령을 수행하는 사람으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가 했던 일을 통칭하면, 삶의 자세를 바꿔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읍니다. 그가 했던 일에 위험을 느낀 권력자들[로마 권력에 빌붙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던 사람들]에게서 ’로마제국에 대한 반역자’의 죄로 체포되고 불순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를 따랐던 제자들 가운데 배반자였던 이스가리옷 출신 ’유다’를 제외하고 11명의 제자들은 그의 가르침과 삶의 모범을 지속적으로 실천하게 됩니다. 거기에 하느님의 힘을 함께 갖고 활동했던 그들의 노력으로 이 시대에 우리가 보는 그리스도교회가 활동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신앙의 형성 과정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빠뜨린 내용이 있읍니다. 신앙은 단순히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형성되고 발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대한 것은 따로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에 태어나 어느 정도 살다가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하는 인간과 그가 가진 작은 머리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인간의 머리로 모든 것을 해석할 수 없다는 소리는 그 빈자리에 하느님의 역할을 깨닫겠다는 부분도 남겨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6.4 그 예수가 한 일......신약성서에 대한 요약 소개
위에서 말씀드린 것은 역사적인 일에 신앙에 관한 일 몇 가지를 덧붙여서 설명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렇다면 예수는 이 세상에 와서 어떤 일을 했는가?’하는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읍니다. 이 부분은 신약성서에 나오는 이야기의 요약 설명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훗날 시간을 마련하실 수 있을 때, 여러분이 신앙의 마음과 정신으로 성서를 가까이 하시는 기회를 만드시기 바랍니다.
시작부터 순탄하지 못했던 삶을 시작한 것이 예수의 일생이었읍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집도 제대로 구비되지 못한 곳에서 태어난 불행은 사실 상, 하느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자세를 표현한 것이었읍니다. 자신의 것을 아무 것도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살았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태어나고 8일 만에 성전에 봉헌하러 올라갔던 아기 예수의 어머니에게 성전에 있던 예언자는 엄청난 선언을 합니다. 이 아기는 커서 사람들의 ’반대받는 표적’이 될 것이고 그 어머니의 마음을 칼에 찔리는 듯한 아픔을 겪게 될 것이라는 소리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동방에서부터 찾아온 이방인의 박사들에게서 ’세상의 임금’으로 고백을 받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받읍니다. 그러나 그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에집트로 피난을 떠나야 했읍니다. 험난한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성년이 되어서 준비된 어느 날 예수는 길을 떠납니다. 이제는 하느님의 일을 할 나이가 되었다고 소리를 들은 것일 수도 있읍니다. 그 걸음에 요르단강으로 찾아가서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하느님의 복음은 악의 힘을 이길 수 있는 것이고, 사람들이 악에서부터 탈출할 수 있는 힘이 된다는 것이었읍니다. 그리고 사람들 가운데에 하느님이 함께 머무신다는 뜻으로 기적을 행합니다. 가르침을 통하여 백성들을 깨우치고, 기적을 통하여 확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활동했던 대상들은 지도층의 인사들이 아니었읍니다. 그들에게서 밀려나고 그들의 억압을 받던 사람들이었읍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업을 계승할 사람으로 뽑았던 사람들도 변두리의 사람들이었읍니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어부들이었고 사회계급으로 분류하자면 밀려난 사람들이었읍니다. 마귀들려 고생하는 사람들을 그 마귀에게서 해방시켜 주고, 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치유해주며, 세상을 하느님의 시각과 판단으로 볼 수 있도록 가르쳐 주기도 하시고, 죽었다고 하던 사람들을 살리심으로써 하느님의 진정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여주기도 하셨읍니다. 무엇보다도 커다란 가르침을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한다는 것이었고, 몸소 그 시범을 보이신 것이 십자가의 죽음이었읍니다.
전쟁 수행의 목적을 위해서 군대에서는 뒤로 달아나려는 사람에게 지휘관이 총을 쏴 죽일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스스로 먼저 모범을 보이신 분이었읍니다. 자신이 세웠던 계획대로 스승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스승을 은전 30냥에 팔아 넘겼던 제자 이스가리옷 사람 유다를 책망하지 않으셨고, 죽음이 두려워 달아나는 제자들을 꾸짖지 않으셨읍니다. ’제자들이 언젠가 당신의 뜻을 알아듣고 같은 모양으로 실천하겠지. 자신의 목숨이 귀중하다는 것만큼 다른 사람의 생명도 귀중히 여겨 희망을 주고 사랑을 선포하는 일에 합류하겠지...’하는 기대를 가지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죽음의 길로 가게 되었고, 로마제국의 반역자로서 십자가위에서 비참한 인간의 생명을 마감하신 예수님의 생애는 그것으로 끝난 줄 알았읍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고 말았더라면 보통의 사람이 세상에서 큰소릴 치다고 어이없이 죽고 만 것으로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읍니다. 다신 살아난 것입니다. 신앙에서는 그분이 십자가위에서 죽어 땅에 묻힌 지[우리 사회의 매장과는 다른 방식임] 사흘만에 새로운 희망을 주며 살아나신 것이었읍니다. 이 모습을 우리의 생명도 훗날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 다시 살아나고 하느님의 판정을 받게 된다는 본보기를 보이신 것이었읍니다.
그렇게 사흘만에 부활(復活)하신 예수님은 흩어지지 않고 모여있던 11명의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고 그들과 세상 마지막날까지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을 남겨주십니다. 그 약속을 실천하고 다짐하는 뜻으로 하느님의 또 다른 힘인 성령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다음 40일간을 제자들과 함께 머무셨던 예수님은 하늘나라로 오르십니다. 이를 가리켜 승천이라고 합니다. 그 후 10일 후에 하느님의 힘 성령이 내려오셨고 그 힘은 제자들을 통하여 이어진 역사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맡겨진 임무를 다하신 예수님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삶에 희망을 주십니다. 삶을 힘들고 괴로워도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이고 그 모습을 통하여 새로운 모습인 구원으로 갈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6.5 신앙인이 나아가야 할 길
예수님의 일을 기억하는 신앙인이 할 일은 그래서 명백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업적을 계속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무조건 희생하면서 무조건 모든 것을 남에게 당하고 살아야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이 세상에서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하고 실천할 수 있는 바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본보기, 그 목적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먼저 가정이 평화롭게 하려는 데 힘을 쓸 것이며, 내가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업적을 전하고 그들도 하느님의 업적을 찬미하는 데에 협력할 수 있도록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팔을 들고 대로(大路)에서 큰소리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반대로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으려고 혼자서만 신앙을 간직하고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것도 잘하는 일은 압니다. 식물들은 햇빛을 받아들이고 땅에서 양분을 끌어올려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스러지기도 하지만, 다른 생명체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열매를 남깁니다. 식물들처럼 단발에 끝나는 인생은 아닌 것이 사람의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일이 더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반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때 엄중한 문책을 받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생각을 떨쳐버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정성을 다하여 그러한 일로써 좋은 결실을 맺고 다른 사람들이 기쁨의 생활에 함께 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으로 오셨고 그 본보기를 기억하는 우리가 해야하고 할 수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6.6 마침기도..... 우리 삶이 다른 이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고백의 기도> 와 <통회의 기도> 그리고 <봉헌의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