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기도(祈禱)
8.0 인사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오늘은 어르신들을 모시고 하는 교리의 여덟 번째 시간입니다. 이제는 교리의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을 포함해서 앞으로 세 번이면, 제가 여러 어르신들에게 꼭 말씀드리고 싶은 내용도 끝이 나야 합니다. 더 드리고 싶은 말씀도 많기는 하지만, 제가 하고 싶은 욕심을 다하라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분들은 말씀 하실지도 모릅니다. 말을 많이 하고 많이 가르쳐 줘 봐야 나중까지 기억나는 것 하나 없더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 말씀을 다 인정해줘서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기에서 말씀드리는 내용들은 같은 현장감을 갖고 들으실 기회는 쉽지 않을 것이고, 여러분들이 웬만큼 노력해서는 짧은 시간에 같은 것을 얻기는 힘들 것입니다.
시작기도 하겠습니다.
기도라는 주제에 맞춰, 아직은 세례를 받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으려고 노력하는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들을 위한 기도, 기도서 96쪽에 나오는 <비신자들을 위한 기도>를 하겠습니다.
8.1 시작을 위하여...
어르신 여러분들은 하루에 무슨 말을 가장 많이 하고 사십니까? 배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십니까? 아니면, 손자 손녀들과 놀아주면서 그 아이들을 혼내주거나 할아버지 할머니로서 옛날 이야기를 해 주는 이야기를 많이 하십니까? 우리가 어떤 일을 많이 하든지 그 일을 하는데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기쁨이 없는 행동은 의무감만 남게 되고, 세상을 의무감에서 바라보면 슬픈 것은 인생입니다. 또한 의무감만 남는 생활을 한다면, 짜증을 내기 쉬운 생활이 될 가능성이 훨씬 더 많아질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권할 만한 생활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행동을 하기 전에 많은 생각을 합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생각 없이 먼저 해치우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상외로 일의 중간 중간에 계획을 수정하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말이죠.
이 생각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우리는 대화를 사용합니다. 대화란 참 좋은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내 생각만을 말하고 다른 사람이 내 생각을 따라 주기를 바라는 목청 높은 소리를 우리는 대화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화란, 내 생각을 말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어주는 것이고 양자간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 간에 갖고 있는 간격을 좁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대화가 가능하려면 자신이 가끔씩은 욕심을 줄일 수도 있어야 합니다. 오늘 여러 어르신들에게 말씀드릴 '기도'라는 주제도 달리 말하면 '대화'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 대화를 하는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사람과 하느님 사이라는 것이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8.2 대화(=기도)의 종류
말을 하지 않으면 무척이나 답답한 것이 우리네 삶입니다. 어쩔 수 없는 환경의 영향 때문에 말을 못하게 되었다면 판단이 다르겠지만, 고기는 씹어야 맛이고 말은 해야 맛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우리가 입으로 씹을 수 있기 때문에 하는 소리는 아닙니다. 우리는 말을 통해서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내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생각도 알아차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 어르신들에게도 기도는 대화와 같다고 했으니, 일반적으로 대화에 적용된 목적을 기도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말과 고기의 맛처럼, 기도도 해야 맛입니다. '기도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다'라고 정의를 내리기 전에, 기도도 해 본 사람이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것이고, 많이 해 본 사람이 더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는 법입니다. 하면 할수록 더 하고 싶어지는 것이 기도라고 한다면, 반대의 말도 성립할 것입니다. 기도를 자주 하지 않았거나,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일수록 기도를 더 멀리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신앙인인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고, 그 하느님께로부터 힘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이 인류를 향하여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그 뜻을 실천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서로 교감이 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대화와 유사한 모습을 갖는 기도에 대해서 말씀드렸으니, 이제는 기도의 종류를 구별해 볼까 합니다.
8.2.1 기도서에 적혀있는 내용을 따라 내가 거기에 참여하는 대화(=기도)
첫 번째로 말씀드릴 수 있는 기도의 모습입니다. 기도의 말뜻은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말씀드리기는 했습니다만, 일반적인 신앙인들은 한결같이 '기도....'하면 뭔가 써 있는 글대로 우리가 그대로 따라서 하는 것을 기억합니다. 그 방법과 방식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 기도의 장점과 단점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먼저 이와 같은 기도에는 참여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기꺼이 참여할 수 있는 그 중 쉬운 기도입니다. 또한 정해진 기도문을 사용한다면, 적당한 수의 사람들이 모였을 때 한마음으로 할 수 있는 장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있습니다. 단점은 대표적인 것은 우리가 살아있는 현장감을 갖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우리가 거기에 참여하지 않아도 별다른 부담감을 갖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가 의무는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으려 하거나 그 분의 뜻을 알고 싶다고 한다면 그 방법을 빼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꼭 밥을 먹어야 하느냐하는 질문에 응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라면을 먹을 수도 있고, 고기를 먹을 수도 있고, 필요하다면 때로는 굶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체질에 따라서 살아가는 방법에 따라서, 그리고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고 우리 몸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기준에 따른다면 선택의 폭은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몸에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신앙에서는 혈액에 해당하는 기도라고 할 것입니다.
오늘 바친 시작기도로 봉헌한 <비신자들을 위한 기도>가 나와 있는 가톨릭 기도서에 나오는 상당수의 기도는 이런 내용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8.2.2 자신의 맘대로 혼자 웅얼거리는 대화(=기도)
다음 두 번째의 기도 분류는 혼자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물론 이 방법에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정해진 양식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무원칙이 원칙'이라고 나름대로 할 수도 있습니다. 둘 중의 어느 하나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 기도의 장점은 형식에 구애되지 않을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또 남에게 들킬 염려가 없어서 좋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아무 때나 시작할 수도 있고 마칠 수도 있어서 좋습니다. 정해진 것을 해도 좋고 나름대로 방법과 순서를 정해서 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자유로운 만큼 웬만큼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기도로서 참 열매를 맺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자율권이 있는 것은 좋습니다만 그 자율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않는다면 치명적인 결과를 빚어낼 수 있습니다. 책임이 없는 자유는 앙꼬 없는 찐빵과 같은 것이고, 그것을 정말로 구비돼야 할 참다운 요소가 빠진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또한 지나친 자율권을 주장하는 기도로 흐르다보면, 사람이 하는 불성실한 행동들도 모두 기도라고 착각하고 잘못된 모범을 주장할 수 있기도 합니다.
8.2.3 다른 사람도 들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대화(=기도)
다음으로 구별할 수 있는 기도의 방법은 많은 준비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도 들려줄 수 있는 자연스러운 기도가 그것입니다. 개인이 준비하고 개인이 공동체앞에서 자신의 마음과 삶의 자세를 담아 발표하는 차원이라는 뜻으로 권장할만한 종류입니다. 물론 이 기도도 글로 써서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가 올바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이 기도의 표현을 다른 말로 하면 자유기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대로 그대로 옮겨놓는다고 해서 올바른 기도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부끄럽지 않게 준비했다면, 이 기도는 굳이 다른 사람들이 행하는 평가에 신경을 덜 쓰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8.3 예수님이 보여주신 기도의 모습
기도는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대화라는 말을 여러 차례 강조했습니다.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강조하면서 우리가 꼭 알아두었으면 싶은 것은 '기도란 내 생각을 하느님께 말씀드리고 하느님은 그것을 그대로 실현해주시는 분'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을 많은 신앙인들이 하느님을 재촉해서 강요하는 것이지 올바른 의미의 기도는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앞에서 말씀드리는 저는 이런 방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저도 가끔씩 이런 방식의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곧 뒤돌아서서는 '내가 오늘은 하느님을 너무 못살게 굴었고, 내 생각을 너무나 강요하면서 기도라고 생각했구나'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느님으로서 인간으로 오셨고, 인간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였다고 얼마 전의 이 시간 '강생구속(降生救贖)' 부분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이야기는 여러 가지 시간의 제한과 장소에 따른 제약을 받는다는 소리입니다. 누구든지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그 조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역시 우리에게 기도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성서에는 그 모습들이 몇 가지 나옵니다. 신약성서 가운데서 가장 먼저 쓰여졌다고 말하는 '마르코 복음서'를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35<합본 65쪽> --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나서, 예수님은 다음 날 아침 일찍, 먼동이 트기 전 외딴 곳으로 물러가 기도합니다. 인간적인 도움을 입었던 사람들은 그 기적을 보인 분을 찾아 또 다른 모습을 보기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도를 마치신 다음 '이 근방 다음 동네에도 가자'고 하심으로써 새로운 활동을 할 수 있는 힘을 거기에서 얻습니다.
6.40<합본 75쪽> --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에 나타난 모습입니다. 당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이 배고픔에 지친 모습을 보고, 풀밭에 앉게 하신 다음,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향하여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그리고 모여있던 사람들에게 먹을 수 있는 기적이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14,32이하 <합본 95쪽> -- 인류 구원을 위한 방법으로 하느님이 택하신 수난의 역사를 시작하기 전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 동쪽 편에 있는 게세마니 동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시려고 세명의 제자들과 함께 가시지만, 제자들은 졸려서 어쩌질 못합니다. 세 번의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은 '일어나 가자, 나를 넘겨줄 자가 가까이 와 있다(14,42)'고 말씀하심으로서 당신에게 다가온 어려움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당신 몸으로 받아들이십니다. 기도란 그런 힘을 발휘하게 합니다.
15,34 <합본 99쪽> -- 십자가위에서 처절하게 울부짖는 소리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도 역시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우리에게 본복로 보이시려고 무진 노력하신 분이지만, 인간으로 겪는 고통앞에서 비명을 지르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양손과 발에 구멍이 뚫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고서 외치신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이런 고난에 찬 소리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십자가 아래의 일부 사람들은 하느님을 원망하는 소리로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제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깨닫는 법입니다.
8.4 전례시기에 따른 기도
사람은 일정한 순서를 세우고 그에 따라 살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야만 일정한 체계가 있고 뭔가 질서가 잡힌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여기에 계신 여러 어르신들도 겪으신 일이기는 하겠습니다만, 사람은 태어날 때가 있고 자랍니다. 자라면서 여러 가지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고 싶지는 않아도 해야 할 학교공부가 있고, 하고 싶어도 맘껏 할 수 없는 노는 시간도 있습니다. 그런 시간들을 적당히 지내다보면, 청년이 되고 혼인을 하고, 자녀를 낳고 그렇게 우리는 노년(老年)에 다가서는 것입니다. 그때에 들어서서는 내가 지내온 삶을 돌이켜 보며 웃음을 짓기도 하고 안타까운 생각과 느낌을 갖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일이 전례시기에도 있습니다. 제가 여러 어르신들에게는 전례시기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은없을 것입니다.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고 하는 핑계가 맞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전례시기를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인류의 구원자로서 하느님의 뜻을 이룰 구원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시기를 가리켜 '대림시기'라고 합니다. 고정된 12월 25일의 성탄 대축일을 앞두고 약 4주간 계속됩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성탄시기'는 하느님의 구원자를 우리 눈으로 보고 기뻐하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약 열흘 안팎입니다. 성탄시기가 끝나고 나서 날짜가 대충 고정된 때는 부활대축일입니다. 음력 3월 보름이 지나고 나서 다가오는 첫 번째 주일을 부활대축일로 정하는데, 그 축일을 앞두고 '사순시기'가 정해집니다. 사순시기는 주일을 포함하여 46일, 주일을 제외하면 40일, 그래서 수요일부터 시작합니다. 그렇게 정해진 '사순시기'와 '성탄시기' 사이의 시기는 연중시기로 지냅니다. 부활대축일을 지내고 나서 7주간을 부활시기로 지냅니다. 부활시기가 끝나고 나면 다시 연중시기가 이어집니다. 이렇게 연중시기는 34주간까지 계속됩니다. 부활대축일의 날짜가 이리저리 옮겨다니기 때문에 연중시기의 전체길이는 정해져 있습니다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에 실제 길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전례시기에 맞춰, 교회에서 그 정신에 따라 우리의 삶을 달리 보고 준비해야 할 것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지금 우리가 지내는 시기는 인간에게도 부활이라는 기쁨이 다가올 수 있음을 알려주고 그 부활을 올바로 준비하기 위해서 특별한 자세로 살아야 함을 강조하는 '사순시기'입니다.
이 전례의 시기와 관련된 기도의 대표적인 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인류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바친 예수님이 보여주신 고난과 고통의 길을 함께 하자는 의미로 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은 공동체로서 함께 할 수도 있고 우리가 개인적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길 혹은 14처 기도를 할 수 있는 특별한 장소에서 할 것을 권합니다.
8.6 전례시기와 무관한 기도 -- 묵주의 기도
신앙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가장 단순한 기도는 묵주를 잡고 일정한 순서에 따라 우리의 바람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기도로 '묵주의 기도'라고 합니다. 영문자를 써서 말할 때는 '로사리오 기도'라고도 합니다. 이 묵주의 기도에 대한 것을 여러분에게 알려드리는 시간은 따로 마련하겠습니다만, 이 기도의 시작은 12세기경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지난 1917년 포르투갈 중부의 산악도시 파티마에서 나타나셨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당시 러시아의 회개를 위하여 묵주를 사용하는 이 기도를 바칠 것을 권하기도 하셨습니다. 마리아의 예언대로 1919년에 공산화를 이룬지 약 70년이 지난 1990년에 러시아(소련)은 다시 사라져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도의 자세에 대해서 본받아야 할 한가지 기억이기도 합니다.
8.7 올바른 기도를 위하여 -- 기도는 단순한 말의 나열이 아니다.
이제까지 사람의 말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께로 다가가는 방법으로 '기도'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말을 길게 한 것도 있습니다만, 말로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대로 실천하는 일입니다. '집안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머리로 다 알아듣고 모두 구별할 수 있어도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만, 굳이 구별하고 비교하자면 많이 아는 것보다는 모르더라도 조금 아는 것만큼이라도 실천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상대로 해서 펼치는 이 대화를 올바로 하려면 '자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하는 분량의 정도를 다른 사람에게라도 강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을 향하여 내가 하는 기도를 왜 들어주시지 않느냐고 투정하는 일도 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실천하겠다고 다짐하는 신앙인이 나아가야 할 길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