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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장자 교리 교안 (9): 신앙생활, 십계명, 의무
작성자이철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0-04-08 조회수6,137 추천수1

9. 신앙생활(信仰生活). 십계명(十誡命). 6가지 의무

 

 

    9.0 인사

이제 어르신 여러분들에게 꼭 말씀드려야 할 우리 교회의 내용도 끝에 가까워 졌습니다. 벌써 아홉 번째 시간인데, 제가 설명하는 재주가 부족하여 하느님의 대한 생각이나 우리가 꼭 알아두어야 할 내용들이 빠졌나 혹시 잘못되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도 있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것을 발견하면 어느 때라도 수정하겠습니다.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사람의 생활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무척이나 오래 갈 것 같았던 이 시간도 어느 덧 다음주가 되면 끝을 맺습니다. 여러 어르신들은 제 이야기를 통해서 들으신 내용들 가운데 어떤 것이 기억나는 지 그것을 물어보는 것은 아마도 쓸데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 행동은 제 영광을 찾으려고 발버둥치는 일밖에는 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런 것을 궁금해하기보다는 여러 어르신들이 제가 말씀드린 것, 어르신들이 다른 기회를 통해서 알아들으신 것은 삶의 한 부분이 되도록 힘쓰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올바른 비유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목이 마른 사람에게는 물이 있는 곳을 알려주거나 물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면 족한 것이지, 대신 먹어줄 수는 없는 것이고 또 대신 먹어준다고 해서 그 갈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작기도= 십계명과 고백의 기도>

    9.1 신앙이란 무엇인가?

제가 시작부터 지난 주일까지 말씀드린 내용은 신앙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신앙이라는 실체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르신들에게 모험을 감행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눈에 뵈지 않는 것을 제 입으로 설명 드린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사람이 하는 어리석은 일 중의 한가지가 이런 일이 아닐까 합니다.  신앙이라는 말 자체가 갖는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의 삶을 바꾸어놓는 것이 신앙입니다.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현실 생활에서 신앙 때문에 삶의 모습이 바뀐 사람을 우리는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앙이라는 말 대신에 '신념, 의지'라는 말로 바꾸어도 설명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전쟁터에서 목숨을 바친다든가, 일본의 지배시대에 압제자를 제거하기 위해서 폭탄을 던지던 일'도 넓게 보면 신앙이라는 말이 갖는 특성과 비슷한 뜻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 어르신들에게 말씀드린 신앙의 요체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저절로 태어나지 않았으며, 사람이 이 세상에 온 것은 정해진 목적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담아주신 것이다.  하느님의 의지와 뜻을 기억하고 우리 삶이 그 뜻을 실천하려고 애쓰게 하는 데에 작용하는 힘은 하느님의 힘을 담은 영혼이다.  그 영혼은 죽지 않고 살아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했던 삶의 선과 악의 결실에 따라 판정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처음부터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나기에 우리가 올바른 길로 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으려고 하는 자세가 꼭 필요하다. 그리고 그 뜻을 알려주는 역할은 신앙이 하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그것도 옳은 결실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자리를 통해서 말씀드린 내용들은 그 옳은 결실을 얻기 위한 방법이었고 이제는 그렇게 알아들으신 내용들을 삶으로 옮기는 일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의 존재, 하느님의 속성,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분이 보여주셨던 본보기, 우리가 행하는 일의 결과에 따라 옳고 그름의 판정을 받게 된다는 교리는 사실 우리를 협박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삶을 더욱 더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도 삶을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결실일 뿐입니다.

 

일반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의 특성은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선함이 때에 따라서는 이렇게 저렇게 다른 얼굴로 우리 앞에 등장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움직이는 바에 따라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삶이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신앙의 역할입니다.

 

    9.2 신앙생활을 올바로 하는 방법

세상 어떤 일이든지 올바로 하는 방법, 그르치는 방법을 구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불가능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내는 삶의 방법이 워낙 다양한 것이기에 그런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어르신들에게 천국과 지옥을 설명하면서 성서의 본보기로 들었던 마태오 복음서 25,31-46에 나오는 <최후심판>의 이야기고 같은 계열이요 맥락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끝 날이 과연 어떤 모습일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게 행복과 불행을 갈라놓는 일이 우리 앞에 닥칠 것인지, 지금까지 듣고 살아왔던 모든 일이 아무런 의미 없는 일이 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한가지 확신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 나지 않는다'는 것이고 달리 말하면 '사필귀정(事必歸正)'일 것이고, 또 다른 말로 하면 '물을 향해서 돌을 던지면 반드시 파문이 인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우리의 인생이 마치는 날까지 할 행동들은 어떤 방법과 모양으로든지 결과를 맺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그 파장을 예측할 수도 있는 것이고 무시할 수도 있는 것의 차이뿐입니다.  일종의 도박이라고나 할까요? 우리가 어느 쪽에 패를 거느냐에 따라서 맘에 드는 결실을 얻을 수 있겠는지 그렇지 못하겠는지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올바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규범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사람에 따라서 설명할 수 있는 방법과 하고 싶은 말은 무지하게 많을 것입니다. 그 중에 한가지 우리가 쉽게 생각하고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십계명(十誡命)'일 것입니다.

 

    9.3 십계명에 대한 이야기

십계명은 10가지 계명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십계명에는 세 가지(1,3,4)의 긍정(肯定) 명령과 일곱(2,5,6,7,8,9,10) 가지의 부정(否定) 명령으로 돼 있습니다. 이 10가지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 노예생활 약 400년을 마치고, 하느님의 파견을 받은 모세의 뒤를 따라 홍해바다를 건너 축복과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시나이 산, 또는 호렙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받은 하느님의 의지였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행해서 가지셨던 의지가 그것밖에 없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하느님은 아마도 이 10가지를 우리가  성심껏 따라 실천하고 산다면 하느님의 의지에 일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일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참 '묘한 동물'입니다. 다른 사람이나 대상의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고 말하고 싶은 것이 더 앞서서 그럴지는 몰라도 주어진 것을 달리 해석하고 싶어합니다. 달리 해석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십분(十分)이해할 수 있다고 쳐도 그 해석방법이 왜 그리 서글퍼야 하는지 그것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느님은 십계명을 동원해서 우리 인간의 삶을 제약하고 싶다고 해석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제 맘대로 살고 싶은 인간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이리저리 흔들면서 우리가 꼭두각시처럼 살기를 원한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처음부터 원하신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대뜸 '네가 봤어? 하느님이 처음부터 그런 뜻을 가지셨는지 네가 봤어?  모르지!  그러면 가만히 있어!'라고 주저앉히기 쉽습니다. 이런 생각과 자세가 우리 스스로의 삶을 옭아매는 것이고 우리 스스로의 삶을 힘들고 지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왜 처음부터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하지 않을까? 참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인간의 역사는 10계명에 대한 반항과 타협의 역사였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제 맘대로 하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해석해서 사람의 생활을 옭아매고 싶지 않다고 말을 하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자유일 뿐입니다.  인간의 힘과 지혜를 한없이 높고 위대한 것으로 생각하여 좋은 삶을 만들었다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아도 좋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 뒷면에는 전혀 그렇지 못한 것들이 있는 법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저라고 해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알고 실천했다고 말씀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야기를 할뿐이죠.  10가지 계명에 나타난 긍정과 부정의 명령들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곡예를 하는 것이 우리의 생활입니다.  잘못된 길로 나갔다고 판단을 했다면 돌아서서 처음으로 오면 다행인데, 그렇지 못할 때는 전혀 다른 길로 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삶의 기준을 세우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판단기준이 없기 때문에 옳고 그른 것에 대한 개념을 세우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배가 부르거나 등이 따뜻하거나 자신의 혈육들이 행복을 노래할 수 있다면 그것을 선(善)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것이 그들이 갖는 한계입니다. 사람의 생활은 그런 육체적인 일로 해결되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닌데 그들에게는 적당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혼란된 길을 가는 것입니다.  10가지 계명, 십계명은 삶의 기준입니다.

 

    9.4 삶의 기준으로서 십계명

우리가 알아듣는 10가지 계명을 줄줄 외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끊임없이 그 삶의 정신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십계명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꼭 지켜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에 관한 계명 세 가지(1-3)와 인간의 삶을 보통 풍요롭게 만들 나머지 일곱 가지 계명(4-10)은 우리에게 주어진 족쇄도 아니고 삶의 걸림돌도 아닙니다.  이것은 최소한의 계명이고, 여기에는 인간이 덕으로 쌓을 수 있는 것에 대한 말씀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생활이 오그라들어야 정상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삶의 정신을 올바로 깨달을 필요는 있습니다.

 

우리 사람의 삶이 좀 더 풍요롭고, 이 세상이 좀 더 살 맛 나는 세상이 되게 하려면, 십계명의 정신을 누구나 알아듣고 삶으로 그 뜻에 누구나 합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십계명은 결코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풍요롭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하느님이 심사숙고(深思熟考) 끝에 제정하신 자연법률이기 때문입니다.

자연법은 따로 법률로 규정하지 않아도 조금만 노력하면 삶의 기준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에 비해서 인간 사회의 형성을 위해서는 그것만으로 되지는 않습니다.

    9.5 신앙인에게 주어지는 6가지 의무-교회법 이야기

사람은 의무라는 말을 참 싫어합니다. 이 말은 싫어하지만, 권리라는 말은 좋아합니다. 하지만 의무와 권리는 따로 떼어서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이 자리에서 어르신들에게 말씀드리는 하느님의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은 의무라고 싫어할 수 있는데 비해서 우리의 행동을 보시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실 것을 생각하는 것은 권리입니다.

 

우리는 움직이지 않아도 저절로 배불리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혹시 물려받은 유산이 주체할 수 없이 많아서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모르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이야기가 되지 않습니다. 구약성서 창세기의 처음(아담에게 내리신 선언)을 통해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은 움직여서 땀을 흘려야(창세기 3,17-19)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공동체를 이루고 삽니다. 지상에 살면서 하느님의 가르친 바를 알아듣고 실천하려고 모인 공동체, 그리스도 교회 사람들에게도 공동체의 규칙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세계적으로 공통된 것은 6가지입니다. 그 내용은 ① 모든 주일과 대축일에는 미사에 참여할 것 - 의미를 알아듣고 삶의 부분으로 받아들이라는 요구요 부탁  ② 1년에 최소한 한번은 영성체 할 것-지나치게 하지 않은 일을 경계함,  ③1년에 한번은 고해성사 할 것-인간이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한 또 하나의 규정 ④정해진 날에 단식하고 그 정성을 이웃과 나눌 것과 정해진 날에 그리스도 수난의 의미를 생각하며 (주식에 해당하는) 금육제에 동참할 것  ⑤ 혼인에 관한 법을 지킬 것  ⑥교회 공동체의 유지비 부담할 것-교무금-의 내용입니다.

 

물론 드러나게 이것만을 지킨다고 해서 모든 것이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규정을 남달리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른 것은 세세하게 지정하지 않아도 함께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들일 것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좋은 일도 하라고 해서 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의무 이행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일이라도 의무로 규정되기 전에 우리가 행하는 것은 삶의 덕(德)이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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