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6) 나는 믿나이다
“하느님을 믿기에 우린 힘을 얻고 승리합니다”
■ 믿지 않는 이의 기도
요즈음 “도대체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2013년 새해 첫 달임에도, 희망을 말하는 이는 도통 드물고 걱정과 불평의 소리만 들끓는다. 그래 ‘희망’에 관한 저술을 준비할 요량으로 역사에서 희망의 징후들을 찾고 있던 중, 언젠가 다른 책에 인용한 적이 있는 한 대목이 떠올랐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구포 나만갑이 기록한 글에 실린 기막힌 일화다. 엄청난 비가 그칠 기미 없이 쏟아져 내리는 날이었다. 바람까지 매섭게 불어 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얼어 죽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때, 인조 임금과 세자가 밖으로 나와 하늘을 향해 빌기 시작했다.
“하늘이시여! 오늘 나라가 이 지경에까지 이른 것은 저희 부자의 잘못이 크기 때문입니다. 백성들과 성안의 군사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벌을 내리시려거든 저희 부자에게 내려 주시고 다른 모든 죄 없는 백성들을 보살펴 주십시오.”
임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간절히 빌었고 눈물은 흘러내려 임금의 옷까지 적셨다. 신하들은 임금에게 안으로 들어갈 것을 청했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실로 신기한 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그치고 밤하늘에 은하수가 나타난 것이었다. 날씨도 그리 춥지 않았다. 그 순간 성안의 모든 사람들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어쩔 수 없는 행동을 안타까워하며 군사들과 백성들을 걱정했던 인조 임금의 진심 어린 마음이 하늘과 백성에 전해져 비를 그치게 하고 백성들의 시위도 막아낸 것이었다.
놀라운 일이다. 믿지 않는 이의 기도가 통했다! 그야말로 지성감천(至誠感天)이었다.
만일, 이 기록이 액면 그대로 사실이라면, 이는 믿는 이인 우리에겐 크나큰 격려다. 믿지 않는 이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이시라면, 항차 믿는 이의 기도는 얼마나 더 잘 들어주시겠는가!
■ ‘나는 믿나이다’의 기운
라틴어 사도신경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Credo in Deum”(크레도 인 데움).
여기서 ‘크레도’는 “나는 믿나이다”라는 뜻이고, ‘데움’은 ‘하느님을’이라는 뜻이다. 여기서의 ‘인’은 한마디로 모든 것을 그분께 ‘올인’(all in)한다는 말이다. 이는 믿는 이와 믿는 대상을 이어주어 그 믿음이 ‘신뢰’ 내지 ‘의탁’의 의미가 되도록 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이 문장의 뜻은 “나는 믿나이다, 하느님을” 또는 “나는 신뢰한다, 하느님을”이 된다.
성경에는 ‘의탁한다’, ‘신뢰한다’는 말이 어떤 에너지를 지니고 있는지 실감하게 해 주는 대목들이 즐비하다. 그 한 예를 보자.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방패. 내 마음 그분께 의지하여 도움을 받았으니 내 마음 기뻐 뛰놀며 나의 노래로 그분을 찬송하리라”(시편 28,7).
다윗의 찬미가인 이 노래 속에서 “내가 의지했노라”라는 말은 정적인가, 동적인가? 동적이다! 모두 걸었다는 소리다. 다윗이 이 찬미가를 지을 때, 그는 하릴없이 자연이나 관조하면서 이 시를 쓴 것이 아니었다. 날로 높아가는 자신의 인기를 시기하여 자신을 죽이려고 뒤따라오는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며 동굴에 숨어 있으면서 쓴 기도였다.
“‘야훼 하느님, 나를 살려 주세요. 나를 숨겨 주세요’ 했더니 주님이 지켜 주시고 방패가 되어주시고 하더라. 나의 존재를 걸고 몽땅 맡겼더니 진짜 구사일생으로 내가 살아나더라. 그러니 기뻐 뛰놀면서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있는가!”
이런 고백인 것이다. 여기서 ‘신뢰한다’, ‘의탁한다’ 대신에 사도신경의 표현을 살리기 위해 ‘믿는다’는 단어를 쓰고자 한다면 ‘하느님을’을, ‘하느님만’으로 고쳐 보면 같은 의미가 된다. “나는 하느님만 믿는다!” 이러면 “당신만 믿어!” 할 때의 뉘앙스가 살지 않는가.
이를 그대로 우리말 고백에 도입하면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만 저는 믿나이다”가 된다. 이것이 본래 사도신경의 기운이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이 느낌을, 이 에너지를 놓쳐서는 안 된다.
■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저런 믿음의 전형은 다윗이다. 열두 살밖에 안 된 다윗은 거인 골리앗 앞에서 허풍을 떨었다. 그것도 최신병기로 중무장한 무적의 장수 앞에서, 막대기 하나 들고 뻥을 쳤다.
“너는 칼과 표창과 창을 들고 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1사무 17,45).
믿음의 뻥이었다. 그런데 알려져 있듯이 다윗의 대포는 놀랍게도 통했다. 그 막대기를 가지고서 돌멩이를 무릿매질하여 골리앗의 이마에 정통으로 명중시켰던 것이다.
다윗의 이야기에서 나는 영감을 얻어 ‘뻥치기 영성’을 계발했다. 나 역시 믿음의 허풍을 많이 치고 다닌 사람 중 하나다. 그렇게 큰소리쳤던 것은 대부분 이루어졌다. 물론 안 이루어진 것도 있다. 하지만 누가 뒤따라 다니면서 이루어졌는지 안 이루어졌는지 일일이 조사하지 않으니 그것도 사실 염려할 일이 아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큰소리 칠 줄 알아야 한다.
“두고 봐. 우리 애가 잘 되는지 안 되는지,” “두고 봐. 우리 남편이 잘 풀리는지 안 풀리는지,” “두고 봐. 우리 집안이 일어나는지 안 일어나는지”….
아마 이런 얘기하고 다니면 주님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너, 왜 그렇게 큰소리를 쳤느냐?”라고 문책하실 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미리 답을 연습해 둘 일이다. 이렇게.
“이건 제 믿음이에요!”
그러면 주님께서는 감탄하시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을까.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전폭적인 의탁을 담은 힘찬 고백은 지금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필요하다. 요즘 2040세대의 고충 운운하는데 그들만 어려운 게 아니다. 5060도 어렵고, 7080도 어렵다. 미리 마련해놓은 것도 없고 어느새 나이는 들고, 세상은 좁고 갈 데는 많고…. 먹먹하다. 이런 때 어디에서 힘을 받고 희망을 충전할 것인가? 우리 신앙의 조상들은 바로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 격려와 위로를 받는 지혜가 있었다.
시련의 때에 “나는 믿나이다”에 내장된 의탁하는 믿음을 가지면, 주님은 우리에게 든든한 빽이 되어 주신다. 똑같이 어려운 상황에서 결국 고난을 극복하는 사람, 역경을 이겨내는 사람은 누구인가. 신앙인이다. 최후의 생존자는 그리스도인이다. 요한 사도는 증언한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1요한 5,4).
하느님을 믿기에 우리는 힘을 얻고, 승리한다. 그러니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이 세상 살면서도, 온갖 어려움을 겪을 때 야훼 하느님께 모든 걸 맡겨 드리자.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 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3년 2월 3일,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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