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님에 대하여..
2000. 10. 5. (목) 20:00 - 21:10
1. 인사 소개
견진교리를 준비하시는 서대문 성당의 신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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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작기도
견진교리를 준비하시는 분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듬뿍 받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제가 하는 기도에 마음으로 함께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사랑의 하느님, 오늘도 서대문 성당의 많은 신자들이 당신의 신앙을 전파하고 증거 할 견진성사를 받을 준비를 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곳에 모인 신자들에게 제가 말할 당신 아들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신앙의 내용을 통하여 신자들이 참된 힘을 얻게 하소서. 또한 여기 모인 신자들이 성모님에 대해서 알아듣는 만큼, 자신의 생활로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음도 깨닫게 하소서.
(주님의 기도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3. 성모님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일은 참 어렵습니다. 성서를 읽어봐도 성모님에 대해서 완전하게 알 수 있는 자세한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입니다. 그러므로, 성모님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특별한 주제와 그 주제를 풀어 가는 이 시간은 여러분이 대하기에 따라서 두 가지 자세가 나올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재미없을 것이다’라는 반응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인의 실제 생활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주는 성모님에 대해서 올바로 아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귀중하게 볼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4. 성모님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 가지 일 수 있습니다. 성서를 통해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고 먼저 말씀을 드리기는 했습니다만 성서에는 마리아에 대해서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신앙인으로 마리아가 보여준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마리아가 보여준 덕행을 하느님은 어떻게 인정하셨는지, 마리아의 삶을 본받고 살려는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어떤 축복을 받을 수 있겠는지, 그리고 마리아를 알고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행동으로 믿음을 표현할 방법은 어떤 것이겠는지.... 제가 정한 나름대로의 순서에 따라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4.1 성모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성서에 나오지 않습니다. 성서를 기록하던 사람들에게마리아는 중요한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는 9월 8일에 성모님의 성탄축일을 지냅니다. 교회의 전통에 따라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탄생 날짜가 중요한 것은 아니어도, 여러분이 견진교리 교육과정에서 성모님에 대해서 듣는 일은, 우리 신앙인의 삶에 성모님이 중심이라서 듣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모님과 연결된 분, 우리의 구원자로서 예수님이 특별한 인물이시기에 관련된 제한된 모습으로만 성모님을 다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은 바꾸어 말하면, 우리 역시도 성모님과 같은 길을, 성모님과 같은 영광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행동하는 바에 따라 달라질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기록하는 예수님의 어머니에 대한 기록(갈라디아서 4,4)은 신통치 않습니다. "때가 찼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셨으니, 그는 한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것뿐입니다. 네 개의 복음서에는 예수님과 관련된 특별한 성모님의 모습이 다양하게 등장합니다만, 바오로 사도가 적는 모습은 그것뿐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적고 있는 모습은 그것뿐이기에 더 자세한 말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 그러면 이제는 복음서에 나오는 성모님의 모습을 볼 차례입니다. 그 모습을 잘 기억한다면, 우리도 충분히 하느님이 준비하시는 축복에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4.2 삶에 닥쳐온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천사의 방문을 수용하신 분
이 이야기는 루가복음서 1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소설같은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천사와 만난다는 일은 참으로 신기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삶에서 인간말고 다른 존재와 만났다는 이야기를 가끔씩 듣기는 합니다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듣는 이야기와 차원이 다른 것은 하느님의 천사를 만나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신비한 일입니다. 물론 정상적인 과정을 이야기하자면, 남자와 여자, 여자와 남자가 만나서 혼인을 하고 한 가정을 이루고 그 사랑의 열매로, 하느님의 축복으로 이 세상에 새로운 생명체가 태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의 율법에는 그런 정상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여인이 아기를 갖는다는 것은 ’모여있는 군중’앞에 끌려나와 돌로 맞아죽어야 하는 운명을 자초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통제하고 이끌어주고,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했던 율법의 규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천사의 방문이 있고 난 다음, 마리아는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그 규정을 과감하게 깨는 것입니다.
"기뻐하소서, 은총을 입은 이여,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마리아 당신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두고 보시오, 당신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시오" 천사 가브리엘의 마리아 방문과 이런 제안에 대한 마리아의 수용은 곧 비참한 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는 불안을 내포하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제안에 한참을 고민하던 마리아는 무엇을 믿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대로 수용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따르고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이 본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우리가 읽을 수 있는 모습이라고는 천사의 설득과 마리아의 수용뿐이었습니다. 짧은 순간에 수없이 많이 오고갔을 고민과 걱정을 떨쳐버리고 나자 인류에게 구원의 선물이 다가 오게된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귀중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고 모든 행동을 책임질 수 있다고 판단하는 곳에 목숨을 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땅에서 순교하신 많은 분들이 가졌던 삶의 자세도 그럴 것입니다.
4.3 아기 때문에 고생길을 걸으신 분
이 내용은 루가복음서 2장에 나옵니다. 만삭이 된 몸으로 로마황제 아우구스티노의 인구조사 명령에 따라 베들레헴으로 갔고 여관방을 구하지 못해 동물들의 거처인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아야 했던 여인이 마리아였습니다. 성서에는 그 자세한 이야기, 그 상황에 임했을 때 마리아나 요셉의 마음 움직임이 나오지는 않습니다만,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 아이가 갖고 태어나는 운명은 무엇이기에, 도대체 어떤 일을 할 어린아이이기에 고생길로 자신의 인생을 시작해야 할까? 그리고 난 왜 이 길에 동참하게 됐을까?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마리아는 수없이 많이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어렵사리 태어나자마자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여러 해 동안 피난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또 12살에 이르러서 성년식을 하러 성전에 갔다가 잃어버리는 고통을 겪어야 했을 것이 부모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렵사리 예수를 찾았건만, 예수는 부모를 향하여 알 수 없는 소리를 합니다. "제가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왜 모르셨습니까?" 이런 일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말을 쉽게 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것을 바라봐야 했을 부모의 입장에서라면 똑같은 판단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4.4 아들이 미쳤다는 소문에 찾아 나선 분
이 이야기는 마르코 복음서 3장에 짤막하게 나옵니다. 배 아파서 나은 자식이 성장하게 하는 일은 부모로서 엄청난 희생을 해야만 이루어낼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내버려두면 혼자 크지 못합니다. 끊임없는 보호와 관심이 필요한 것이 인간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정성을 들이고 보살펴줘도 올바르게 성장할 거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 사람의 성장입니다. 그런데 나이 서른이 넘어 집을 떠나 수많은 시련을 겪으며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던 아들에 대한 소문은 그 어머니를 당황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성서에는 그 이후의 사건 진행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올바른 정신을 갖고도 살아가기 힘든 것이 세상입니다. 하물며 그런 소리를 듣는 자녀를 둔 부모의 입장은 헤아릴 수 있는 고통의 수준을 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상황일 것입니다.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다는 보장만 있다면 ’고액 과외’ 정도는 하겠다는 것이 요즘 부모들이 자식에 대해서 갖는 입장이라고 합니다. 모양이 다르기는 해도, 그 사정은 옛날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4.5 십자가 길을 함께 걸으신 분, 십자가에서 아들을 내려 품에 안으신 분
우리가 기억하는 말에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척이나 가슴아픈 표현입니다. 자식을 낳고 사는 입장이 아닌 저는 단순한 이론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웬만큼 연세가 드신 분들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감정일 것입니다. 아들이 하느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파한 대가가 ’십자가를 지고 해골산을 오르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상상의 차원을 넘는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성서에서 아들의 곁을 따르는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우리는 ’십자가의 길’ 기도 ’제 4 처’에서 ’십자가를 진 아들 예수와 어머니 마리아가 만나는 장면’을 기억하고 우리도 같은 입장에 처한다면 잘 이겨내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두 분이 십자가 아래에서 만났을 때 무슨 말을 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그 어머니 마리아가 얼마나 큰 고통을 느꼈을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어머니의 고통을 헤아려 ’십자가를 지고 오르는 길을 함께 걸으신 분’이라고 칭송합니다. 어쩌면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를 진 예수님보다는, 그런 뚜렷한 의식이 없었을지도 모를 그 어머니의 마음은 더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5. 마리아가 보여준 삶의 의미를 받아들이기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습니다. ’단 맛을 느끼려면 쓴맛이 다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살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이기는 합니다만, 먹지도 않고 배부르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의 찬사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어쩔 수없이 정해진 때가되면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인간에게 다가오는 고통은, 안타깝고 애석한 일이지만, 이 고통이라는 녀석은 우리가 아무리 애원해도 우리를 비켜가지 않습니다. 반드시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상처를 남기고 떠납니다. 그렇게 상처를 입고 살아야 하는 우리가 하는 행동에 따라 우리 삶의 모습은 여러 가지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높은 산을 정복했다는 기쁨을 가지려면, 많은 고난을 무릅쓰고 때로는 목숨을 걸고 그 곳에 내 발을 디뎌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서 생각하고 다짐하는 마리아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정성으로 공경하는 마리아는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복을 받아 챙긴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평범한 한 여인이었고, 인간사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엄격하게 겪은 보통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다른 한편으로 마리아야말로 특별한 삶의 길을 걸으신 분이라고 기억합니다. 이 소리가 가능하려면, 그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알아두는 일도 필요합니다.
6. 마리아의 행위에 대한 하느님의 인정==교회의 호칭들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지금까지 말씀드린 성모님에 대한 행동의 결과를 겸손하게 받아들인 교회에서는 그분에게 여러 가지 칭호를 부여합니다. 특별하게 붙인 이름이 마리아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부르든 부르지 않든 마리아에게 주어진 영광은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을 빌어서 그 영광을 생각해보느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6.1 천주(=하느님)의 모친
먼저, 마리아를 ’천주의 모친’, 같은 말이지만 ’하느님의 모친’이라고 부릅니다. 이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신 분은 로마교회의 초기 성인 ’히뽈리투스’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인의 의도를 따라, 431년의 에페소 공의회는 이 칭호를 마리아에게 부여하는 결정을 내렸고, 451년의 칼체돈 공의회에서는 이를 교의로 신앙의 진리로 선포합니다.
마리아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마리아는 ’영원으로부터 계시는 한 분이신 하느님이 인간으로 오실 때, 그분을 인간으로 잉태하고 낳으셨다’는 데서 시작하며, ’하느님이 마리아 안에서 그리고 마리아를 통하여 인간이 되셨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문헌, 교회헌장 53항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동정 마리아는 천사의 아룀을 들으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과 몸에 받아들이시어 생명의 생명을 세상에 낳아주셨으므로 하느님이신 구세주의 참 모친으로 인정받으시고 공경받으시는 것이다. 마리아는 아드님의 공로로 말미암아 뛰어나게 구원되고 아드님과 불가분의 관계로 긴밀히 결합되었으며, 천주 성자의 모친이 되는 직무와 품위를 갖추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낳은 몸은 인간의 몸이었지만,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아드님에게 주어진 영광을 함께 나눈다는 것입니다.
6.2 평생동정
다음, 두 번째로 말씀드릴 내용은 ’마리아가 평생동안 순수하게 사셨다는 의미’를 갖는 ’평생동정’에 대한 내용입니다. 마리아를 동정이라고 부르는 말은 예수를 낳은 이후에도 부부 관계없이 지냈다는 말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할 당시의 삶의 자세를 근거로 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가 동정이라는 말의 의미는 예수를 낳았다는 육체적인 동정 때문만이 아니라, 마음의 헷갈림 없이 온전한 사랑을 평생동안 성자께만 쏟고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고 마땅한 존경을 드리는 것"이라고 규정합니다. 즉, 마리아에게 주어진 영광, ’평생동정’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하느님이 가브리엘 천사와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셨던 말씀에 대해 전인적인 응답을 하셨던 마리아의 위대성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일생을 통하여 한가지 마음을 갖고 한가지 일에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은 찾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통하여 모든 것을 바치신 마리아에게서 그와 같은 정성을 발견하는 일이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것이 교회의 선언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형제들에 대한 이야기는 평생동정이라는 말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말입니다. 우리말의 어법과 달리, 복음이 기록되던 때의 언어였던 ’셈족의 세계’에서는 ’친척과 동맹관계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형제로 지칭하는 아주 폭넓은 용어’였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150년에서 200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위경, ’야고보의 원복음서’에는 ’마리아의 평생동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요셉이 마리아의 남편이 되었을 때에는 이미 그가 나이 많은 홀아비로서 여러 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물론 교회에서 정설로 택하지 않은 논외의 글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일생 역사에 요셉이 등장하는 것은 예수님의 나이 12살 때에 있었던 성전에서 학자들과 토론하던 때의 일 외에는 없습니다.
6.3 성모승천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했고, 그분의 뜻을 일생일대의 천직으로 알았던 ’마리아는 지상의 생애를 마치고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상의 영광으로 들어올림을 받으셨다’는 ’몽소(蒙召)승천의 교의는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의 선언에 따라 믿을 교리로 선포됩니다. 이 신앙의 교의 역시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에 정의하고 선포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무한하신 은총이 만들어낸 결과가 이것입니다. 지상에서 하느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아 이루어내신 소명의 결과가 그것입니다.
우리는 지상의 삶을 통하여 좋은 결과를 얻고싶은 사람은 애써 노력합니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우리가 인간의 노력만으로 좋은 결과를 얻기는 어렵습니다. 세상은 내가 좋은 결과를 먼저 얻을 수 있도록 그대로 내버려두질 않습니다. 반드시 방해꾼이 있기 마련이고, 누군가의 시기를 받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그 마음 자세에는 욕심이 함께 하는 탓입니다.
우리가 지상의 삶도 성실하게 살고,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영광에도 참여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노력하는 것은 기본이 돼야 하겠지만, 거기에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겠다는 자세도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내가 태어나서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나의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허락하심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7. 신앙생활에서 차지하는 성모님의 비중, 성모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을 갖추기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우리가 성모님을 중심으로 모시며 하는 행동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기도는 ’묵주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아주 단순합니다.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사도신경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가 만들어내는 결과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합니다.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무식한 일부의 사람들은 가톨릭의 신앙인을 가리켜 ’마리아교인’이라고 합니다. 이들의 비판이 틀리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게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전달해주는 분으로 마리아의 도움을 받는 것은 좋으나 무작정 그분의 도움을 받는 일로 끝나서는 곤란합니다. 사람은 앞으로 먹는 것이 있으면 뒤로 내보내야 삽니다. 무조건 내 몸 안에 쌓아놓고 살수는 없는 일입니다. 신앙에도 그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마리아는 구원자가 아닙니다. 구원을 위한 협력자였습니다. 마리아의 동의가 없었다면, 하느님은 천사를 시켜 다른 사람을 찾았을 것이고, 우리가 기억하는 이름은 다른 것이 되었겠지만,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살아가야 할 모범을 그녀에게서 찾는 것입니다.
8. 결론
저는 지금까지 견진성사를 준비하는 여러분에게 성모님과 관련된 여러 가지 모습을 말씀드렸습니다. 몇 번 반복한 것과 마찬가지로 말씀드린 것들은 제가 보았거나, 제 이야기라서 여러분에게 이야기한 것은 아닙니다.
혹시라도 다가올지 모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아기 예수를 잉태하신 일, 자녀를 키우면서도 겪었을 수많은 인간적인 갈등과 고민들, 이제는 다 성장했는가 싶었는데 그녀에게 들려왔던 아들 예수에 대한 괴이한 소문들, 지상에서는 삶의 성실을 다했건만 사람들의 시기를 받아야 십자가의 죽음으로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일에 이르기까지, 어머니로서 마리아가 가졌던 고통은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들은 짧은 이야기보다는 훨씬 더 다양한 의미를 갖는 내용들입니다.
성모님께 주어졌던 영광은 우리도 충분히 받을 수 있고, 하느님이 준비하시는 영광에 우리도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 조건은 자신에게 닥쳐왔던 수많은 고통과 갈등을 어떻게 이겨내셨는지 마리아의 삶을 돌이켜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견진성사 준비 잘 하시고, 하느님이 아낌없이 베풀어주시는 은총을 받을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마침 기도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영광송’으로 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