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현 신부의 사회교리]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
2000년 이후 우리사회에서 다문화 현상이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지난 일 년간 본란을 통하여 왜 우리 사회에서 다문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다문화 현상의 원인인 이주가 성경에는 어떻게 나타나는지, 우리 사회의 이주민과 가톨릭교회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 사회에 실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주현황과 이주민들의 삶을 살펴보자. 이주민은 이주노동자, 결혼이주자와 그 가족, 새터민, 유학생, 망명자 등 다양한 부류가 존재하지만 본고에서는 이주 노동자와 결혼이주자와 그 가족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1. 이주노동자 유입 역사
우리 사회에서 한국 국적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이 취업을 하여 노동을 하고 있는 경우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외국인 근로자, 외국인 노동자, 이주 노동자, 이주 근로자 등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지만 본고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란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란 자신의 근로를 목적으로 모국을 떠나 외국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넓은 의미에서 외국에서 노동하는 모든 사람이 외국인 노동자라고 할 수 있으나, 통상적으로 외국인 노동자는 외국에서 단순 노동, 저숙련 노동을 하는 자들을 일컫는다.
한국사회에로의 외국인 노동자들의 유입은 일본이나 대만보다 비교적 늦게 시작되었다. 먼저 경제적으로 발전한 일본은 1970년대부터, 대만은 1980년대 초부터 이주가 시작된데 비하여 한국은 1980년대 말부터 이주노동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은 우리 사회의 경제적 발전과 맞물려 단순 노동력의 유입을 금지한 시기, 연수생제도, 취업허가제도 등으로 변화해 왔다. 그 시기별 상황을 살펴보자.
1.1. 민주화 이전 시대
한국은 건국이후 외국인에 대하여 두 가지 정책을 동시에 펼치고 있었다. 즉 한국의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는 투자자나 한국인이 확보하지 못한 고급기술을 가진 자들에 대해서는 유인 환영책을 실시하였고, 반면에 한국인이 수행할 수 있는 단순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입국을 제한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경제성장에 따른 노동력부족으로 인해 외국인 노동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1980년대 초 고유가, 고금리, 고환율(달러)이 한국경제발전의 장애요인이었으나, 1985년 이후 원유가 하락, 달러가치 하락, 국제금리 하락 등의 3저 현상으로 인하여 해외원유, 외자, 수출에 의존하여 경제발전을 해온 한국은 경제발전의 호기를 맞았다. 이로 인해 한국의 기업들이 성장하면서 실업률은 계속 하락하여 오히려 인력난을 발생하게 되었다. 게다가 1987년 국민들의 민주화요구에 굴복한 정부가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면서 민주화 조치를 취하였다. 그 후 노동자들의 요구는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면서 수많은 노사분규가 발생하였다.(1987년 6월 29일 이후 그해말까지 발생한 노사분규 3,500여 건은 1981-86년간의 연평균 쟁의 건 수의 20배에 달했다.)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 직장 내의 억압 철폐 등을 요구하면서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대규모 집단시위를 벌였다. 그 결과 노동자들의 임금은 인상되었고 노동조건은 눈에 띄게 개선되었고 노동자들의 3D업종 기피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2. 미등록 노동자에서 산업기술연수생으로
노동자들의 3D업종 기피로 인해 기업들은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할 수 없었다. 부족한 노동력 확보를 위해 기업들은 2가지 방법 중 하나를 취하게 되었다. 즉 기업들이 낮은 임금으로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는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진출하거나 혹은 값싼 외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하기 시작하였다. 1986년 ‘서울아시아경기대회’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개최하면서 한국정부가 문호개방정책을 펼치자 외국인들이 한국을 쉽게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서울 아시아 경기대회 후인 1987년 이후 한국경제의 발전으로 임금의 상대적 상승, 노동조건의 상대적 향상, 한국 경제성장 선전효과 등으로 외국노동자들이 이주해오기 시작하였다. 특히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서남아시아의 노동자들이 관광으로 입국하여 불법으로 체류하며 3D업종을 비롯하여 인력이 부족한 중소기업 생산직 등에 취업을 하게 되었다. 당시 정부는 경제적인 이유로 불법으로 취업한 외국인 노동자(미등록 이주 노동자)를 묵인하는 정책을 펼쳤다.
한편 외국으로 진출한 기업들은 현지에서 고용한 노동자들의 기능향상을 위해 기술연수가 필요하였을 뿐 아니라 국내 중소기업들의 인력난으로 인하여 외국인의 고용을 허용해달라는 요구가 지속되었다. 외국인의 국내 취업은 내국인으로 대체할 수 없는 전문인력으로 취재, 기술제공, 상용, 투자, 교육연구, 취업, 흥행의 7개 부문에 한정되어 있으나, 단순기능의 외국인력의 고용은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이주노동자의 수가 급증하고 미등록 노동자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정부는 1991년 11월 ‘해외투자기업 연수생제도’를 통하여 산업기술연수생(company trainee)을 도입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연수생의 체류기간은 1991년 첫 시행 때 법적인 체류기간은 6개월(6개월 연장 가능)이었으나, 1993년 12월 체류기간을 1년 연수 및 1년 연장 가능, 1996년 2월에는 2년 연수 및 1년 연장가능으로 바뀌었다.
산업연수생은 두 부류인데 해외진출기업의 현지 고용인력의 기능향상을 위한 연수생과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의 추천으로 국내제조업에 취업이 허용된 연수생이 그것이다. 산업연수생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니므로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고, 노동법 적용과 산재보험, 의료보험 등의 사회복지제도에서 배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권침해의 논란이 많았다. 또한 산업연수생은 미등록 노동자에 비해 낮은 임금을 받았기에 사업체를 이탈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8년 4월 정부는 ‘연수취업제’를 도입하여 2000년 4월부터 이주 근로자들이 2년 연수 후 1년 고용허가제로 취업 할 수 있게 하였다. 이로써 이주 근로자들이 처음으로 노동자 신분을 보장받게 되었다. 2002년 출입국 관리법 시행령(2002.4.18)및 시행규칙(2002.4.27)의 개정으로 ‘연수 1년 + 취업 2년’으로 조정되었고, 2009년 법률개정을 통해 3년 취업+2년 연장 제도로 개선하였다.
1.3. 고용허가제
산업연수생제도는 이주 근로자들에 대한 인권침해와 불법 체류 등으로 인하여 사회적 문제가 제기되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외국인 노동자의 고용등에 관한 법률’이 2003년 7월 31일 국회를 통과하였고 2004년 8월부터 ‘고용허가제’가 시행되게 되었지만 ‘산업연수생제도’도 병행하고 있었으나, 2007년 ‘산업연수생제도’를 폐지하고 고용허가제만 실시하고 있다. 한국은 고용허가제를 통하여 아시아에서 최초로 외국인 노동자들의 법적 권리를 인정하고 보호하게 되었다. 즉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인과 같이 노동3권(단결권, 단체행동권, 단체교섭권)과 최저임금을 보장받고, 건강보험과 상해보험의 임금을 받게 되었다. ‘고용허가제’는 인력 송출국들과 협약 내지 양해각서를 통해 외국에서의 정부 주도적 인력모집, 내국인 우선의 원칙, 정주화없는 단순기능인력의 단기고용 원칙을 특징으로 한다. 따라서 ‘고용허가제’가 ‘산업연수생제도’보다는 진일보한 제도이지만, 값싸고 유순한 노동력을 유지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아울러 정부는 부족한 단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2007년 중국과 소련 등에 거주하는 유·무연고 외국국적 동포가 3년간 국내취업을 할 수 있는 ‘방문취업제’를 실시하였다. 이로 인해 외국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한국으로 쉽게 입국하여 취업을 할 수 있게 되자, 특히 중국에 거주하던 동포들이 대거 한국으로 들어와 취업을 하고 있다. 다음호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의 현황과 실태를 살펴보자.
[월간빛, 2013년 2월호, 김명현 디모테오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다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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