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교리서 DOCT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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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실린 교리 용어에 관한 몇 가지 제안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22 조회수4,648 추천수0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실린 교리 용어에 관한 몇 가지 제안

 

 

지난 3월 19일 한국 교회의 수호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을 기하여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우리말 공식 번역본이 간행되었다. 이를 계기로 전국 모든 교구에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를 읽고 연구하며, 이를 교리교육 현장뿐 아니라 우리 신앙 생활에서도 널리 활용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우리말 “가톨릭 교회 교리서” 간행 작업에 참여한 한 사람으로서 교리교육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여 이 교리서에서 채택한 우리말 교리 용어에 관해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이미 1994년에 그 제1편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왔고, 이어 1995년에는 제2편이, 1996년에는 제3편과 제4편이 한데 묶여 발간되었다. 이것은 세계 교회에서 처음으로 빛을 보게 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 불어판을 번역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듬해인 1997년에는 사도좌에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 라틴어 표준판이 나왔는데, 요한 바오로 2세가 [큰 기쁨]이라는 교서와 함께 이를 공식 승인하고 보편 교회에 선포하였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라틴어 표준판은 불어판 교리서를 상당히 보완한 것이어서, 한국 천주교회는 이 라틴어 표준판을 텍스트로 삼아, 이미 번역 출간된 세 권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를 손질하여 한 권으로 묶어 출판하기로 하였고, 올해 2월 4일자로 사도좌의 출판 승인을 받아 우리말 공식 번역본을 내놓게 된 것이다.

 

초판본이라 할 수 있는 1994-1996년에 발간한 세 권으로 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와 이번에 나온 우리말 “가톨릭 교회 교리서” 공식 번역본은 본문이 다르다. 우선은 새로 번역하였기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일부 교리 용어를 다르게 채택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리 용어들을 정리함으로써 예견되는 혼란을 막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라 하겠다.

 

 

1. '성 베드로'와 '베드로 사도'(153. 602. 1338항 등)

 

'성 베드로'라는 말 대신 '사도 베드로' 또는 '베드로 사도'를 채택하였다. 따라서 원문에 성 베드로 또는 성 바오로라고 되어 있어도 한국 천주교회의 관습에 따라 사도들의 이름 앞에 성(聖)을 붙이거나 뒤에 성인(聖人)을 붙이는 대신 사도를 붙여 자연스런 번역문이 되도록 하였다.

 

*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토마 사도의 이름이다. 토마 사도의 이름이 전례 성서에서는 토마스로 되어 있지만, 공동 번역을 따라 토마스 대신 토마를 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일 토마를 토마스라 한다면 안드레아나 마티아도 안드레아스나 마티아스로 해야 할 것이다.

 

 

2. '사욕'과 '탐욕'(405-406. 1426항 등)

 

가톨릭 교리는, 원죄로 말미암아 낙원의 원조들이 자신과 타인과 하느님과 이루던 질서와 조화가 깨졌다고 가르친다. 그 중요한 무질서 가운데 하나가 욕망의 무질서이며, 이를 concupiscentia라 한다. 이 말을 '사욕'(邪慾)이라고 번역할 때는 한문을 달아야 혼동을 막을 수 있다. 사욕(邪慾)은 잘못된 것을 바라는 욕망이며, 사욕(私慾)은 개인 이익만을 바라는 욕망이다. 그래서 교리서에서는 '사욕' 대신 '탐욕'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하였으며, '사욕'을 쓸 경우에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되도록 한문을 달았다.

 

* 공동 번역은 '욕정'(집회 9,9), '정욕'(다니 13,56; 집회 23,6; 지혜 15,5; 2베드 1,4; 1요한 2,17), '욕심'(민수 11,34; 마르 4,19; 야고 1,15), '탐욕'(집회 5,2; 로마 7,7.8; 골로 3,5), '음욕'(다니 13,8)으로 번역하였으며, '사욕'이라고 번역한 경우는 없다. 공동 번역에 나오는 '사욕'은 네 번 모두 '사욕(私慾)'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3. '교역'과 '직무'(874-879항 등)

 

교회 안에는 처음부터 여러 가지 직무가 있어 왔으며, 앞으로도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 교회 직무가 생겨날 것이다. 직무(ministerium)란 교회 공동체에 봉사하는 여러 일들을 일컫는 말이다.

 

용어위원회가 '직무'를 '교역'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냈지만, 지금까지 써 온 '직무'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사제직을 보편 사제직과 직무 사제직으로 구분하는데, 후자를 '교역 사제직'이라고 하는 것이 낯설게 느껴진다. '주교 직무'나 '사제 직무'는 자연스럽게 들리지만, '주교 교역'이나 '사제 교역'은 아직 어색하게 들린다. 그리고 이를 '주교직'이나 '사제직'으로 줄이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직무를 맡은 사람은 '직무자'라고 번역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성직자'(聖職者)라는 용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 싶다. 성직자는 '거룩한 직무를 맡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를 굳이 clericus(영어로는 clergy)의 우리말 번역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성직자는 거룩한 직무를 맡은 사람 곧 '성품 직무자'(minister ordinatus)인 주교·사제·부제를 통틀어 일컫는 말로 이해하기 바란다.

 

* 공동 번역은 minister를 '섬기는 사람'(마태 20,26 병행; 요한 12,26), '심부름꾼'(로마 13,4; 2고린 3,7-8), '일꾼'(로마 15,16; 에페 3,7; 6,21; 골로 1,7; 1디모 4,6; 사도 26,16; 1고린 3,5; 2고린 6,4 히브 1,7), '하인' 또는 '부하'(마태 22,13; 요한 2,5; 18,36), '경비병'(요한 18,12), '형리'(마태 5,25), '시중드는 사람'(루가 4,20), '일을 맡아 보는 사람'(히브 8,2)으로 번역하였고, ministerium은 '일'(루가 10,40; 사도 1,17; 6,4; 2고린 3,9; 6,3; 묵시 2,19), '직분'(사도 1,25; 1디모 1,12), '직책'(로마 11,13; 1고린 12,5), '사제직'(히브 8,6), '봉사'(에페 4,12), '사명'(사도 20,24; 골로 4,17; 2디모 4,5), '임무'(사도 20,24; 2고린 5,18)로 번역하였다. '교역'이라는 말은 없다.

 

 

4. '개별 심판'과 '사심판'(1022-1023항)

 

용어위원회가 '사심판'을 '개별 심판'으로 하자는 의견을 냈지만, '공심판'이 “가톨릭 교회 교리서” 1023항에 살아 있고, '개별 심판'이라는 말은 그 개념이 좀 다르기 때문에 이전처럼 사심판, 공심판, 최후 심판으로 구분하여 사용하기로 하였다. 혹시 라틴어 용어가 달라졌는가 확인해 보았지만 예전에도 같은 용어, judicium particulare를 사용하였다.

 

 

5. '축복'과 '강복'(1078-1083항)

 

'강복'은 하느님께서 복을 내리시는 것을, '축복'은 하느님께 복을 비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금도 이런 구별 없이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복을 축복이라고 쓰고 있다. 개정판 공동 번역은 '복을 내리시다'로 풀어 쓰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그대로 축복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사도 4,33; 로마 11,12; 2고린 1,11; 에페 1,3; 3,6; 히브 6,7 등).

 

“가톨릭 교회 교리서” 1078-1083항에 나오는 것처럼, benedicere 또는 benedictio라는 말을 우리말로 옮길 때 경우에 따라 '강복' 대신 '축복'으로 번역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강복'과 '축복'을 구별하여 쓰되, 공동 번역을 인용할 경우에는 그대로 축복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benedicere는 하느님께서 강복하시는 경우에만 사용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을 찬미할 때도 같은 말을 사용한다. 따라서 우리말에서는 경우에 따라 '강복하다, 축복하다, 찬미하다'로 번역해야 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축복하다' 또는 '축복'이라는 말을 그대로 썼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축복'이라는 말에 대해 너무 그 말마디의 뜻에 얽매여, 살아 있는 말의 쓰임을 인위적으로 고정시켜서는 안 된다고 본다.

 

 

6. '영적 독서'와 '거룩한 독서'(1177. 2708항)

 

요즈음 '거룩한 독서'의 붐이 일고 있다. 일반적으로 lectio divina를 '거룩한 독서'로 부르고 있으므로, 용어위원회의 의견인 '영적 독서'라는 말 대신 '거룩한 독서'로 번역하였다.

 

 

7. '죽을 죄'와 '용서받을 죄'(1854-1864항)

 

용어위원회는 '대죄'와 '소죄', '죽을 죄'와 '소죄'로 구분하였다. 그런데 '죽을 죄'(peccatum mortale)와 비교하여 사용할 용어로 '용서받을 죄'(peccatum veniale)라는 용어를 시도하여 보았다.

 

'용서받을 죄'란 '용서받지 못할 죄', 곧 중죄와 비교하여, 용서받을 만한(용서할 만한) 가벼운 죄를 의미한다. 쓰기 편하다고 그냥 '소죄'라는 용어 하나를 이런 저런 경우에 다 쓰지 말고 새로운 용어를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예: 무거운 죄, 가벼운 죄).

 

 

8. '현행 은총'과 '조력 은총'(2000. 2024항)

 

지금까지 '도움 은총'이라고 써 오던 말을 이전의 '조력 성총'을 그대로 살려 '조력 은총'으로 번역하였다. '도움 은총'이 썩 좋은 용어가 아니어서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용어위원회가 이를 '현행 은총'으로 하자는 의견을 냈으나, 이 말 역시 개념이 쉽게 떠오르는 말이 아니어서, 윤공희 대주교님이 제안하신 대로 '조력 은총'을 쓰기로 하였다.

 

이 용어 gratia actualis 역시 라틴어를 확인해 보니 변경된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사용되어 오던 단어 그대로였다.

 

 

9. '예지'와 '현명'(1805-1806항)

 

예전에는 사추덕을 지덕(智德), 의덕(義德), 용덕(勇德), 절덕(節德)이라고 불렀다. 첫 번째 덕인 지덕을 용어위원회가 '예지'로 하자는 의견을 냈으나 공동 번역에 따라 '현명'으로 번역하였다. "지혜는 사람에게 절제와 현명과 정의와 용기를 가르쳐 준다"(지혜 8,7). 공동 번역은 prudentia 또는 prudens를 '현명(함)' 또는 '현명한'으로 번역하였고, 예지로 번역한 곳은 잠언 8,14 한 군데 뿐이다.

 

교리서에서는 '현명한'이라는 형용사를 많이 사용하는데 '현명'의 경우에는 쉽게 '현명한'이라고 번역할 수 있으나 '예지'의 경우에는 '예지를 갖춘' 또는 '예지가 있는' 식으로 번역하여야 할 것이다. 공동 번역에서 형용사로 쓰인 경우는 51번이며, 명사로는 10번 밖에 없다는 점도 참고하기 바란다.

 

 

10. '총괄 갱신'과 '총괄 실현'(recapitulatio)

 

recapitulare는 원래 연설을 마치면서 종합적으로 마무리하는 것을 말한다. 신약성서에는 두 번 나오는데, 로마 13,9에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있고("어떤 계명도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이 말로 요약됩니다."-200주년 성서), 에페 1,10에는 신학적 의미로 사용되어 있다("만물을 그리스도 안에 총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 200주년 성서).

 

이 말이 우리 교리서에는 매우 풍부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일반적 의미로는 2055. 2196항; 신학적 의미로는 518. 538. 668. 772. 831. 1043. 1138. 1161. 2055. 2196. 2748. 2823. 2854항). 하느님의 구원 계획 또는 구원 역사가 그리스도 그분과 그분의 삶에 총괄적으로 실현되어 있음을 말한다. 물론 그 구원 역사는 모든 이, 모든 것의 구원 역사이다. 따라서 한 처음에서 지금까지의 역사만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의 모든 이, 모든 것의 구원 역사가 그리스도 안에서 종합적으로 마무리되었음을 말한다.

 

용어위원회에서 '총괄 갱신'이라는 말을 제시하였는데, 갱신이라는 말은 요즈음 '무얼 바꾼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자격증 갱신).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하느님의 구원 계획 또는 구원 경륜은 무얼 바꾸는 임시적인 것이 아니라, 완전히 성취하는 것이다. 따라서 '총괄 실현'이 좋을 듯하며, 동사 recapitulare는 '총괄 실현하다' 또는 '총괄적으로 실현하다'로, 형용사 recapitulatus는 '총괄 실현된', '총괄적으로 실현된'으로 하면 될 것이다.

 

 

11. '신부'와 '사제'(1546-1568항)

 

'사제'(司祭)'라는 직무는 주교와 사제가 수행하며(직무 사제직), 부제는 봉사 직무만 수행한다. 그런데 이 두 성품(聖品)이 한 자리에서 언급되어 사제직을 수행하는 경우 이를 명확히 구분하기 위해 교회에서 흔히 '신부'라고 불리는 이들의 직무나 품계를 '탁덕직' 또는 '탁덕품'으로 하자는 것이 용어위원회의 의견이다.

 

라틴어에서는 presbyter(presbyterium)라는 말로써 이런 구분을 해결하고 있다. presbyter는 본래 원로(元老)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용어를 달리 사용하는 대신, 문맥상 구별이 되도록 하였다.

 

* 이미 책으로 나왔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지면을 빌려 몇몇 곳을 수정하고자 한다. 1516항과 1530항 그리고 1623항에서는 "사제들(주교와 신부들)"이라고 번역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그 밖에는 모두 '신부'를 '사제'로 고친다. 1554항 다섯째 줄부터는 다음과 같이 고친다. "그것은 주교품과 사제품이며, 부제품은 그들을 돕고 봉사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에 와서 사제(司祭)라는 용어는 주교와 신부만을 가리키며, 부제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가톨릭 교리는 사제직에 참여하는 두 품계(주교품과 사제품)와 봉사의 품계(부제품), 이 세 가지 품계는 모두 서품이라고 하는 성사적 행위, 곧 성품성사를 통하여 주어진다고 가르친다." 1564항과 1567항의 첫머리에 나오는 '신부' 역시 '사제'로 고치기 바란다(두 대목 모두 "교회 헌장" 28항의 인용문).

 

 

12. '입문 성사'와 '입교 성사'(1229. 1232항)

 

세례, 견진,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교 입문의 성사이다. 이를 다음과 같이 '입교 성사'와 '입문 성사'로 구분하였다. 아무런 수식어 없이 사용할 때는 '입교 성사'라 하고, 수식어 곧 그리스도교라는 말과 함께 사용할 때는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라 하였다. 그렇지만 아무런 수식어 없이 사용할 때에도 '입교 성사'와 '입문 성사'를 혼용할 수 있다고 본다.

 

 

13. '야훼'와 '주님'(203-213. 2168-2169항)

 

공동번역은 하느님의 이름을 '야훼'로 명기하였다. 그러나 가톨릭의 전례 성서나 임승필 신부의 새번역은 '주님'으로 고쳐 썼는데, 이것은 유다인들의 전통을 따른 것으로, 존중할 만하다. 다만 야훼라는 이름을 흔적조차 없앤다는 것은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개신교 형제들이 아직도 여호와라고 즐겨 부르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주님이라는 낱말을 궁서체 굵은 글씨(주님)로 표기하여 '야훼'라는 하느님 이름이 '주님'(아도나이)으로 고쳐 적은 것임을 밝혔다.

 

 

14. '삼위일체'(232-238항)

 

라틴어에는 삼위일체라는 낱말이 없다. Trinitas는 (성)삼위를 가리킨다. 이 말을 살리려면 '삼위일체 하느님'이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 삼위일체는 하느님께서 삼위이시며 일체이심을 드러내는 일반 명사로 생각해야 한다. 우리 교리서에서는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 성삼위 등으로 옮겼다.

 

 

15. '그리스도교 신자'와 '그리스도 신자'(871-873. 2472항)

 

그리스도교 신자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신자이고, 그리스도 신자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라고 엄밀히 구별할 수 있겠다. 그런데 교회 문헌에서는 christianus(그리스도교 신자 또는 그리스도인)와 christifidelis(그리스도 신자) 이 두 용어가 구분되어 쓰이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개신교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리스도 신자는 가톨릭 교회 안에서 모든 신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보편교회 안에서 평신도를 가리킬 때는 christifidelis laicus라고 하지, christianus laicus라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처럼 구분하여 사용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christianus를 '그리스도교 신자' 또는 '그리스도인'으로, christifidelis를 '그리스도 신자' 또는 '신자'로 번역하였다.

 

<붙여 써서 고유 명사화한 경우>

 

띄어 쓰면 일반적인 의미로 알아들어 혼동할 우려가 있을 경우 이를 붙여 씀으로써 그 의미를 가톨릭 교회 용어로 분명히 한정시키고자 하였다.

 

 

16. '교리교육'과 '교리교사'(catechesis et catechista) ; 신비교육

 

복음서에서 '율법학자' 또는 '율법교사'를 붙여 쓰듯이 '교리교육'과 '교리교사'를 붙여 씀으로써 고유한 뜻을 드러내었다. 교리교육의 일종인 '신비교육'(mystagogia)도 붙여 썼다.

 

 

17. 보편교회, 지역교회, 개별교회(ecclesia universalis, localis, particularis)

 

'개별교회'는 교구를, '지역교회'는 한국 교회나 아시아 교회를, '보편교회'는 교회 전체 또는 전 교회를 가리키는 용어로 한정시키기 위해 붙여 썼다. '개별 교회'는 본당으로, '보편 교회'는 가톨릭 교회로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붙여 쓴 경우 '개별교회'는 언제나 교구를 말하고, '보편교회'는 교회 전체를 말한다.

 

 

18. 봉헌생활(vita consecrata) ; 독신생활

 

수도자들의 삶을 가리키는 '축성생활' 또는 '봉헌생활'은 원래 '축성된 삶' 또는 '봉헌된 삶'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를 '축성 생활' 또는 '봉헌 생활'로 띄어 쓸 경우 혼동이 일어날 수 있다. 일반 신자들도 봉헌 생활 곧 하느님과 교회를 위해 자신과 소유와 시간 등을 봉헌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봉헌생활'을 붙여 써서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사는 수도자들의 생활만을 가리키도록 하였다. '독신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독신으로 사는 '독신 생활'은 당연히 띄어 써야 하므로, 하늘 나라를 위한 독신생활을 가리키기 위해서 붙여 썼다.

 

 

19. 참행복

 

마태 5,3-11의 이른바 예수님의 행복 선언에 나오는 '행복들'(beatitudines)을 '참행복'으로 붙여 씀으로써 일반적인 행복과 구별하였다. 교리서는 이 참행복을 '복음의 행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0. 최고의회

 

본 번역서에 나오는 최고의회는 유다인 최고의회 곧 산헤드린을 가리키는 말이다(443. 591. 596. 597항). 이를 고유 명사화하기 위해 붙여 씀으로써 최고의회는 유다인들의 최고의회 곧 산헤드린만을 가리킨다.

 

 

21. '감사 기도'와 '감사기도'

 

'감사 기도'는 온갖 종류의 감사 기도에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미사 통상문의 '감사기도'(Anaphora) ― 이전에 '성찬기도'라 했고, 흔히 미사 까논(Canon)이라고 부르던 ― 는 꼭 감사기도라고 붙여 써야 혼동을 피할 수 있다.

 

 

22. '말씀 전례'와 '말씀전례'

 

말씀 전례는 모든 말씀의 전례에 사용될 수 있는 말이지만, 미사의 전반부를 가리키는 경우에는 '말씀전례'로 붙여 썼다. 공의회 이후 말씀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여러 모임에 앞서 말씀 전례를 거행하는 관례가 정착되었다. 이 같은 '말씀 전례'는 띄어 쓴다.

 

 

23. 이 밖에 성찬전례, 시간전례, 성주간, 실체변화(1376. 1413항), 고해사제, 사도신경, 구약성서, 신약성서, 일곱 성사 이름 같은 전례 용어 또는 교리 용어는 붙여 씀으로써 고유한 뜻을 드러내고 있다.

 

아래의 경우는 띄어 썼다.

 

교회 일치 운동; 미사 전례 성서(전례 성서); 사회 교리; 우상 숭배; 종교 개혁; 지상 교회; 천상 교회; 축성 성유; 행복 선언; 혼종 혼인; 희생 제물; 희생 제사.

 

 

24. 종교 개혁 / 종교개혁

 

이 가운데 붙여 쓰자고 제안하고 싶은 것은 '종교 개혁'이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 개혁은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종교적 개혁 운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16세기에 일어난 불행한 역사적 사건을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25. 희생 제물 / 희생제물

 

희생 제물과 희생 제사 역시 붙여 쓰자고 제안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일반적인 희생 제사나 제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단 한 번 바치시어 인류 구원을 이루신 유일한 제사와 제물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동번역 성서는 붙여 쓰고 있다.

 

 

26. 어린 양 / 어린양

 

공동번역성서는 '어린 양'을 띄어 쓰는데, 우리 전례서에서는 이를 붙여 써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고유한 명사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는 형용사와 명사가 합하여진 말이므로 띄어 쓰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이상으로 우리말 “가톨릭 교회 교리서” 공식 번역본에 나오는 교리 용어에 대한 의견을 나름대로 제시하였다. 이에 대한 독자들의 고견을 듣고 싶다(전화: 02-469-5452; 460-7580. 팩스: 02-460-7633. 이메일: jsh@cbck.or.kr). 이 지면이 지상 공청회 자리라 생각하여 주시기 바란다. 말은 살아 있는 것이어서 억지로 고정시킬 수 없다. 따라서 말을 쓰는 사람들 또한 말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갖고 이런 자리에 동참하기 위해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정말 바람직한 일이다.

 

[사목, 2003년 5월호, 정승현(주교회의 교리교육위원회 총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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