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81) 주거문제의 좋은 대안 ‘무리’(Murri)
오늘날 내집 마련은 헛된 꿈인가?
문화를 형성하는 인간의 노력(사회적 노동)은 노동에 의해 그 품위가 향상될 뿐만 아니라 노동 그 자체에도 기여합니다. 노동을 통해 인간은 하느님께서 만드시고 역사하시는 세상 안에서 주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게 되고, 더 나아가 창조주 하느님의 뜻에 맞갖게 자신과 삶의 목적을 성취하며 발전시켜 나가게 됩니다.
인간은 노동의 주체이면서 노동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기 때문에, 노동에 의해 자기 자신의 인격적 품위와 존엄성을 형성하며 유지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해 인간은 노동을 함으로써 자신의 품격을 드높이며 진정한 인간이 됩니다. 아울러 노동을 통해 고유한 역사적 사명을 수행합니다. 따라서 인간과 노동이 분리되고 소외되는 현실은 창조질서에 맞지 않는 것이며 인간의 존엄성이 크게 위협받는 일입니다.
노동이 소외되는 현실은 주거권을 둘러싼 우리의 일상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경제적 발전을 구가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내 집 마련은 꿈에 그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실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많은 경우 건설사의 폭리와 부동산 투기가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유럽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들이 주거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이 때 1963년 설립된 이탈리아의 주택건설협동조합 ‘무리(Murri)’는 좋은 대안을 보여줍니다.
‘무리’는 내 집 마련을 꿈꾸는 주택 수요자들이 만든 협동조합입니다. 집을 사려는 수요자들이 일반 건설회사들이 공급하는 주택을 수동적으로 구입하는 게 아니라, 원하는 집을 직접 짓는 것을 모토로 설립되었습니다. 현재 가입된 조합원만 2만3000여 명으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주택건설협동조합 중 하나입니다. 50유로의 조합가입비만 내면 집을 구입하거나 임대할 수 있는 권리를 얻습니다.
조합이 조합원의 집을 짓는 것이기 때문에 ‘무리’가 짓는 집은 가격에 비해 높은 품질을 자랑합니다. 친환경 자재를 사용하고, 태양광 설비를 갖춘 에너지 절약형으로 집을 짓는 등 사람은 물론 생태계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요소를 최소화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사업이 진행됩니다. 그러면서도 집값은 시중의 80%, 임대가격은 시중의 60% 수준에 불과합니다. 주택을 구입하기 위해서 내야 하는 중도금을 6회 분납할 수 있으며, 분납 시기 역시 조합원 사정에 따라 조절 가능합니다. 10년을 임대 형태로 살다가 돈이 생겨서 주택을 구입하게 될 경우, 10년 간 낸 임대료를 제외한 금액만 내면 됩니다. 지금까지 ‘무리’가 건설한 주택은 1만2000여 채로, 볼로냐 지역의 경우 지역 주택 공급의 2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집을 짓는 과정도 민주적이어서, 건축 허가 과정부터 조합원들에게 상세한 정보가 제공되고 주택의 설계와 시공에 조합원들의 의견이 반영됩니다. 건축 사업이 진행되는 지역의 집을 구입하고 싶은 조합원들은 1만 유로(약 1600만 원)를 조합에 내고 분양 신청을 합니다. 경쟁률은 3:1 정도로 조합에 가입한 기간이 길수록 기회를 얻을 확률은 높아집니다.
‘무리’의 경우 주택가격 거품과 건설사 부실화 등의 원인이 되는 은행 빚이 아니라, 조합의 내부 적립금으로 주택을 짓기 때문에 당장 집이 팔리지 않아도 자금 압박에 시달리지 않아 조합원에게 피해가 거의 없습니다. 2010년 현재 ‘무리’의 내부 적립금은 4700만 유로에 달해 조합원들이 안심하고 내 집 마련의 꿈을 키워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협동조합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도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2월 24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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