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의 부활을 믿으며”에 대한 교의신학적 성찰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1) 그리스도인들은 초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육신 부활’에 대한 고백으로 ‘사도신경’을 끝낸다. 최근에 일부 저작물들이 육신 부활에 관해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과 구별되는 듯한 견해를 개진하고 있다고 알려지면서 신자들 사이에 약간의 논쟁이 빚어지고 있다.2) 교회의 핵심 신앙을 둘러싸고 일고 있는 혼란이 진정되기를 바라는 취지에서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의 의미를 교의신학적으로 간략히 밝히고자 한다.3) 먼저 ‘육신 부활’의 기초이자 근거가 되는 예수 부활의 의미를 서술하고, 논란되고 있는 견해와 주장을 고려하면서 육신 부활에 관한 신경의 의미를 제시하고자 한다. 1. ‘육신 부활’의 기초로서의 ‘예수 부활’ 그리스도인들은 ‘육신 부활’ 고백을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인간 모두 하느님의 구원 은총에 힘입어 전인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아울러 세계 전체도 완성에 이르리라고 희망한다. ‘육신 부활’의 의미는 그리스도 신앙의 기초이자 근거인 ‘예수 부활’의 실상을 통하여 올바로 드러날 수 있다.4)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 신앙이 한결같이 고수해 온 핵심 진리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단정할 수 있는 역사 내 사실(史實)이라고 교회가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분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십자가 죽음과는 달리 역사 내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역사적 삶으로부터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영원의 차원으로 초극한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서 어디에도 예수님 부활의 경위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사실 부활 사건 자체를 눈으로 목격한 증인은 아무도 없었고 어느 복음사가도 그것을 묘사하지 않았다. 누구도 부활이 물리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말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다른 생명으로 넘어간다고 하는 부활 사건의 핵심은 감각기관으로 지각할 수 없는 것이다.”5) 여기서는 다만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증인들의 놀라움이 강조되고 그분과의 반가운 해후가 묘사될 뿐이다(1고린 15,3-8; 마르 16,1-10; 마태 28,1-10; 루가 24,1-35; 요한 20,1-10 참조). 예수님의 부활 사화에는 죽었던 라자로나 회당장 야이로의 딸, 또는 어느 과부의 외아들의 소생 장면과는 달리 부활 경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요한 11,1-44; 마르 5,35-43; 루가 7,11-17 참조).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을 통하여 제자들이 체험한 바는 이전에 전혀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체험이면서 그들의 삶을 현실적으로 변화시킨 체험이었다. 예수님의 부활은 현세의 인간 조건을 벗어나 필설로는 결코 정확히 기술할 수 없는 새로운 생명의 형태로 일어난 일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죽기 전의 상태로 소생하셨다가 시간이 경과하고 나서 다시 죽어야 하는 유한한 삶으로 되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현세의 인간 조건을 벗어나 인간의 언어를 가지고 적절히 표현할 수 없는 ‘새로운 생명’의 형태로 살아나신 분으로 증언되고 있다. 바오로 사도의 진술은 이 실상을 비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1고린 15,42-43). 예수님의 생존 당시 유다 사회에는, 세상 종말에 죽은 사람들이 부활하리라는 묵시문학적 부활 신앙이 유포되어 있었다.6) 제자들이 스승의 부활을 묵시문학적 사자(死者) 부활 신앙의 지평 안에서 이해하였음을 바오로 사도의 진술이 확인해 준다.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1고린 15,16). 그들은 스승의 부활을 세상 종말에 발생하리라고 기대했던 사자 부활의 시작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죽었다가 부활한 첫 사람이 되셨습니다”(1고린 15,20). 제자들은 십자가 위에서 처형된 스승을 자신들의 서술 능력을 초월하는 새로운 양식으로 만나 충격에 사로잡히고 그 체험을 익히 알고 있던 ‘사자 부활’이라는 묵시문학의 통찰로 이해한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면서 제자들은 급변하였고, 그리스도 교회가 인류 역사 안에 출현하게 되었다. 제자들이 스승이신 예수님의 발현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면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예수님을 주 하느님으로 선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1고린 15,14). 예수님의 부활이 그리스도 신앙을 현실적으로 생겨나게 한 역사적 사건으로 작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2. 육신과 세계 구원으로서의 ‘육신 부활’ ‘육신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처럼 하느님께서 인간의 인격적 정체성을 보존시키면서도 형언할 수 없이 새로운 존재양식 안으로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는 사건으로 이해될 것이다. ‘육신 부활’ 신앙은 인간 존재의 구성 요소인 육신을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무의미한 부분으로 배제시키지 않으면서, 동시에 육신의 궁극적 존재 양식을 명시적으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교회는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 1224-1274년) 이래 통합적 인간관을 교리 안으로 수용하여 비엔나 공의회(Concilium Viennense, 1311-1312년)를 통하여 인간을 물질적 육신과 정신적 영혼으로 구성된 합일체로 파악하고 있다.7) 이처럼 육신과 영혼이 인간 안에서 분리된 두 개의 존재자가 아니고 하나의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구별되는 두 개의 존재 원리이기 때문에 죽음은 육신만이 아니라 영혼마저 관통한다.8)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부활에서 드러내 보이셨듯이 당신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결코 파멸시키지 않으신다는 신앙의 진술을 고수할 때, 죽음 속에서 육신이 전적으로 소멸되어 무화(無化)된다는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다. 영혼이 죽음을 함께 겪는다는 말 역시 영혼이 무(無)로 소멸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지만 ‘육신 부활’이 땅에 묻혀 부패하여 소멸된 신체의 분자들로서 다시 재구성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가 현세적 인간과 부활한 인간의 동일성이나 지속성을 보존하려는 취지에서, 현세적 육신 안에서의 부활을 가르친 것은 사실이다. 제11차 톨레도 공의회(Concilium Toletanum, 675년)는 죽은 이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부활할 것이나, 다른 육신으로서가 아니고 현세적 육신을 입고 부활하리라고 가르치고 있다.9)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Concilium Lateranense IV, 1251년) 역시 모든 인간이 현세에서의 육신을 지니고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 바 있다.10) 그러나 오늘날 육신 부활을 인간의 잔해인 유골이 세상 종말에 하느님에게서 새롭게 활력을 받아 다시 소생하여 천국 또는 지옥에서 존재하는 영혼과 재결합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11) 현대인들은 자신의 지상 생애 중에 이미 몇 년 뒤에는 현재 자신이 지닌 육신의 단 하나의 원자도 그대로 남지 않고 다른 원자로 대치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죽은 이들의 육신 부활은 물질적 요소들로 구성된 시체가 무덤에서 되살아난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영혼-육신의 합일체인 인간이 죽음 속에서 하느님께 구원되어 전인으로서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될 것이다. 그리고 부활하게 될 새로운 육신과 현세적 육신이 동일성과 함께 비동일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음에 유의할 것이다. 제자들이 처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나중에야 스승이심을 알게 되었던 데에서 드러나듯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살아계실 적의 그분과 같은 분이면서도 아주 다른 차원의 존재로 체험되었던 것이다. 죽음과 부활은 시간적 선후가 아닌 상이한 본질의 차원 안에서 이해될 것이다. 생물학적 종말로서의 죽음은 유한한 인간에게 불가피하게 닥치는 자연적 사건이고, 새로운 생명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베풀어지는 초자연적 은총의 선물이다.12) 육신 부활은 인간이 자신의 노력을 통하여 달성할 수 있는 실적의 결과가 결코 아니고 오로지 하느님께서 거저 베푸시는 구원의 선물이다. 인간이 유한한 피조물로서 겪어야 하는 생물학적 죽음 안에서 하느님의 영에 의해 결정적으로 거두어지면서 현세의 삶과 질적으로 구별되는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하게 되는 것이 육신 부활인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십자가 위에서 인간적 무력과 하느님께 버림받은 상태에서 처형당한 예수님을 체험했던 사람들에게서 생겨났다. “이 예수를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으며 우리는 다 그 증인들입니다”(사도 2,32).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의 불의를 이기시는 하느님의 개선을 보여준다.13)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과 피조물 세계의 변화와 관련된 구원사건으로 이해되었다. 그분의 부활은 모든 인간의 부활의 근원이자 원천의 성격을 지닌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죽었다가 부활한 첫 사람이 되셨습니다. …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모두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1고린 15,20-22). 육신 부활은 교회 안에서 예수님과 그의 형제자매들인 모든 인간과 피조물에게도 실현가능한 구원사건의 성격을 지닌다고 이해되었다. 3. 육신과 세계의 총체적 변형으로서의 육신 부활 육신 부활은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진 인간의 육신적 삶과 현실세계의 구원과 상관한다. 무수한 인간들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실세계 안에 만연한 불의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죽음에 처해진다. 인간들은 이렇게 소외된 현실세계 안에서 이상향(理想鄕)을 꿈꿔왔다.14)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들이 열망하는 이상향이 이 세계 안에서 실현된 인격적 이상향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인간 존재의 총체적 변형으로서의 이상향이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이 세상 안에서 실현된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 안에서 현세적 세계가 총체적으로 변형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인간의 영원한 생명에로의 변형 가능성을 보게 된다(필립 3,21 참조). 그리고 이렇게 실현되는 인간과 세계의 변형은 죽음 속에서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구원 은총의 선물로서만 가능한 것이다. 현실적인 소외 상황 안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인간 존재의 부활에 대한 희망이다. 이 부활은 인간들이 십자가의 죽음에 참여하는 정도로 부활 희망의 보편적 상징으로 변화될 수 있다. 인간의 죽음은 다소간에 십자가 죽음의 성격을 지니고 있고,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도 인간들은 구원과 완성이 실현된 미래의 이상향을 갈구하고 있는 것이 역사적 현실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씨앗이 그리스도를 뒤따름으로써 시작된다는 것을 믿는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이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2고린 5,17; 갈라 3,27 참조). 육신 부활은 현세 안에서 지금 행해지는 남을 위한 사랑의 삶을 통해 실현되기 시작하면서 예측 불가능한 새로움을 지니고 성장하는 미래적 실재로 이해될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에서 개인적으로 실현된 바 있는 종말론적 실존이 아가페 사랑의 삶 안에서 재현되는 가운데 세상의 변형이 진행되면서 마침내 더 이상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실현되리라는 희망이 가능하게 된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묵시 21,1-4).15) 육신 부활은 태초의 창조에서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에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 위업으로 생각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과 세계의 창조자이시면서 또한 완성자이시기도 하다는 것을 참으로 믿고 바랄 수 있다. 육신의 부활 신앙은 이처럼 만인과 온 세계의 구원을 희망하는 연대적 신앙의 성격을 지닌다. 한 인간이 죽고 난 뒤, 하느님에 의하여 부활하게 되는 것은 그가 현세에서 맺은 모든 관계이다. 부활을 통해서 그가 세계 안에서 맺었던 모든 관계가 소멸되지 않고 궁극적이 된다. 육신 부활을 통해서 죽음 속에서의 인격체와 그와 관계를 맺었던 세계 자체가 부분적으로 완성상태에 도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육신 부활은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세계가 상호 일치의 유대를 맺는 가운데 완성에 이르는 과정으로 이해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육신 부활을 통한 인류와 세상의 완성이란 ‘차안세계로부터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피안세계에로의 귀환’이 아니라 ‘인류와 세계가 질적으로 새로운 충만함에로 이르게 됨’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1) 교회의 ‘육신 부활’ 신앙고백의 진술양식이 늘 일정하지는 않다. ‘사도신경’은 육신 부활(carnis resurrectio)을 말하고 있는 데 비해서(DS 30항), 381년에 소집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Concilium Constantinopolitanum I) 이래 교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대신경(大信經)’으로 불리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Symbolum Nicaeno-Constantinopolitanum)’은 “죽은 이들의 부활을 기다리나이다”라는 정식으로 진술하고 있다(DS 150항). 그리고 4세기 말부터 6세기에 걸쳐 남프랑스 지역에서 형성된 것으로 간주되는 ‘아타나시오 신경(Symbolum ‘Quicumque’ pseudo-Athanasianum)’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모든 인간이 자신들의 육신을 지니고 부활하게 될 것을 믿는다고 정식화하여 진술하고 있다(DS 76항). 2) 이제민, 「우리가 예수를 찾는 이유는?」, 바오로딸, 2000년, 235-271면; 같은 저자, 「예수는 정말 부활했을까?」, 바오로딸, 2003년 참조. 여기서 개진된 저자의 견해나 주장에 대해 호의적 반응을 보이는 독자층이 있는 반면에, 인터넷 매체를 통해 ‘이단’ 의혹을 제기하는 일부 네티즌들을 포함하여 부정적 반응을 보이는 독자층도 있다. 3) 필자는 현재 쟁점이 된 사도신경의 육신 부활 교리와 관련된 글들을 이미 발표한 바 있다. “교회의 부활 신앙”, 「사목」 119호(1988. 9.), 4-15면; “죽음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 죽음의 이해와 종말신앙”, 「생활성서」 135호(1994. 11.), 75-85면 참조. 4) ‘예수 부활’에 관한 졸문들로 “현대의 그리스도 이해”, 「그리스도와 구원 - 전환기의 신앙 이해」, 성바오로 출판사, 1981년, 158-161면; “예수 부활 - 구원 희망의 근거”, 「경향잡지」 1357호(1981. 4.), 62-64면; “오늘을 위한 그리스도론”, 「2000년대의 한국교회」, 145-192면; “Liberative Elements in Christian Salvation”, INTER-RELIGIO 17(1970년 여름), 15-18면; “예수의 부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길 - 그리스도론 입문」, 성심여대 출판부, 1994년, 248-270면. 5) 「가톨릭 교회 교리서」, 647항. 6) 묵시문학의 사자(死者) 부활 기대에 관해 G. Greshake, Auferstehung der Toten. Ein Beitrag zur gegenwaertigen theologischen Diskussion uber die Zukunft der Geschichte, Essen, 1969년, 213-238면 참조. 7) 이에 관하여 DS 902.3002.3221.3224항 참조. 8) Thomas Aquinas, Summa Theologiae I. 76a., 1-3; J. B. Metz/F. Fiorenza, “Der Mensch als Einheit von Leib und Seele“, Mysterium Salutis II, Einsiedeln 1967년, 610면 참조. 9) DS 325.540항 참조. 10) DS 801항 참조. 11) G. 그레사케, 「종말신앙」, 졸역, 바오로딸, 1999년, 80-90면 참조. 12) 동료 사제 이제민 신부는 일부 네티즌을 포함한 독자들에게서 논란을 불러일으킨 그의 저서 「예수는 정말 부활했을까?」에서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남을 위해 죽는 존재”(40면)로서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 부활하기 위해 우리는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36면)고 열정적으로 강조한다. 그가 “부활이 살아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을 위한 메시지이기에 죽기 전에 남을 위해 죽는 법을 배워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느님과 남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라고 일관되게 역설하는 데에서 깊은 감동을 느낀다. 그런데 그는 생물학적 죽음 이후에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는 부활을 문제시한다. “부활을 현재 생명이 끝나는 죽음 이후로 미루고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부활관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것은 예수의 부활과는 다르다”(20면). 그리고 “영생은 생물학적 생명이 끝난 곳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부활을 체험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영생을 살 수 없다.”(34면)라고 단정적으로 주장하는 그의 진술에서 영원한 생명으로서의 부활이 유한한 인간의 생물학적 죽음 이후에 하느님의 아가페 사랑으로 베풀어지는 무상의 선물이라는 점이 약화되거나 부정되고, 마치 인간이 현세에서 이룩하는 선행을 통해서 스스로 맺을 수 있는 결실처럼 비쳐질 가능성이 없지 않다. ‘영원한 생명’이나 ‘부활’로서 표상되는 인간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느님의 초자연적 은총의 선물임이 더욱 분명히 진술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기스벨트 그레사케, 「은총 - 선사된 자유」, 졸역, 성바오로 출판사, 1979년 참조. 13) J. Moltmann,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 김균진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1979년, 172면 참조. 14) 이에 관하여 졸문, “인간중심적 사상의 초월관”, 「한국교회와 신학」, 성바오로 출판사, 1988년, 439-531면 참조. 15) 이제민 신부는 앞에서 언급한 저서에서 천상의 행복이 지상의 행복과 다르지 않다고 종말론적 구원의 처지를 규정하기도 한다. “천국과 함께 사람들은 지상에서 누릴 수 없는 행복을 상상하지만 천상의 행복은 당신이 누린 그 행복과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 지상에서 우리가 맛본 기쁨과 행복, 그것이 곧 천국의 기쁨이며 천국의 행복이다”(156면 이하). 지상에서 더 이상 다른 것을 바랄 필요가 없이 그지없이 큰 행복이며 기쁨을 향유하는 인간들이 있기는 하지만, 모든 인간이 세상 종말에 실현되기를 갈구하는 이상향으로서의 ‘새 하늘과 새 땅’은 지상에서 현실적으로 일부 인간들만이 (거의 예외적으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을 훨씬 능가하는 ‘예측할 수 없는 새로움’을 포함한다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명히 말할 필요가 있다(위의 책, 463-466면 참조). [사목, 2004년 4월호, 심상태(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소장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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