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활 체험 : 일상에서의 ‘작은 부활’ 내 자신의 부활 체험에 대해 써달라는 원고 청탁을 얼떨결에 수락해 놓고 막상 글을 쓰자니 막막한 생각이 들었다. 부활은 죽음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내 스스로 죽어보지도 않고서 어떻게 내 자신의 부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궁리 끝에 죽음은 꼭 육체적인 생명의 종결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생각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본래 죽음은 숨이 끊어지고 육체적 활동이 모두 중단되는 상태를 말한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다른 차원의 죽음, 이를테면 정신적?영적인 죽음도 있다. 모든 희망을 잃고 아무런 의욕도 없이 무감각하게 지내거나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서 미움과 증오 속에서 산다면, 이는 정신적인 죽음이라고 하겠다. 또는 많은 잘못을 범하고서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마음의 문을 닫고 자신 안에 고립되어 산다면 이는 일종의 영적인 죽음이다. 만일 이런 정신적 영적 죽음을 극복하고 다시 새롭게 살게 되었다면, 이미 이 세상에서 부활을 체험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부활은 세상 종말에 있을 궁극적인 부활과 같은 차원이 아니라 “우리의 비천한 몸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필립 3,21)되는 본래적인 부활을 미리 조금 맛보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의 ‘작은 부활’ 체험을 통해 마지막 날에 있게 될 궁극적인 부활을 어렴풋하게나마 추측하면서, 그 마지막 날을 두려움이 아닌 희망으로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살아오면서 내 스스로 체험했거나 사목생활을 하면서 간접적으로 경험한 ‘작은 부활’에 대해 몇 가지 소개해 본다. 단절된 인간관계를 회복하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로마 4,17) 분이라고 고백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하느님의 창조사업과 연관시켜서 설명하였다. 곧 부활은 무(無)에서 유(有)를 불러내시는 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 행동이라는 것이다. 죽음은 모든 것을 ‘무’로 돌리는 세력으로서, 예수님의 사명 전체를 ‘무’로 돌리려고 했지만, 하느님은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써 죽음의 세력을 꺾으신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것을 ‘무’로 돌리려는 죽음의 세력이 여기저기에서 도사리고 있어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신 능력의 하느님은 이런 죽음과 ‘무’의 세력과 맞서 싸우신다. 바꾸어 말하면 죽음과 ‘무’의 세력이 극복된 곳에서 우리는 ‘작은 부활’을 체험하게 된다. 오래 전 유럽 유학시절에 겪었던 일이다. 유학생활의 마지막에는 남자 수도원에서 방을 하나 얻어 지냈다. 별일이 없는 한, 수도원의 일과표에 따라 기도와 미사, 식사를 함께 하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 그곳 수사들과도 친해져서 서로 농담까지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동안 비교적 친하게 지내던 수사 신부가 나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 독일어 발음이 잘못되었다고 지적을 해주는 것이었다. ‘네가 독일어를 한 지가 벌써 몇 년이 되었는데, 그런 것도 틀리느냐?’는 약간의 비웃음이 곁들인 지적이었다. 그 순간 모욕을 당했다는 느낌과 함께 그 신부에 대한 미운 감정이 솟아올랐다. 그런데 문제는 그 미운 감정이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이었다. 그 신부와 대화는 물론 시선조차도 마주치기가 싫었다. 작은 일에 내가 이래서는 안 되지 하면서 마음을 다잡고 기도 가운데 하느님께 도움을 청해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한 집에서 매일 마주치는 사람에 대해 미운 감정을 갖고 살자니 우선 내가 불편해서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수도원 아침 미사 때 그 신부도 함께 참석한 가운데 하느님께 마음을 모아서 청했다. ‘하느님, 제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니 이제는 당신께서 어떻게 좀 해주십시오.’ 신기하게도 이 미사 후에 그 신부에 대한 미운 감정이 눈 녹듯이 사라졌고, 다시 이전처럼 그와 대화도 나누고 농담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거의 단절되다시피 한 인간관계가 다시 이어지는 체험을 통해 소박하게나마 부활이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무’로 돌리는 세력이고, 돈독했던 인간관계가 끊어진 곳에는 분명히 죽음의 세력이 활동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단절된 인간관계가 다시 이어졌다면, 모든 것을 ‘무’로 돌리는 죽음의 세력이 극복된 것이고, 바로 여기서 죽음을 넘어선 부활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고해성사를 통해 작은 부활의 목격 증인이 되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타나시어 그에게 당신의 양떼를 맡기시고(요한 21,1-17), 다른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시어 그들에게 평화를 기원하신다(요한 20,19-21). 그분은 위기의 순간에 당신을 버리고 줄행랑을 쳤던 제자들을 용서하시고 다시 불러 당신의 사도로 삼으신 것이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제자들은 스승을 저버린 잘못을 용서받고 더 이상 두려움 없이 용감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로 바뀌게 되었다.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제자들은 과거의 허물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도 용서를 통해 죄에 물든 과거를 청산하고 새롭게 태어난 사람에게서 부활하신 분의 손길을 감지할 수 있다고 하겠다. 사제품을 받고 발령을 받기 전에 나의 소속 본당에서 잠시 머물 때의 일이다. 어느 날 평일 아침미사를 마치고 주임, 보좌 신부님과 함께 아침식사를 막 끝내려는데 현관 문 앞에 누가 와있었다. 축 처진 어깨에 얼굴도 제대로 못 들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해성사를 보고 싶다고 했다. 그 본당 신자가 아니라 다른 본당 신자인 듯했고, 아무래도 사연이 많은 사람처럼 보였다. 주임신부님은 새 신부인 내가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고해성사를 주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면담실로 그 신자를 데리고 가서 성사를 주게 되었는데, 과연 예상대로 사연이 길었다. 거의 2시간에 걸친 성사를 마치고 나오니 점심때가 다 되었다. 그 신자는 고해성사 보러 올 때 그 침울하고 어두운 표정에서 벗어나, 밝은 얼굴을 하고 날아갈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죄의 굴레와 짐을 벗어버리고 홀가분한 모습으로 떠나가는 그 신자를 보면서 고해성사를 통해 선사되는 용서의 은총에 얼마나 큰 힘이 있는지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일종의 ‘작은 부활’을 경험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죽음의 세력만이 아니라 죄의 세력도 그 예봉(銳鋒)이 꺾였고, 따라서 죄가 극복되어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곳에서는 이미 부활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사제생활의 큰 보람 중의 하나가 바로 고해성사 집전을 통해서 무수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작은 부활’의 목격 증인이 되는 것이다. 말씀을 통한 청년들의 부활 체험 루가 복음 24장 13-35절이 전하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은 자칫하면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잃을 뻔했다. 그들은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이 오랫동안 고대하던 메시아라고 철석같이 믿고 그분께 희망을 걸었다. 그런데 그분이 너무도 허망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크나큰 실망과 좌절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길에서 나그네 한 사람을 만나 그의 깨우침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열리고 뜨거운 감동을 느끼게 된다. 마침내 두 제자는 자신들의 목적지인 엠마오에 도착해서 집에 들어가 그 나그네와 빵을 나눌 때 비로소 눈이 열려 그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알게 된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부활 소식을 전한다. 이렇게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은 부활하신 분을 만나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빵을 나눔으로써 그분께 대한 신앙을 되찾게 된다. 오늘날도 미지근한 신앙생활 또는 아예 냉담상태에 있다가 성서 말씀과 성사를 통해 주님께 대한 신앙을 회복하는 사람들을 보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서울대교구 소속 가톨릭 청년성서모임의 연수 지도를 하면서 말씀과 성사를 통해 신앙이 활성화되는 ‘작은 부활’을 체험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3박 4일 동안의 성서 연수를 통해 적지 않은 청년들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과 유사하게 신앙에 활력을 얻는다. 두 제자들이 자신들의 마음을 붙잡고 있던 실망과 좌절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듯이 연수생들은 그룹 나눔에서 자신들의 마음속에 무겁게 자리 잡고 있는 고민거리를 털어놓고 서로 나누게 된다. 또한 두 제자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때 나그네가 다가와 성서 말씀에 비추어서 그들의 고민거리를 설명해 줄 때 마음이 뜨거워졌듯이, 연수생들은 강의 중에 성서 해설을 들으면서, 공동 기도 시간에 다른 연수생들의 기도를 들으면서, 또는 자신의 고민거리를 하느님 말씀 안에서 다시 생각하면서 마음이 열리고 뜨거워지게 된다. 성서 말씀을 통해 마음이 뜨거워진 두 제자들은 그들과 함께하였던 낯선 나그네가 빵을 나누어 줄 때(루가 복음에서 빵을 나눈다는 것은 성찬례를 암시한다.) 주님을 알아보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서 말씀을 통해 마음이 열린 연수생들도 성찬례를 통해서 주님을 강하게 체험하게 된다. 또한 연수 중에 이루어지는 고해성사를 통해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가깝게 체험하고, 마지막 날 저녁 미사 때, 특히 평소와는 다른 방식으로 나누는 평화의 인사를 통해서 가까이 계시면서 우리의 모든 것을 받아주시는 하느님을 강렬하게 체험하게 된다. 이렇게 강렬한 체험을 하게 된 연수생들 중에서 적지 않은 이들은 자신들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용감하게 본당이나 대학에서 성서 모임 그룹을 조성해서 하느님 말씀을 전한다. 이는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두 제자들이 실망과 고통을 안겨준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 주님의 부활을 선포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겠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이야기는 오늘날도 여기저기에서 계속된다. 나는 가톨릭 청년성서모임의 연수를 통해 이 이야기가 계속되는 것을 보았다. 거기서 미지근한 신앙, 식었던 신앙이 놀랍게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면서 ‘작은 부활’을 거듭 체험한다는 것을 고백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예수님 한 분에게만 일어난 신비한 기적으로 그치지 않는다. 성서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새롭게 변화되었다고 전한다. 제자들은 이 만남을 통해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자아를 얻게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의 부활로, 그리고 오늘 우리의 ‘작은 부활’로 이어진다고 하겠다. ‘작은 부활’을 체험하는 이들은 세상 마지막 날에 있을 궁극적인 부활을 확신 있게 믿고 선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목, 2004년 4월호, 손희송(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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