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6-16>
제 1 편 믿을 교리
이제 가톨릭 교리를 설명하는 세 부분 중에서 첫 번째의 장, 믿을 교리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믿는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꼭 그렇게 여겨서 의심하지 않다’는 것으로 국어사전에서는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우리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전에 나오는 말도 아니고, 우리가 쉽게 쓰는 말도 아니지만, 저는 좀 다르게 해설하려고 합니다. ‘믿는다’ 또는 ‘믿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람의 눈에, 그리고 지금 내 눈에 보이는 형태를 갖추지 않는 것을 가리킬 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내 삶의 한 부분으로 수용할 때, 우리가 그 말을 사용할 것입니다. 누구도 본 적이 없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있다’라고 하는 형태로 제시하지 못해도, 우리 생활에는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세상에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공기가 그 가운데 대표적일 것이고, 사랑과 미움도 그런 한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의 호흡기관은 그 공기 가운데 산소와 몸에 필요한 것을 받아들여 생명이 유지돼 나가는 데 사용합니다. 이렇게 과학으로 분석하고 따질 수 있는 것이 있는데 비해서, 그렇게 과학으로 따질 수는 없지만 우리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다른 것도 있습니다.
사람 사이에 등장하는 믿음[信]이 그 한가지일 것이고, 신앙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이 또 다른 한가지 일 것입니다. 붕우유신(朋友有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교의 도리를 규정하는 (삼강)오륜의 하나, 친구의 도리는 믿음에 있음’이라고 설명합니다. 친구 사이에 주고받는 많은 형태의 것이 있지만, 이 믿음[信]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큰소리치지 않고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훨씬 오래 전부터 이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강조해 왔는지도 모릅니다.
이 믿음의 힘은 대단히 강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이 힘을 이용해서 자기 잇속을 채우려는 사람들 때문에 참으로 좋게 남아있어야 할 믿음의 기초가 흔들립니다. 농작물을 키울 때 농약을 친 것을 ‘무농약’ 또는 ‘저농약’ 제품과 섞어서 비싼 값에 팔면서 자신과 가족이 먹을 것은 따로 경작하는 사람들도 있고, 모든 것을 다 빼내어 줄 것처럼 확신을 주면서 동업하던 사람들이 친구의 재물과 그가 투자한 모든 것을 빼앗아 달아나고, 욕심 때문에 빚이 생기자 잘못된 방법을 동원하여 보험금을 타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도, 우리 사회의 한 바탕을 이루고 있는 이 믿음의 기초를 흔들고 깨는 행동이라고 할 것입니다.
제가 천주교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종교라고 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믿음에 대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이란 눈에 보이지 않으니, 그것을 드러내는 방법은 행동으로 보이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이런 일에 대하여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신약성서의 야고보 서간(2,14-17.24)에 나옵니다. 거기에 나오는 말씀의 일부분을 여러분들에게 읽어 드리겠습니다.
< 나의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람이 믿음만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
이런 힘든 요소를 안고 있는 믿음, 이런 믿음을 어떻게 힘들지 않게 대할 수 있는지 누구나 알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제가 한가지 방법을 제시한다면, 우리의 이성(理性)과 지성(知性)을 동원해서 가 닿을 수 없는 부분은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감히 꿈에서나 생각해보았을 달에 갔다 온 것은 벌써 옛날 일이 돼버렸고, 우주를 날아다닌 괴물이 마치 비행기처럼 착륙하고, 인간의 힘이 동물복제를 해내는 시기까지 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의 지성과 이성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은 존재합니다.
그런 일들에 대한 응답의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렵긴 하지만 그대로 수용(受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천주교의 신앙, 특히 이 믿음에 대한 것은 후자의 경우처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아무리 따지고 확인하려고 해봐야 형태도 없죠, 눈에 잡히는 근거도 없죠. 누구도 내가 사물을 대하듯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이 믿음의 요소에 대한 것입니다.
2. 천주(天主= 하느님) (13항-21항)
천주, 하느님은 인간의 오관(五官)으로 체득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체득할 수 없다고 해서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저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강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설프기는 하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이 분을 묘사하는 방법은 몇 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래의 내용들은 가톨릭 교회에서 받아들이는 하느님에 대한 묘사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세상에 사는 사람 누구나 갖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믿는다고 생각하고, 다짐하고 선언했다가도 다음 날 다르게 말하는 것이 바로 믿음에 대한 것입니다. 친구사이의 우정이, 신의가 이익 때문에 자주 바뀌는 이 세상의 모습과 유사하게 설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신(神)이라고 하는 대상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애초에 그렇게 보이지 않는 힘을 고백하면서 그 대상을 인간이 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을 가리켜서 신(神)이라고 했다면, 우리는 그 신을 가리켜서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눈에 보인다는 것은 언젠가 사라질 수 있기에 그럴 것입니다. 제 아무리 엄청난 권력을 가진 사람 또는 사물이라고 하더라도 형태를 갖추면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중국의 진나라 ‘시황제’도 그가 가진 절대권력을 무한정 누리고싶어 불로초를 찾아 나서게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던 사실이 그 한가지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톨릭의 신앙에서는 하느님을 ‘신’이라 부르고 그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여러분들은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만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아닐 것입니다. 과학으로도 엄연히 그 존재를 알아낼 수 있는 요소들조차도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습니다. 우리 몸 안에 있는 장기(臟器)들이 그 중 하나입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상호 작용해서 우리를 움직이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또 우리의 손바닥에는 얼마나 많은 세균들이 사는지 아십니까? 조그만 차 수저로 살짝 하기만 긁기만 해도 거기에는 몇백만 마리, 몇천만 마리의 세균들이 셈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산다고 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저도 제 눈으로 그 녀석들을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녀석들 때문에 어느 정도는 도움과 영향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없으면 우리가 건강하게 살기 힘든 세균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월권(越權)입니다.
13. 천주[하느님]는 누구십니까? : <답> 천주께서는 만선(萬善)만덕(萬德)을 갖추신 순전한 신(神)이시며, 만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
천주(天主)라고 하는 말은 하늘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땅과 연관을 가져야만 의미 있는 것이므로, 결국 이 질문은 우주의 창조주에 대해서 묻는 질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약성서에서는 이 하느님의 이름을 ‘야훼(Jahweh)’라고 불렀습니다. 아니, 출애굽기 3장에서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실천할 대상으로 모세를 택하면서 당신의 이름을 그렇게 알려줍니다. 그 이름의 뜻은 ‘나는 곧 나다’ 이어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너희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알려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하느님의 이름을 경외심 때문에 글자로는 ‘야훼’라고 써 놓고서도, 그 글자를 소리내어 읽을 때는 ‘아도나이<Adonai, 主>라고 바꾸어 불렀습니다.
만선만덕이라는 말은 철학 용어로 ‘무한한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완전할 수 있는 대로 완전하여 아무런 제한도 없다는 뜻이 이 말입니다. 또한 ‘순전한 신’이라는 말의 의미는 지능과 의지를 가진 무형(無形)한 실체(實體)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물질적이지 않다는 말은 물질이 갖는 특성 즉 ‘타성적이고 파괴되고 변화되고 분해되며 무능하고 불완전한 요소’가 없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특별한 일을 해주신 분을 만물을 있게 하신 제 1 원인 창조주로 고백합니다. 하느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내용은 구약성서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옵니다. 창세기 1장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다음에 당신의 뜻을 이 세상에 실행할 자로서 사람을 만드는 이야기를 적고 있는데 비해서, 창세기 2장에서는 먼저 인간이 창조되고 그 인간을 위하여 세상 만물이 조성된 순서로 적고 있습니다.
사람을 포함한, 세상 만물의 창조주라고 하느님의 역할을 고백하는 것은 우라가 그저 쉽게 넘길 수 있는 요소는 아닙니다. 세상만물의 시작이 가능하도록 하신 분이라고 우리가 고백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14. 천주[하느님]께서는 영원하십니까? : <답> 천주께서는 영원(永遠)하시어, 시작도 마침도 변하심도 없으십니다. |
영원하지도 않은, 자신의 온전한 정신만으로는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은 ‘영원’에 대한 것을 질문합니다. 사실은 이런 사항을 질문하는 것 자체가 쓸 데 없는 힘의 낭비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느님의 속성의 하나인 ‘영원’에 대해서 질문하고 어떤 방식으로든지 규정(規定)하고 제한(制限)하면 인간이 위대해지는 줄 알고 사람은 그렇게 질문합니다. 영원하지 않은 인간의 입장에서 영원을 질문하고 그 내용을 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영원(永遠)이라는 말은 사람의 인식과 지식수준에서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의 세계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기껏 생각할 수 있는 말이라면, ‘우리가 느끼는 한계보다도 그 삶의 길이가 훨씬 더 길다는 것 정도’입니다.
영원이라는 말의 의미는 ‘시작도 마침도 없다,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미래를 향하여 한없이 계속된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존재에 대하여 인간의 표현으로 한 것 한 가지, 구약성서 시편 90,4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정녕 천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때와도 같사옵니다.” 사람에게는 엄청날 수 있는 이 세월을 이런 표현을 사용하여 하느님을 묘사할 줄 안다면, 그 하느님은 실제로 사람의 생각을 적용하여 표현할 수 있는 분은 아니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사람이 영원하신 하느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알아, 높으신 분의 뜻을 더 잘 이루려고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인식수준에서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말을 체득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세계를 넘는 것으로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정도로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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