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7-14>
다음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은혜 또는 은총에 대한 것입니다. 은총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보이는 인간에게 어떠한 방법으로 당신 사랑의 열매를 주시겠습니까? 모르긴 해도 그것은 보이지 않는 방법일 것이고, 하느님을 향하여 제대로 마음을 연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형태일 것입니다. 그 은총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눕니다. 함께 읽어보시죠.
38. (문) 천주 원조(元祖)에게 주신 초성(超性)은혜는 무엇이뇨?
(답) 천주 원조에게 주신 초성은혜는 은총과 성덕(聖德)이니 이로 인하여 저들이 천당 영복을 누릴 자격을 얻게 되니라.
39. (문) 천주 원조(元祖)에게 주신 과성(過性)은혜는 무엇이뇨?
(답) 이 은혜는 사욕(邪慾)편정(偏情)이 없고 지혜가 밝고 고통이 없고 죽지 아니하는 은혜니라.
40.(문) 천주 이런 은혜를 원조에게만 주시뇨?
(답) 그렇지 아니하니, 인류의 시조(始祖)되는 아담으로써 전 인류에게까지 전하여 주시고자 하셨느니라. |
은총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고,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받을 수 있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은총의 주도권은 하느님에게 있는 것이지,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다만,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실천하력고 노력한다면, 그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생활에 가까이 갈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총이란 계시의 영역에 속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돌이켜보고 신앙으로, 믿음으로 그 내용을 고백한 사람들은 은총을 구별합니다. ‘초성은혜’ 즉 ‘인간의 본성을 초월하는 은혜’와 ‘과성은혜’ 즉 인간에게 본래부터 부족한 요소라서 여러 가지로 상처받고 변형될 수 있지만 이 은혜로써 그 잘못된 방향으로는 덜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가리킵니다. 이 은혜를 우리가 구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최초의 인류에게 이 모든 힘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1,28에 고백하는 믿음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사물의 관리를 인간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인간에게 그만한 능력과 힘이 있다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의 그 믿음을 지속하여 간직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제약의 굴레에 얽어맵니다.
다음, 41항부터는 최초의 인간이 행했던 행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41. (문) 천주 낙원에서 원조의 충성을 어떻게 시험하시뇨?
(답) 천주 지선악수(知善惡樹) 실과를 먹지 말라는 계명으로써 시험하시느니라.
42. (문) 원조 주의 계명을 지켰느뇨?
(답) 원조 주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마귀 유인에 빠져 금한 실과를 먹음으로 교만한 죄와 순명(順命)치 아니한 죄를 범하였느니라.
43. (문) 천주 원조를 어떻게 벌하시뇨?
(답) 천주 원조에게 주신 초성은혜와 과성은혜를 도로 거두시고 저들을 낙원에서 내치사 마귀 지배에 버려두시느니라. |
세상에는 권리가 많으면 의무도 그만큼 많이 따라 붙습니다. 그러나 같은 세상을 살면서 권력은 누리려고 하고, 의무는 몰라라 하는 일들이 생기기에 세상은 혼란스러워지는 것입니다. 국민의 세금을 도둑질 해 먹은 사람중의 하나가 자기들 끼리끼리 모여있는 곳(=국회)에서 투표하고, 구속을 면하게 되었다고 환호하는 모습을 보신 일들이 있으시지요? 인간은 그런 것입니다. 자신들의 위치가 머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부터 그런 식으로 움직입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서 또 우리의 일꾼으로 뽑아야 합니다. 악순환의 연속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한다면, 세상에 오래 산다는 것 그것이 슬픔의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을 우리가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을 ‘자유의지(自由意志)’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자유에는 항상 책임이 따라 붙습니다.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자유는 제약받을 수밖에 없고, 그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입니다. 자유의지라는 말을 쓸 때에는 책임도 제대로 감당할 줄 아는 경우를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이제 이 세상에 악한 힘이 어떤 방법으로 들어왔는지를 살피는 차례입니다. 좋은 것이 드러나려면, 나쁜 것이 주변에 있어야 더 빛을 낼 수 있기도 합니다만, 최초의 인간으로 등장하는 아담과 하와가 범한 죄악 때문에 인류는 기나긴 슬픔의 길로 갑니다. 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최초의 사과<malum, I. n. 악, 불행, 결점 또는 능금, 사과>사건이라고도 합니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인류에게 악이 함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줍니다. 보통 문제가 아니죠.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였기에 하느님께 직접 일치할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은혜와 은총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교리에서는 가르칩니다. 그렇게 인간은 스스로 악의 길을 찾아들어가 그 안에 순종하면서 자유를 느끼고 산다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이것저것***)을 하지 말라고 하면, 그 말이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불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다른 설명을 하자면 이렇습니다. 세상 만사 모든 일의 한가지 한가지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일을 설명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덩치 크게 하지 말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시간도 절약되고 여러 면에서 유익합니다.
신약성경 로마서에, ‘인간이 스스로 똑똑한 체 함으로써 불멸의 하느님을 섬기는 대신 썩어 없어질 인간이나 새나 짐승이나 뱀 따위의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1,22-23), 인간이 하느님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올바른 판단력을 잃고 해서는 안될 일을 하게 내버려두셨다(1,28)’고 했습니다. 수많은 세월을 그런 바탕에서 지내왔기 때문에 인간이 악(惡)에서 다시 돌아선다는 것은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이제 악에서 돌아서는 방법을 찾아보기 위해서, 최초의 악에 대한 이야기로 진행하겠습니다.
6. 원죄(原罪) (44항-49항)
이제는 인간의 역사에서 말하기가 그 중 힘들고 어려운, 그리고 부담스러운 문제로 갈 차례입니다. 이 세상에 죄악이 생긴 원인에 대해서 교회는 어떻게 이야기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야기가 그 원인에 대한 것을 말하는 데서 끝나는 것은 아니고, 그 해결방안까지도 다뤄야 할 순서입니다. 그 내용은 죄에 대한 것입니다. 그 가운데 처음 다루는 이 원죄(原罪)는 내가 범한 죄도 아니고, 내가 범할 의지도 없었고, 나는 참여하고 싶었다고 말할 수 있는 죄에 대한 것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죄에 대한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원죄는 사람들 안에 있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 악(惡)으로 기울어질 수 있는 인간의 성향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는 순서입니다. 함께 읽죠.
44. (문) 아담의 죄와 그 벌이 후손에게 미치지 아니하였느뇨?
(답) 아담의 죄와 그 벌이 대대손손에게까지 미쳐 내려오느니라.
45. (문) 아담이 끼쳐준 죄를 무슨 죄라 하느뇨?
(답) 원죄(原罪)라 하느니라. |
성경에 나오는 원죄의 모습은 하느님의 명(命)을 어긴 것으로 우리의 본성에 달라붙은 죄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만드신 에덴 동산을 최초의 인간인 아담에게 다스리게 하셨습니다(창세기 2,15). 그러면서 그 동산 한 가운데에 있는 나무에 대해서 보통과는 다른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기 2,16-17).
“왜 먹지도 못하게 하는 나무를 동산에 만드셨을까?” 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질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나무를 만들고 열매를 달리게 해놓고, 사람이 그 명령을 지키는가, 지키지 않는가 노려보려고 했던 하느님이 참으로 못됐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과 응답은지금 세상에 사는 우리가 하는 소리일뿐입니다. 아담은 그런 불만 섞인 질문을 하느님을 향하여 하지도 않았고, 하느님의 명령을 그대로 수용합니다. 처음에는 말이죠. 왜 아담은 우리가 요즘 할 수 있는 것처럼 하느님을 향하여 항의하지 않았을까요? 성경에서 우리가 아담의 말과 생각을 읽어볼 수는 없으니,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는 것은 우리가 추측할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아담과 같은 입장이었더라면, 하느님을 향하여 어떻게 질문하거나 항변하시겠습니다. 왜 그렇게 인간을 불완전하게 만들었는지 탓하고 따지겠습니까?
우리의 응답은 뒤로 접어두고, 하느님의 슬픔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기껏 세상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제대로 다스리라고 능력을 주어 파견했더니, 알량한 자유의지로 내 속마음을 후벼 파? 이런 인간을 세상에 그냥 놔두고, 내가 창조한 사물들을 다스리도록 내버려둬?”하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생각을 적용한다면, 그냥 놔둘 수가 없죠. 그러나 참으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흙으로 만든 그릇에 해당하는 인간을 통하여 그래도 뭔가 하실 일이 있으셨기에 그러셨을 것입니다.
신약성경 고린토 후서 4장 6절과 7절에 보면,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 같은 신약성경 로마서 9,19-21에 보면, ‘이제 그대는,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왜 사람을 여전히 책망하십니까? 사실 누가 그분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을 것입니다. 아, 인간이여! 하느님께 말대답을 하는 그대는 정녕 누구인가? 작품이 제작자에게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소?”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또는, 옹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한 덩이는 귀한 데 쓰는 그릇으로, 한 덩이는 천한 데 쓰는 그릇으로 만들 권한이 없습니까?’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지도 못했던 세상 최초의 인간들이 저질렀다는 ‘원죄(原罪)’에 대하여 우리가 왈가왈부하며 슬퍼하기보다는 우리 모습, 우리 삶에 남아있는 그 찌꺼기들을 어떻게 하면, 치워낼 수 있는지를 살피고, 그 과정을 실천하는 것이 것이 오히려 합당한 순서가 될 것입니다.
이어지는 항목은 이 원죄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내용에 대한 것입니다. 읽어보겠습니다.
46. (문) 모든 사람이 다 모태에서부터 원죄가 있느뇨?
(답) 성모 마리아 외에는 모든 사람이 다 모태에서부터 원죄가 있느니라.
47. (문) 마리아는 어떻게 원죄에 물듦이 없이 잉태되시뇨?
(답) 마리아는 천주의 특별한 은혜로 예수의 공로를 미리 입으사 원죄에 물듦이 없이 잉태되시느니라.
48. (문) 마리아의 이 특별한 은혜를 무엇이라 하느뇨?
(답) 무염시태(無染始胎)라 하느니라.
49. (문) 천주 인류를 원죄 중에 그저 버려두시뇨?
(답) 그렇지 아니하니 천주 무한하신 자비로 즉시 구세주를 허락하시고 후에 과연 보내시니라. |
첫 번째 항목은 교회의 신앙이요, 믿음입니다. 신앙과 믿음은 논리(論理)로 해설할 수 없습니다. 애초에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생활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을 가리켜서 ‘원죄’요 그 찌꺼기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그것에서 탈출 할 수 있는 방법은 다음에 나오는 구세주에 대한 내용으로 설명할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라는 여인에 대해 처음 언급하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에는 ‘마리아’라는 이름이 참으로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남산에서 돌 10개 던지면, 몇 개는 어느 성씨(姓氏)가 맞을 거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처지입니다. 많고 많은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들 가운데,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인간으로서 참여한 특정한 여인을 가리켜 우리가 ‘성모 마리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하느님의 업적에 참여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신약성서 루가복음 1장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소설과 같은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천사가 찾아왔고,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갖게 될 것이라 전하고, 고민하다가 받아들이고, 천사는 돌아가고..... 이 과정을 기도문으로 바꾼 것이 ‘성모송’입니다. 시작기도 시간은 아닙니다만, 함께 하시지요....
이 여인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몸을 취하시어 태어나실 때, 그 바탕이 된 분이십니다. 하느님을 모셔들이기에 합당(合當)해야 했으니, 바로 거기에 교회의 신앙은 보통의 인간들처럼 ‘원죄에 물들지 않고 태어나셨다’라는 믿음을 더하여 그에 대해서 특별한 삶의 자세를 가진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인간으로서도 귀한 것과 덜 귀한 것을 구별합니다. 다른 사람의 사진은 귀중하게 여기지 않아도, 부모님의 사진이라면 우리가 갖는 마음자세는 달라집니다. 그리고 그 사진에 대하여 누군가 모독한다면, 우리는 흥분합니다. (2006년 월드컵에서, 프랑스 사람인 지네딘 지단이 이탈리아 선수 마테리치를 박치기로 들이박아서 쫓겨났지요? 그 원인도 그것중의 하나라는 소리가 나왔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진이란 똑같이 종이에 옮겨놓은 그림에 불과한 건데...라고 말하면.....‘무식하기는....왜 그렇게도 몰라.....’라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은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것입니다.
이 여인의 순종을 통해서 하느님이 원하신 것은 무엇일까? 바로 인류의 구원사업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역할을 인간세계에 하신 ‘그리스도’를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낳게됩니다. 역사학자들은 이 예수는 기원전 4년경에 태어나서 기원 후 30년 4월 7일에 이 세상을 떠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분을 통하여 세상의 창조주요, 최고 관리자로서 우리가 굳이 구별하자면 성부로 부르는 하느님이 의도하신 구원 사업을 수행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업적은, 최초의 인간들이 자유의지를 행사하여 하느님의 뜻을 거슬려 멸망의 길로 나아갔던 것에 비해서,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순종으로서 하느님의 아프신 마음을 위로해 드린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같은 원칙이 적용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길 터인데, 우리 신앙에서는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참여한 인간인, 마리아에 대해서 달리 말합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은 사람이 마리아였다고 말입니다. 그녀에게 주어졌던 은총 가운데 오늘 말하는 내용은 ‘무염시태’입니다. 마리아가 그의 부모(=안나와 요아킴)의 가정에 잉태될 때부터 특별한 은총 가운데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인류의 구원사업은 하느님의 뜻을 담아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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