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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비자교리.....2006.8.11.
작성자이철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9-08 조회수3,400 추천수0
 

                                               <2006-08-11>

다음은 사람으로 나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고백의 내용입니다.  54항과 55항입니다.

54. (문) 천주 성자 사람이 되신 후는 천주 아니시뇨?

   (답) 천주 성자 강생하실 때에 천주성을 버리지 아니하셨으니 사람이 되신 후에도 천주시니라.

55. (문) 예수그리스도께 몇 가지 성(性)과 위(位)가 있느뇨?

   (답) 예수그리스도께 성으로는 천주성과 인성(人性) 두 가지가 있고, 위로는 다만 천주 성자위 하나뿐이니라.


인간으로 나신 예수그리스도는 하느님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그렇게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예수그리스도가 정말로 하느님이신지, 그 사실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의 삼에서 눈으로 본다는 것이 꼭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말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결합이 아니라, 하느님이 힘이 인간에게 오시어 그 분이 태어나시게 된 과정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일, 태어나셔서 하느님으로 놀랍게 활동하신 일,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시면서도 모든 것을 철저하게 하느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활동하신 분이라는 의미에서 하느님이요, 천주(天主)라고 믿음을 고백합니다.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께 순종했다면, 그가 하느님은 아니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나올 수 있을 법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인간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인간으로 살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질문과 응답의 한계입니다. 


인간 행동의 효과는 그다지 오래가지 않습니다.  아주 특별한 일들이 아니라면, 50년 100년이 넘는 효력을 갖지 못합니다.  놀라운 효과를 만들어내는 특허권도 사안(事案)에 따라서 20년을 인정해주거나, 50년을 인정하거나 하는 정도입니다.  그것이 인간이 하는 일들의 결과요, 영향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일의 효과는 그 한계를 넘습니다.  인간으로는 나셨지만, 순전히 인간만이 아니라 동시에 하느님이기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보여주신 좋은 일의 결과와 영향은 물론 그 분이 보여주신 인간 구속의 결과와 영향은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하신 일이 아니라, 하느님으로서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마리아를 통하여 육신을 취하신 하느님, 성자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서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알려주셨는데, 그 일은 2000년전에 한번 반짝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구별하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좀 더 잘 알아듣기 위한 수단입니다.  남성 한 사람을 때로는 아버지요, 아들이요, 직장의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시는 사람으로 구분하여 말하거나, 여성 한 사람을 며느리요 딸이요, 어머니로 구별하는 것과 다를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간단하게 구별해야 더 잘 알아듣지 않을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하느님이면서, 우리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구별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에서는 이 세 위격(persona)을 한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위격이라고 표현하는 것의 의미는 ‘사람으로서 하는 역할에 비교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렇게 밖에는 설명할 수없다고 할 때, 믿음이요, 신앙고백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래서 이런 내용에 맞춰 신학에서도 하느님을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관리하는 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실 때는 ‘성부이신 하느님’으로, 인간을 위하여 인간으로 나셨다가 그 인간이 구원의 길로 나아갈수록 활동하신 분을 가리켜서 ‘성자이신 하느님’으로, 교회를 통하여 지금도 당신의 교회를 유지 발전시키는 힘으로 나타나실 때는 ‘성령이신 하느님’으로 구별합니다.  그러나 이런 구별은 인간이 알아듣기 위한 수단으로서 구별하는 것이지, 인간으로서 하느님이 이러저러한 분이리고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위 55항은 성자에 대하여 적용되는 내용을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하느님으로서의 성격’과 ‘인간으로서의 성격’이 공존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천주성과 인성이 함께 있는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성격은 서로를 제한하지도 않고, 조화가 있다는 말밖에는 따로 할 것이 없습니다.  어디까지가 하느님의 성질이고, 어디부터가 인간의 성격인지를 구별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인간에게 알려주셨고, 기적을 행하셨고, 그분이 십자가의 고통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셨고,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는 것은 하느님으로서 하신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외의 다른 일들은 인간으로서의 성격이 드러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설명도 어디까지나 우리가 이해하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인간으로 보이신 모습의 특성을 요한복음서 11장 35절의<나자로 이야기:(신약 238면)>에서 눈물을 흘리신 모습도 있고, 부활하신 분이 먹을 것을 찾는 모습(루가 24,41:신약 205면)도 있습니다. 부활하신 뒤에도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에서 손과 발을 보여주시는 분(루가 24,39-40: 신약 205면)으로 보여주기도 하십니다.  또한 하느님의 성격을 보이시는 부분으로서는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부활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역할을 구별하여 말할 때, 제 2 위(位), 성자라고 믿음을 고백하기도 합니다.


다음의 56항, 57항, 58항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함께 먼저 읽겠습니다.

56. (문) 마리아 천주의 참 모친이시뇨?

   (답) 인성(人性)으로 마리아께 나신 예수가 참천주이시니, 마리아는 천주의 참 모친이시니라.

57. (문) 성모 마리아 평생 동정녀시뇨?

   (답) 성모 마리아는 종신토록 참 동정녀시니라.

58. (문) 성 요셉은 예수의 참 아버지시뇨?

   (답) 성 요셉이 예수를 낳은 아버지는 아니요, 오직 성모의 참 정배(淨配)로서 예수를 보호하고 기르신 아버지시니라.


예수님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으로 태어나셨지만 하느님의 성격도 갖추신 분입니다.  그렇게 두 가지 표현중에서 특별히 언급하는 것을 말하라면, 하느님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으로 성격을 갖추신 분이고, 그분이 마리아를 통하여 나셨기에 우리는 마리아를 가리켜 ‘천주의 모친,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聖母)’라는 말을 씁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를 기르신 아버지 요셉을 가리켜서는 ‘천주의 아버지’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기르신 아버지(=양부)라고는 합니다.

동정녀(=童貞: 이성과 아직 접촉이 없음 또는 그런 사람, 숫처녀, // 童貞女: 결혼하지 않은 여자로서 종교적 목적을 위해 동정을 지키는 사람)로 마리아를 고백하는 의미는 앞서 설명했습니다.  이것은 마리아 자신을 위한 것보다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우리를 위한 신앙의 내용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의 아버지에 대한 내용을 교회에서 이야기할 때는 기르신[養] 아버지(養父)라고 합니다.  우리말의 표현만 생각하면, 흥분하기 쉬운 일이기는 합니다만, 요셉에 대해서 그렇게 부릅니다.  그 요셉이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과정에서 고민한 이야기가 마태오복음 1,18-25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경위는 이러하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을 하고 같이 살기 전에 잉태한 것이 드러났다. 그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낼 생각도 없었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다. 요셉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에 주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서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어라. 그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 하고 일러주었다. 이 모든 일로써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는 뜻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의 천사가 일러 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였다. 그러나 아들을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고 지내다가 마리아가 아들을 낳자 그 아기를 예수라고 불렀다. >


이런 요셉의 행동을 보고 줏대 없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는 인간의 입장만을 중시한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이런 역할을 담당했던 요셉의 인간적인 불만은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가 하느님의 뜻을 충분히 알아들었고, 그대로 따른 결과라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이 그것입니다.


우리 사람 세계에 자녀가 태어날 때, 분명 어머니요 여인이 그 아기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아기를 낳았다’는 표현을 씁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 아니라, 계승줄기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먼저 성(性)부터 아버지를 따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말이죠.  (여성의 성을 따를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었으니,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다윗의 후손이 될 수 있도록 역할을 담당했던 요셉에게 주어진 이름이란, ‘예수를 기르신 아버지’일 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르신 아버지 요셉의 이름이 거명된 곳은 처음 태어날 때에 고민하던 부분과 아기가 태어난 일과 관련된 부분,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에집트로 피신하고 다시 돌아온 것 정도이고, 루가복음에는 한 곳이 더 나옵니다.  예수님의 나이 12살 때에 성년식(成年式)을 위하여 성전에 갔다가 길을 잃었고 다시 찾았을 때 암시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제 2 절 구속(救贖)  

이제,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내용은 인간으로 나신 하느님, 우리 사람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신 ‘예수님의 활동내용과 그 목적에 대한 것’입니다.  물론 이 내용에도 ‘하느님이나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이었느냐고 구체적으로 묻고 그 질문에 따른 응답을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사람의 입장에서 하느님과 예수님의 행동을 해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목적없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나 혼자만의 편리와 기쁨을 위하더라도, 그것은 분명 목적이 있는 행동입니다.  지난 시간에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때, 하느님이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인간을 구원하신 목적은 사후(事後)봉사(奉仕), 영어로 이야기하면 ‘After Service'차원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애프터서비스’를 해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판단한다면, 그 ‘애프터 서비스 행동’이 그에게 경제적 이익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훗날을 위해서라도 해야하고 또 당연히 그렇게 하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경험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사람이 만든 기계나 제품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는데, 하물며 하느님이야말로 인간과 세상 만물을 만들어놓으시고, 그 사물이 올바른 길로 나아가기를 바라셨다면, 그렇게 하셨을 거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입장에서 해석한 소리입니다.  


본론으로 갑니다. 시작하면서 말씀드린 내용과 중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만, 59번 항은 하느님의 아들로써 성자가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신 목적에 대한 것입니다. 

59. (문) 천주 성자 무엇을 위하여 강생(降生)하시뇨?

   (답) 천주 성자 우리를 사랑하사 구속(救贖)코자 하심이니, 우리 죄를 대신 보속하시고, 우리를 마귀 지배에서 속량(贖良)하시고, 당신 교훈과 표양으로 우리에게 구령(救靈)의 길을 가르치기 위하심이니라.


강생(降生)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어 이 세상에 태어나셨다는 뜻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하느님의 아들은 기원전 4년경,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다스리던 때, 그가 명령을 내린 인구조사를 할 때 세상에 태어나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조상의 뿌리에 대한 기억은 중요했는가 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은 예수님을 기르신 아버지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었고, 다윗은 베들레헴 출신이었으므로 아기를 가진 마리아와 그 마리아의 남편이 된 요셉은 베들레헴으로 호적신고를 하러갑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아들을 낳게 됩니다.  하지만, 짧은 기간에 로마제국 황제이 호구조사 명령으로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모였으니, 요셉과 마리아가 숙소로 정한 곳은 말과 소가 머무는 외양간이었습니다. 


예수님 탄생의 목적을 ‘인간의 죄를 보속하고, 악의 지배에서 값을 치뤄 구해내시고, 우리를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은 신앙고백(信仰告白)입니다.  세상의 처음부터 하느님은 모든 것을 계산하시고 모든 것이 돌아갈 순서를 꿰고 계셨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우리사람들이 알아듣는 언어로 표현해 주신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과거로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던 예언자들의 소리를 정리하고, 그 말을 따라 살던 사람들의 변화된 생활을 통하여 정리한 믿음이라고 생각하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값을 치루신 방법은 목숨, 즉 생명을 바치는 일이었습니다.  돈으로 계산하는 요즘시대와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역할을 가리켜 미사 때에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에 하느님은 목자로 비유되어 나타납니다.  목자의 사명은 양들을 보호하고, 맛있는 풀이 있는 곳과 물가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가리켜 목자가 하는 그러한 사명을 띠고 오신 분이 양이라고 고백합니다. 


신약성경 마태오복음서 25장 최후의 심판 이야기에 보면, 하느님에게서 옳은 사람으로 판단된 사람들은 양으로, 옳지 못한 사람으로 판단된 사람들은 염소로 비유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또한 구약성서 레위기 16장에 보면, 사람들이 지은 죄를 대신 지고 광야로 쫓겨가 죽음으로써 그 사람들이 지은 죄를 없애주는 염소 이야기가 있습니다.  구약성경과와 신약성경에 나오는 같은 소재가 어떤 의미변화를 겪었는지 말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만, 예수님을 가리켜서 ‘어린양’이라고 부르는 것은 목숨을 바쳐 인간의 죄를 없애주신 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어린양으로 오신 분이 사람들의 삶에서 죄를 없애시고, 악으로 기울기 쉬워하는 세상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악의 으뜸이요, 괴수인 악마에게서 구해내시고, 당신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도록 권고하심으로써, 사람들이 악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하나되는 유일한 통로인 영혼이 구원의 길로 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러 오신 분이 바로, 성자 예수그리스도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예수님이 이 일을 하러 오신 것은 분명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 초대를 따랐느냐 하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다음 항목은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행위에 대한 요약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60. (문) 예수 어떻게 우리를 구속하시뇨?

   (답) 고난을 즐겨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하시니라.


이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면서 우리는 해야 할 일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다른 사람들의 좋은 행동을 보고 감탄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칭찬하는 일에서 끝내고만다면,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좀 더 나은 신앙인으로 성장하고 자라려면 그것 말고 다른 입장의 일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모든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인간에게는 그럴만한 자유가 있다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항상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는 욕심이 생기고, 불화가 생기고, 다툼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생명까지도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하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구원자로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의 방법, 삶의 철학은 닥쳐오지 않은 고통을 찾아가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결국에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로마 국가의 반역죄인들에게 내리는 십자가 형벌’의 죄수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으로 끝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일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죽음’으로 끝내고 만 일이었더라면,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희망은 아무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다음 항목인 61항과 62항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한 내용입니다.

61. (문) 예수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심은 천주성으로 하시뇨 혹 인성으로 하시뇨?

   (답) 예수 다만 인성으로 고난을 받아 죽으셨으나 예수 또한 천주신고로 그 미소한 고난이라도 무한한 가치가 있느니라.

62. (문) 미소한 고난이 무한한 가치가 있으면 예수 어찌하혀 혹독한 고난과 죽음을 받으시뇨?

   (답) 이는 천주의 공의(公儀)를 원만히 채우시고, 당신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고, 우리에게 죄를 미워하고 온갖 고통을 받는 용력(勇力)을 더으기 위하심이니라.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의미와 목적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살더라도 그것은 변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기쁨과 행복을 다른 사람이 나 대신 누리고 살기를 바라지 않을 것처럼, 그 기쁨과 행복을 내 삶에 불러들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힘겨운 일들도 겪어야 합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지금 당장은 우리가 바라지 않고 싶은 것이겠지만, 내 삶에 다가오는 입맛이 쓴 것들을 올바른 마음과 자세로 극복했을 때 달고 맛있는 결실이 온다는 뜻으로, 현실에서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야만 하는지를 알려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지요?


예수님의 삶을 다루는 61항은 ‘그분이 겪으신 고통과 죽음의 주체’에 대한 것입니다. 배고픔을 느끼고 울고 슬퍼하고, 수난의 고통을 겪은 것은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동시에 하느님이셨기에 같은 역할을 하느님도 하셨다는 믿음의 고백이 바로 교리의 내용입니다.  (성부수난설이 나오는 말도 이런 일에서 나올 것이다-여기서는 언급하지 않을 내용임)  우리 몸에 손가락이 아프면 온 몸이 아프고, 다리가 한쪽이라도 구비되어 있지 않으면 듣기 싫은 소리로 ‘병신’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내게 부족하고 빠진 것은 한 가지 지체이지만, 전체의 의미에서 볼 때 그렇게 부족한 것의 빈자리와 그가 해야 할 역할이 더 커진다는 소리도 될 것입니다.  그런 때에 사람은 제대로 된 기능을 하는 다른 지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대로 현실적으로 사라진 지체(肢體)의 기능을 강조합니다.  이러하다면 시각이 잘못된 것이겠지요?


교회 초창기의 역사의 한때는 이 고통을 받은 주체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가현설> 또는 <성부 수난설>등의 이론이 그것입니다. 지금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남아있지는 않습니다. 없어지게 된 원인은 <가톨릭 교회의 교리를 잘못 해석하고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난 적이 없고 그를 따랐던 사람들이 만들어냈던 가공(加工)인물이라는 것이 <가현설>이론이고, 성자이신 분도, 성부이신 분도 같은 분이라고 했으니 성자가 겪은 수난의 일은 결국 성부가 겪은 것이라고 주장하던 이론이 후자의 이론입니다.  - 설명삭제


사람들은 고통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은 오래 살고 싶어합니다. 좋은 일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했던 몇 가지 좋은 일들의 효과는 영원히 가기를 바랍니다. 그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껏해야 100년 이상의 시간을 내 정신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갖는 욕망도 그러하다면, 사람의 인식수준을 넘어서 영원히 사시는 하느님이 인류를 위해서 하신 일의 효과는 사람이 흔히 생각하는 수준을 넘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보이신 일의 효과는 영원히 간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좋은 일의 결과는 그저 하늘에서 만들어져서 뚝 떨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다른 사람이 거둔 일의 성공에 대해서는 그렇게 바라보고 생각하고, 그래서 시샘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세상일에는 같은 법칙이 적용됩니다.  기본으로 준비되는 요소의 정도 차이에 따라서, 약간씩 차이가 나긴 합니다만, 성공을 바란다면 열심히 해야 합니다.  62항에 기록된 것처럼, 하느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한 고통을 예수님에게 허락하시고 그 고통을 극복하게 하신 것도 우리가 바라고 생각하는 차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인간으로 오셔서 그 모든 고난을 가볍게 뛰어넘으실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을 그대로 채우신 이유는 같은 입장에 처했을 때 우리도 그 같은 본보기를 보일 수 있도록 하라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겪는 고통이나 곤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가오는 어려움을 피할 수도 있고, 도망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도 있습니다.  자갈돌을 피하려다가 바윗돌을 만난다.  호미로 막을 일도 가래로 막게 된다는 표현을 생각한다면, 사람이 피하고 도망치는 것이 최고의 수단은 아닐 것입니다.  힘겨워도 부딪히고 나가야 할 것도 분명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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