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54) 공공재 민영화하면 국민이 행복해질까
누구를 위한 공공재 민영화인가?
필자가 사는 동네 골목에는 미용실과 슈퍼, 편의점과 작은 교회가 참 많다. 가게든 교회든 닫힌 채로 혹은 오랫동안 빈 채로 남아있거나, 내부 수리를 하고 주인이 바뀌는 경우가 빈번하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힘들게 견디다 마침내 "장사가 너무 안 돼 가게를 접었다"는 소문을 듣곤 한다. 그 가족들은 얼마나 힘들게 지낼까 하는 생각에 안타깝다.
심각한 불균형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시늉만 내고, 경기가 좋지 않다며 '양극화'(소수의 부의 집중과 다수의 빈곤화)뿐만 아니라 '빈곤의 대물림'을 당연히 여기도록 세뇌하는 사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화가 난다. 경제적으로 힘든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품위 있는 생활이 사치가 되고, 말 그대로 '생존' 그 자체마저 위협받는다. 그리고 사회 일부 지도자들은 생존을 위협받는 이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불의ㆍ불법ㆍ탈법을 '인재'로서의 필수과목쯤으로 여긴다.
공공부문은 사회 구성원 모두의 것
아무리 경제 분야의 자유가 성장과 효율을 가져다준다고 하더라도, 그 성장과 효율은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모든 경제 사회 생활의 주체이며 중심이고 목적은 인간이기 때문이다"(「간추린 사회교리」 331항). 특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의무로 여기는 교회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한순간도 놓아서는 안 된다. 교회는 분명히 고백한다. "재화의 보편적 목적의 원칙은 가난한 이들, 소외당하는 이들, 어느 모로든 자신의 올바른 성장을 방해하는 생활 조건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아야 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다시 한 번 강력히 확인하여야 한다"(182항).
그런데 지난 몇 년 동안, 그리고 최근에도 무서운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그것도 아주 작은 소리로 말이다. 바로 의료ㆍ철도ㆍ전력ㆍ물 따위의 공공부문을 민영화 혹은 선진화하겠다고, 혹은 경쟁체제를 도입하겠다는 소식이다. 이런 분야를 공공부문이라 부르는 이유는 대중이 소비하는 까닭이다. 어느 특정인은 소비하고, 어떤 사람은 소비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재화가 아니란 뜻이다.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하고, 명절이 되면 도로나 철도를 이용해 친척을 찾아야 하며, 어두우면 전깃불을 밝혀야 한다. 살려면 물을 마셔야 한다. 누구도 예외가 없다.
이런 분야를 시장에서 거래하는 상품으로 만든다면, 사람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의 구매능력 유무가 절대적 가치가 된다. 장사가 너무 안돼 가게를 접은 이들과 그 가족들은 치료비가 비싸면 아파도 병원에 가지 말아야 하나. 통행료나 철도요금이 너무 비싸면 친척을 찾지 말아야 하나! 가스나 전기요금이 비싸면 추워도 떨며 지내야 하나. 만일 그렇다면 "자신의 올바른 성장을 방해하는 생활 조건에서" 살아야 하는 셈이다.
이윤보다 사람이 먼저다
물론 공공부문을 민영화하고 선진화하기 위해 경쟁체제를 도입함으로써 얻는 경제적 효율성에 대해 찬반의 시각이 있다. 전문가들의 충분한 토론이 필요하고, 실제 공공부문을 민영화했던 다른 나라의 사례를 꼼꼼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다. 공공재는 대중이 소비하는 재화이기 때문에 전문가뿐만 아니라 대중의 의사를 묻는 정치적 과정을 통해서만 공급돼야 한다. 지금의 우리 현실에서 충분한 논의와 검토는 고사하고 대중의 민주적 여론 형성 과정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상식으로 따져보더라도 의료ㆍ철도ㆍ전력ㆍ물 따위의 공공부문을 민영화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 상품을 공급하는 쪽에서는 이윤을 남기려 할 것이 불 보듯 뻔한데, 의료ㆍ철도ㆍ전력ㆍ물 따위를 이용하지 않을 사람이 있는가. 아무리 가난해도 빚을 내서라도 구매해야 한다. 대중이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공공재의 비배제성과 비경쟁성이라고 한다. 대가를 치르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그 소비에서 배제해서는 안 된다. 수돗물 대신 마실 것이 없고, 병원 말고 다른 곳에서 치료할 방법이 없다.
그런 공공재를 상품으로 만들어서 시장에서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게 한다면, 이윤을 내겠다는 공급자가 탐욕스럽지 않으리라는 근거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여태까지 자본이 사람을 위해 양심적이며, 이성적이며, 윤리적이었던 적이 믿어도 될 만큼 많았는지 기억을 더듬어 봐야 한다.
[평화신문, 2013년 3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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