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9-29>
다음은 세 번째 계명입니다. 쉬는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달력의 표시에 따라 주일이 주간의 첫날이 되기도 하고 마지막 날이 되기도 합니다. 같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생각이 무엇을 따르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마음자세는 달라집니다. 먼저 122항과 123항을 읽겠습니다.
제 3 절 : 제 3 계명 <삼.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122. (문) 제3계에 명하시는 것은 무엇이뇨?
(답) 제3계에 명하시는 것은 하느님께 공식신공(公式神工)을 드리고 육신 일을 파함으로써 주일을 거룩하게 지냄이니라.
123. (문) 천주교회에서 어찌하여 고교적(古敎的) 토요일을 버리고 일요일을 주일(主日)로 지키느뇨?
(답) 이는 사도들이 예수께 받은 권한으로 이렇게 정하신 까닭이니, 신교와 고교를 구별하고, 또한 신교의 기초되는 예수부활과 성신강림이 일요일에 이루어졌으므로, 이날을 기념하기 위함이니라. |
예전에는 이 계명을 가리켜서 파공(罷工:<罷:중지하다,그만두다> : 주일과 지정된 대축일에 육체노동을 금함)첨례라는 말로 썼습니다. 이 세 번째 계명이 무조건 쉬고 놀라는 의미를 담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때에 6일간에 걸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드시고, 7일째 되는 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창세기2,2)고 합니다. 그 정신을 본받아 일주일에 최소한 한 번씩은 하느님의 업적을 기억하며 그분의 뜻에 우리를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그 날 하루만이라도 신앙의 정신을 돌이키고, 하느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성당에 들러 하느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새로운 한 주간을 지낼 힘을 얻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에서 본래 정한 규정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요즘에 그렇게 신앙의 정신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다르게 봅니다. 한 주간동안 정신없이 움직였으니, 일주일에 한번 쉬는 날 ‘건드리지 말라’고 말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말라’고 합니다. 철저하게 인간중심인 세상으로 바뀐 모습입니다.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니 인간마저 그렇게 바뀌는 것이야 말릴 수 없지만, 안타깝다는 생각은 공통적일 것입니다.
유대교에서는 토요일에 같은 정신을 갖고 쉽니다만, 교회에서는 주일로 그 역할이 바뀌었습니다. 왜 주일(=일요일)로 바뀌었는가? 성경에 나오는 바에 따르면, 주일에는 무덤에 묻히셨던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제자들과 그분을 찾아간 여인들이 발견한 기쁜 날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쉰다고 해서 똑같은 기쁨을 누리는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교회공동체에서 말하는 본래의 정신을 기억하며, 우리 삶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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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계명부터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계명이 시작됩니다. 앞선 3계명까지는 인간이 지켜야 할 일이긴 하지만, 그 정신은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제는 그 방향이 인간에게로 돌아옵니다. 이렇게 인간에게 적용되는 계명들은 인간의 행복과 인간사회를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이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시어 주시는 계명의 정신을 알아듣고 실천한다면,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에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인간사회는 파멸(破滅)을 향하여 달음질치는 경주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주어지는 첫 번째 계명이 제 4 계명입니다. 124항입니다.
나머지 네 번째 계명과 연결되는 130항까지 내용은 읽은 셈치고 내용을 설명합니다.
124. (문) 제4계에 명하시는 것은 무엇이뇨?
(답) 제4계에 명하시는 것은 자녀가 부모에게 할 본분과 또한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할 본분이니라.
125. (문) 자녀가 부모에게 할 본분은 무엇이뇨?
(답) 자녀가 부모에게 할 본분은 효도와 순명함과 그 영육간의 모든 요긴한 사정에 도와드림이니라.
126. (문) 부모가 자녀에게 할 본분은 무엇이뇨?
(답) 부모가 자녀에게 할 본분은, 종교와 수신(修身)에 대한 교육을 충분히 받게 하며, 또한 그들의 생활을 힘대로 주선함이니라.
127. (문) 하인과 품꾼이 주인에게 할 본분은 무엇이뇨?
(답) 하인과 품꾼이 주인에게 할 본분은 주인을 경외하고 그의 정당한 지시를 잘 들음이니라.
128. (문) 주인이 하인과 품꾼에게 할 본분은 무엇이뇨?
(답) 주인이 하인과 품꾼에게 할 본분은 저들에게 정당하게 지시하고 상당한 품삯을 제때에 줌이니라.
129. (문) 국민이 국가에 할 본분은 무엇이뇨?
(답) 국민이 국가에 할 본분은 존경하며 정당한 국법을 지키며 납세함이니라.
130. (문) 신도가 교회에 할 본분은 무엇이뇨?
(답) 신도가 교회에 할 본분은 성직자를 존경하며 또한 그의 생활을 힘대로 도와드림이니라. | 제 4 절 : 제 4 계명 <사.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네 번째 계명은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것입니다. 이 계명을 들으면서 우리는 생각할 것입니다. ‘나는 부모에게 효도하며 살고 있는데, 그 간단한 사실을 갖고 뭘 그리 복잡하게 설명하는가?’라고 말입니다. 여기 네 번째의 계명은 각각의 삶의 위치에 따라서 지켜야 할 본분을 이야기합니다. 자녀로서, 부모로서, 직공과 회사원으로서, 사업주들과 그 영향을 받는 사원으로서, 국가와 국민의 본분으로서, 신자와 교회공동체의 관계도 설명합니다.
다 아는 사실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지켜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명이란, 본래가 잘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해서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법이 없어도 삶의 윤리에 어긋남이 없어 생활하기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을 것입니다.
요즘에는 피고용자가 고용주에게 항의 모습과 횟수가 늘어났습니다. 시대가 바뀌어서 사람들 개개인의 권리를 깨달은 것도 있지만, 고용주들이 지나치게 욕심이 많게 행동해 왔던 것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고용주들은 자기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과거에는 돈을 적게 주어도 일할 사람은 넘쳤는데.......’하며 과거를 회상합니다. 이런 주장이 옳을 수도 있지만, 지나친 욕심이 개입되어 있다면 그것도 항상 옳게 볼 수는 없습니다. 이런 욕심의 모습은 고용주와 피고용자, 국가와 국민, 때로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도 드러나곤 합니다. 올바른 삶의 정신을 우리가 어떻게 갖고 사는가에 따라 우리가 행동하는 모습이 달라집니다.
네 번째 계명은 간단한 것이지만, 교회에서 그 계명을 해석하는 방법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복잡하고 어렵다고 말씀드리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네 번째 계명이 포함하는 의미는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 5 절 : 제 5 계명 <오. 사람을 죽이지 마라>
131. (문) 제5계에 금하시는 것은 무엇이뇨?
(답) 제5계에 금하시는 것은 살인뿐 아니라 어떤 모양으로든지 자기나 남의 영혼육신을 해함이니라. |
제 5 계명은 사람의 목숨과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나 죽이지 않습니다. 죽이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5 계명은 우리에게 의미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꼭 물리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끊어야만 살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 5 계명을 좁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함께 살아갑니다. 혼자 산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세상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가까이 마음을 두고 사는 사람이 없다는 것일 뿐이고, 사람은 누구도 도우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서 같은 세상을 살아갈 힘을 빼앗는 것도 사람을 죽이는 것에 해당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남이 살아갈 기(氣)를 꺾는다고 하는 일, 경제적으로 심각한 영향을 끼쳐 사람이 제 발로 설수 없도록 만드는 일, 살아갈 힘을 빼앗는 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요즘의 ‘왕따’ 현상도 사람을 죽이는 것의 한 가지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 가운데 가장 잘못된 것은 ‘자살(自殺)’하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자살했을까?’하고 봐주려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판단을 달리해야 할 문제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각자는 모두 해야 할 일과 역할이 있는 법입니다. 그것을 인위적인 판단에 의거하여 이리저리 생명선(生命線)을 단절하는 것은 아무리 잘 봐주려고 해도 잘못된 일입니다.
좀 더 구별해서 이야기하면,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제 5 계명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판단을 달리합니다. 좀 더 정확한 판단은 사람을 죽이게 하는 전쟁이 발생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죠.
제 5 계명이 금지하는 것은 남을 미워하는 것, 남의 불행을 원하는 것, 분노, 질투, 원수갚기를 원하는 것 등이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의 참조는 <상해천주교요리 2권, 89-107쪽을 참조하십시오.>
인간이 인간으로 제대로 살아가는 방법의 세 번째 계명인 제 6계명입니다. 제 6 계명은 입에 올리기가 좀 껄끄럽긴 합니다만, 부부 아닌 남녀가 성적관계를 맺는 일에 대한 ‘간음(姦淫)’ 문제입니다. 요즘 세상에 한창 횡행하는 ‘성매매, 혹은 성추행’도 포함되는 내용입니다.
제 6 절 : 제 6 계명 <육. 간음하지 마라>
132. (문) 제6계에 금하시는 것은 무엇이뇨?
(답) 제6계에 금하시는 것은 간음과 사음(邪淫:남의 남자나 여자와 음탕한 짓을 하는 일)뿐 아니라, 온갖 부정한 행실과 그 위험한 기회까지니라. |
여기 6 계명을 공공연하게 어기는 것이 창녀(娼女)와 남창(男娼)의 공공연한 합법화입니다. 흔히 말하듯, 성적인 문제를 언급하는 것을 ‘필요악’이라고도 합니다만, 말이라는 것이 한다고 모두 말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사람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렇게 합리화 한다면, 아마도 선과 악의 개념조차도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선과 악의 개념이 사라진다면, 자기 맘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은 당장 기뻐서 환성을 지를지도 모르지만, 결국 그 영향은 예상하지 못했던 자신에게도 그대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체험해봐야 아는 일은 아닙니다. 세상에 나 혼자 살고 있지 않는 한 그것은 필연적인 현상입니다. 윤리적으로 옳지 않고, 사람이 해서도 잘못이라는 것과 세상에 그 일들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마찬가지로 ‘남들이 거리낌 없이 하니까 나도 한다거나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남녀의 결합을 이야기하는 혼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 한편으로 생각하면 유치하기 짝이 없고, 한편으로 생각하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법해서 새삼스레 강조할 필요도 없는 문제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까짓 것쯤이야 누가 몰라’하거나 ‘아이, 창피하게 어떻게 그것을 교회에서 이야기해?’하는 요소도 강조합니다. 혼인의 진술서에서 혼인의 목적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혼인은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도우며 자녀를 낳아 기르기 위한 것임을 아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교회에서 원하는 정답은 ‘긍정(肯定)’의 답입니다. 다른 이론(理論)이 필요한 것이 아니죠. 사람의 세계에도 순수 동물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요소들 가운데 받아들일 만한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혼인의 목적에서 유치한 듯 보이는 말을 강조하는 이유는 사람이 하는 행동이 그만큼 의미심장(意味深長)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제 6 계명의 ‘간음금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인 내용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람은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서 합리화하려고 하고, 변명을 통하여 ‘불가피(不可避)’한 것으로 호도(糊塗:건성으로 애매하게 덮어버림. 속임수의 조처를 함)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하느님이 원하시는 길에서 어긋나게 살면서, 올바른 사람으로 돌아설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은 인정하고, 돌아서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수음(手淫), 수간(獸姦), 관음(觀音),>
일곱 번째 계명은 ‘사람의 재산’에 대한 것입니다. 재산은 귀중한 것입니다. 때로는 목숨과 바꾸기도 하는 것이 이 재산이고, 재산으로 말할 수 있는 돈을 지키려고 하거나 더 많이 벌어들이려고 하는 일에서도 일곱 번째 계명에 관련된 일들은 일어납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는 힘들이지 않고 아주 쉽고 편한 방법으로 재물을 쉽게 모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워도, 그런 사람들이 택하는 방법은 바로 제 7 계명을 어기면서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정당하게 땀을 흘려 벌거나, 세상에서 인정하는 합리적인 방법이 아닌 것들은 모두 이 계명과 관련된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법을 어기지 않았다거나 내 행동이 법에 어긋난 것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사람의 행위가 정당화(正當化)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 7 절 : 제 7 계명 <칠. 도둑질을 하지 마라>
133. (문) 제7계에 금하시는 것은 무엇이뇨?
(답) 제7계에 금하시는 것은 불의하게 남의 물건을 빼앗음과 손해를 끼침과 그러한 일에 협력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재산을 낭비함이니라. |
세상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참으로 듣기 껄끄러운 말을 듣습니다. 그것들 가운데 하나는 ‘대가성(代價性)’이라는 말입니다. 흔히 정치인들의 행동을 설명할 때 많이 쓰이는 말입니다. 뇌물을 받고,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잔뜩 늘렸으면서도 한다는 소리 중에 ‘이것은 대가성이 없는 것’이었다는 소리입니다. 이것은 제 7계명과 더불어서 제 8 계명마저도 어기는 행동입니다. 우리 속담에 ‘아닌 땐 굴뚝에 연기 나랴?’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목적 없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받은 사람이 목적성 있는 행동을 했다는 말도 되지만, 특별한 목적 없이 다른 사람에게 돈을 가져다주는 일도 없을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계명은 꼭 행동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의도까지도 가리키는 것이고, 남의 재산뿐만 아니라, 나의 재산까지도 함부로 쓰지 말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물론 함부로 쓰거나 그렇지 않거나 판단은 일방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처한 입장에 따라 판단은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 하거나 모든 것이 다 옳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반드시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그 판단은 ‘남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소매치기를 해서도 안된다는 말이고, 남을 상대로 하여 사기치는 일도 금지하는 말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허황된 말(?)을 믿은 네가 바보’라는 소리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세상살이의 올바른 방법은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올바른 것만 따라서 사느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태도는 자칫하면, 범신론(汎神論)으로 갈 수 있을 것이기도,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바로 세상에서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존재로 여길 수 있는 신(神)이 되려고 하는 것과도 비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신이 되고, 내가 세상의 모든 것을 판단하고 규정할 수 있는 기준이 되면, 그것만큼 행복하고 짜릿한 느낌이 있을 일은 없다고 하겠지요? 그러나 아닐 수도 있습니다.
지난번에 미국에서 개봉된 영화에,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신이 된 사나이(?) 이야기를 다룬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가 하느님께 기도하여, 딱 1 주일, 즉 7일 동안 하느님의 역할을 합니다. 물론 영화이니까, 우리가 비판적으로 볼 이유는 없습니다만, ➀바람을 일으켜서 길가는 여자의 치마 들추기 ➁멀쩡한 소방급수관을 터뜨려서 주변의 사람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기 ③로또 복권을 산 모든 사람을 모두 1등으로 당첨시키기 ④자기만 다룰 줄 아는 컴퓨터를 이용하여, 사람들이 하느님께 청하는 모든 ‘청원기도’를 전부 "yes'라는 답을 주어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가.......가 있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1주일도 지나기 전에, 하느님 능력을 갖게 해 달라고 한 것을 포기하고, 무조건 도망치고 싶어합니다.
사람으로서 정도를 지키고 산다는 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을 제대로 한다는 것이겠지요? 이 말에는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말의 의미를 ‘글자 그대로’가 아니라, 그 말의 의미를 좀 더 확장해서 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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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십계명중의 여덟 번째 계명입니다. 이 계명과 함께 열 번째 계명은 사람의 생각이 잘못된 길로 갈 수 있는 가능성도 올바로 조절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습니다. 우리가 살이 힘겹다고 생각하지 말고 제대로 알아듣고 실천해야 할 계명입니다.
제 8 절 : 제 8 계명 <팔.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134. (문) 제8계에 금하시는 것은 무엇이뇨?
(답) 제8계에 금하시는 것은 거짓말과 말로 남에게 해를 끼침이니라. |
지금 말씀드리는 여덟 번째 계명을 어긴다고 해서 그 결과가 눈에 띄는 행동으로 빠른 시간안에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남의 것을 훔쳐 와서 재산상의 손해를 끼치는 것보다 더 큰 해악(害惡)을 줄 수 있는 것이 ‘거짓증언’에 의한 결과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흔히 ‘증언’이라는 이름의 가면을 쓰고 등장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세상살이에서 적잖은 거짓말을 하고 삽니다. 갑자기 닥친 곤경을 피하기 위해서 하는 경우도 있고,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의도적으로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렇게 내가 말을 하거나 증언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때입니다. 다른 사람의 거짓증언으로 피해를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했을 법한 ‘거짓증언’의 위력이 내 삶에 어떠한 영향을 남겼는지 알 것입니다. 이 거짓증언의 결과는 ‘눈에 보이지 않게’ 다른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눈에 보이지 않게’ 거짓증언을 반복하는 사람의 삶을 조금씩 조금씩 파괴합니다.
다음은 제 9 계명과 제 10 계명에 대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계명은 재산에 관련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비판을 불러오기 딱 좋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 특히 여성이 재산의 하나로 취급되던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것과는 환경이 조금 달랐던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제 9절 + 제 10 절
135. (문) 제9계에 금하시는 것은 무엇이뇨? :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답) 제9계에 금하시는 것은 온갖 음란한 생각과 원욕이니라.
136. (문) 제10계에 금하시는 것은 무엇이뇨? :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답) 제10계에 금하시는 것은 불의하고 부당하게 남의 물건을 탐함이니라. |
제 9 계명과 제 10 계명은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앞선 생각부터 바르게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 9 계명에 대하여 여성들이 갖는 생각이 다소 화가 나는 것일지라도, 그래도 참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것이 당시의 사회관습을 그대로 유지해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때의 정신을 강조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요즘에는 남성이나 여성이나 동반자라고 하는 개념을 씁니다. 그리고 가끔씩은 여성의 지위가 높아진다는 판단을 하기도 합니다. 누구는 높은 사람이 되어도 좋고, 누구는 낮은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서로의 중요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보존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일이 될 것입니다.
국가 사회의 법과 규범에서는 의지(意志), 즉 ‘실현되지 않은 행동’을 처벌하지 않습니다. 실현되지 않은 것이라면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 점은 교회의 정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행동으로 드러나기 직전의 단계인 사람의 생각도 조심스러운 길을 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삶의 정신을 가르치는 방법에는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드러나는 행동만이 아니라, 그 행동을 이루는 마음의 변화에 대한 것까지도 바른 길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그 제재(制裁)에 대하여 사람들의 판단은 제 각각입니다. 아직 행동으로 드러난 것도 아닌데 그것을 미리 지적한다고 해서 부담스럽다고 여기거나, 종교는 골치 아픈 것이라고 하거나, 심지어는 종교와 신앙의 무용론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야 할 본래의 삶의 정신을 기억한다면, 그러한 판단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마라, 남의 재물을 탐하지 마라......는 말씀은 당연히 우리가 지키고 갖고 살아야 할 자세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런 마음자세에서 벗어날 때에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한 사람이 드러내는 잘못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겉잡을 수 없는 잘못의 소용돌이에 빠집니다. 사람이 하는 행동은 분명 개인이 하는 것이지만, 그 영향은 개인에게만 영향을 남기는 차원을 넘는다는 것입니다.
제 11절에 나오는 보상 문제는 십계명에 대한 설명은 아닙니다. 다만, 5,6,7,8 계명, 행동을 통하여 드러나는 계명을 준수하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문제의 손해에 대한 것을 어떻게 갚을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한 것입니다. 눈앞에 발생한 실제적인 피해와 손해에 대한 배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상이라고 합니다.
제 11 절 : 보상
137. (문) 제5, 6, 7, 8계명 중 어느 것이든지 범하면 무슨 특별한 의무가 생기느뇨?
(답) 그런 경우에는 남에게 끼친 모든 해를 기워 갚을 의무가 생기느니라. |
남에게 손해를 끼쳤을 때, 그 손해를 보상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객관적인 제 3 자의 입장이라면, 모른다고 우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피해를 입은 당사자라고 한다면, 그 판단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항상 입장을 바꾸어놓고 판단해서 살기는 어렵다고 해도, 가끔씩 입장을 바꾸어 살펴보는 일은 필요합니다. 그것을 제대로 실천한다면, 우리는 삶을 더 윤택하게 바꾸어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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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 절 : 십계대의
138. (문) 십계의 대의(大意)는 무엇이뇨?
(답) 십계의 대의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함이니, 상삼계(上三計)는 천주 사랑에 관한 것이요, 하칠계(下七計)는 사람 사랑하는데 관한 것이니라. |
제 12 절의 내용은 십계명을 분류하여 그 십계명이 갖는 뜻이 대상에 대한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것 세 가지 계명과,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 일곱 가지 계명으로 분류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분류이지 그 중요성을 달리 보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하느님께 대한 것을 소홀하게 보고, 자기 맘대로 그 평가를 달리하기 시작하면 사람에 대한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게 됩니다. 우리말에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로 바늘을 훔쳤던 사람이 전부 다 소를 훔치는 사람이 된다는 소리는 아닐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의 변화를 바라보고 그 사실을 말하는데 있는 것이 아닌 속담이요 격언이라는 것을 모두 알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것을 알고 대하면서도, 그리고 때때로 나도 역시 그 범위 안에 드는 어떤 행동을 하면서도 ‘자신은 정직하고 성실하고 올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올바르고 정직하면 참 좋을 일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판단의 기준은 내가 ‘국가에서 정한 법을 어기는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국가의 법은 드러난 행동을 판단하고 사람의 자유를 제약한다고 하자만, 신앙에서 말하는 규정들은 국가에서 정하는 규범보다는 한 단계 더 높고 한 차원 더 깊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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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계명에 대한 일반적인 우리의 자세입니다.
제 13절 : 본 지위의 본분
139. (문) 사람마다 본지위의 본분을 지킬 의무가 있느뇨?
(답) 지킬 의무가 있느니, 사람마다 그 지위와 직업의 본분을 다 지킬지니라. |
사람은 신분을 상승시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래서 돈을 더 많이 벌려고 하고, 사회에서 사람들이 인정하는 더 높고 더 편하고 더 좋은 직책을 맡으려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력합니다. 그렇게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각각의 일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가 달라지는 것 그것뿐입니다. 그 밖의 어떤 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얼굴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신분이 상승했다고 해서 내 몸에 없던 팔이 하나가 더 생기고 입이 두 개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렇게 노력합니다. 좋은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유의했으면 싶은 것은, 내가 신분이 상승되기를 바라는 것만큼이나 내가 해야 할 본분이 달라지는 것이 본분이 달라지는 그만큼 내게 주어지는 의무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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