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교리상식] (28) 교회가 어떻게 갈라지게 됐나요? (1) 1월 18~25일은 갈라진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일치 기도 주간'이라고 하는데, 하나인 교회가 어떻게 갈라지게 됐나요? - 동서 교회의 결정적 분열이 이뤄진 이스탄불(옛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성당. 6세기에 세워진 이 성당은 15세기 오스만 터키의 침공 후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됐다가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교회를 세우시고 당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 모두 하나가 되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그리스도 교회는 여러 교회들로 갈라져 있는 게 현실입니다. 크게 로마 가톨릭(천주교회), 정교회, 프로테스탄트, 성공회 등으로 갈라져 있지요. 분열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고 또 복잡합니다만, 요점만 추려서 두차례에 걸쳐 알아봅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해 근동(터키, 시리아, 이집트를 포함한 지역)은 물론 북아프리카와 유럽 대륙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로마 제국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를 끝낸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30년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동방의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그 이름을 콘스탄티노플로 고쳤습니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은 정치 문화 중심지로서뿐 아니라 종교 중심지로서도 급격히 부상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회의를 열어(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콘스탄티노플의 주교가 예우상 로마 주교(곧 교황을 말합니다)에 다음 가는 지위를 갖는다고 결정합니다. 이와 함께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소아시아의 안티오키아, 그리고 예루살렘을 총대주교좌 교회로 공인합니다. 이 총대주교좌들은 주변 교회들을 이끌면서 고유한 전례와 관습들을 발전시켜 나가게 되지요. 그런데 로마에서 볼 때 다른 네 지역 교회는 모두 지리적으로 로마 동쪽이어서 로마를 중심으로 한 교회를 로마 교회 또는 서방 교회 또는 라틴 교회, 이들 동쪽 교회들을 동로마 교회 또는 동방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지만 교회가 성장하면서 문제도 생겼습니다. 교리와 관련해서 또는 신앙 생활과 관련해서 의견 대립이 격화되면서 분열 조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지요. 이로 인해 문제가 심각해질 때면 교회는 보편 공의회(각 지역 교회의 모든 주교들이 다 참여해서 결정하는 교회 회의)를 열어서 정통교리를 확인하곤 했습니다. 이를 끝까지 거부하고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이들을 이단으로 단죄했지요. 다른 한편으로 로마 교회는 라틴어를,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방 교회는 그리스어를 쓰는 등 전례 언어도 다르고 제도나 관습도 달라 종종 마찰을 빚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에는 정치적 이유까지 겹쳐 때로는 심각한 양상으로 발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054년에는 동서방 교회가 결정적으로 갈라서게 되는데 이를 '동방이교(東方離敎)라고 부릅니다.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겹쳐 있지만 결정적 요인으로 두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교황 수위권 문제였습니다. 이미 381년 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총대주교좌의 권위와 함께 로마 주교 다음 가는 지위를 얻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앙고백문 곧 신경의 문구를 둘러싼 대립이었습니다. 우리가 주일미사 때 바치는 신경에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라는 구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들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Filioque)라는 문구를 넣어서는 안 된다는 신학적 입장을 내세웠습니다. 이를 '필리오퀘' 논쟁이라고 합니다. 이밖에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라틴 교회에서 누룩 없는 빵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고,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라틴 교회와 수도원들에 대해 라틴 전례가 아닌 비잔틴 전례를 사용하도록 강요하는 등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졌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교황 레오 9세(재위 1049~1054)는 1054년 훔베르트 추기경 등을 교황 사절로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했으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훔베르트 추기경은 7월16일 파문 교서를 작성, 콘스탄티노플 성 소피아 성당 중앙 제대 위에 놓고는 돌아갔습니다. 이에 맞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회의를 소집, 파문서를 작성한 훔베르트 추기경 등을 역시 파문했습니다. 이로써 동서 교회는 완전한 결별을 고하게 됐고, 이를 동방이교(Eastern Schism)라고 부릅니다. [평화신문, 2007년 1월 21일, 이창훈 기자] [교회상식, 교리상식] (29) 교회가 어떻게 갈라지게 됐나요? (2) 이번 호에는 지난 호에 이어 그리스도 교회가 갈라지게 된 과정을 계속해서 알아봅니다. 1054년 '동방이교'로 하나인 가톨릭 교회는 로마 교회(또는 라틴 교회)와 동방 교회로 갈라섭니다. 동방 교회는 자신들이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정통 신앙을 지닌다고 주장해 스스로를 정교회(正敎會)라고 합니다. 정교회는 지역(또는 나라) 이름을 따서 그리스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한국 정교회 등으로 부릅니다. 그러나 이후 교회는 다시 한번 큰 분열의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16세기 마르틴 루터에 의해 촉발된 프로테스탄트 종교 혁명이 그것입니다. 15세기 이후 유럽 사회는 중세봉건제도가 무너지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민족국가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서로 자기 나라 이익을 앞세우면서 교황권을 정략적으로 이용했고, 교황권은 영적 권위는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채 세속 권력과 결탁하거나 이들에게 휘둘리는 상황이 자주 발생합니다. 이와 함께 상공업의 발달은 부의 편중을 초래하면서 빈부 격차와 함께 황금만능주의 풍조를 심화시켰고, 민족국가들의 출현으로 수입이 줄어든 교황청은 수입을 늘리기 위한 다양한 조치들을 취하면서 문제의 소지를 만들었습니다. 또 돈으로 성직을 사고파는 행위가 성행하면서 교회 지도층의 부패도 만연했습니다. 다른 한편 이 시기는 문예부흥운동이 일어나면서 건축ㆍ미술ㆍ문학ㆍ음악 등 학문과 예술이 크게 진흥합니다.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재건도 이 시기에 이뤄집니다. 대성전 재건에 따른 막대한 재원 마련을 위해 교황청은 대사(大赦)를 시행했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대사의 의미에 대해서는 2006년 11월12일자 895호 참조) 대사는 원래 기도나 선행에 대해서만 주기로 돼 있는데 이것이 중세말에는 남용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동전이 상자 안으로 딸랑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순간 영혼이 천국으로 올라간다"는 말까지 나돌았습니다. 여기에 반기를 든 사람이 독일의 마르틴 루터(1483~1546)였습니다. 그는 엄격하기로 유명한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수도자로서 비텐베르크 대학 성서학 교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죄스러운 마음 상태에서 벗어나 평화를 얻을 수 있는지를 고심하던 그는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로마 1,17)라는 성경 말씀에서 위안을 얻고'신앙에 의한 의화'를 내세우게 됐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대성전 재건과 관련해 대사가 남용, 오용되자 그는 1517년 10월 대사 문제를 비판하는 것을 비롯해 선행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믿음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는 등 95개 명제를 내걸었습니다. 처음에 루터는 가톨릭 교회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상황이 악화하면서 교황청은 1521년 1월3일 파문 교서를 발표했고, 루터는 이 교서를 불태워 버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교파가 루터교입니다. 루터에 이어 독일어 사용권인 스위스 취리히에서는 츠빙글리(1484~1531)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제네바에서는 칼뱅(1509~1564)이, 각각 가톨릭 교회에 대항해 종교 혁명을 시작하는 등 종교 혁명의 여파는 유럽 여러 지역으로 확산돼 나갔습니다. 오늘날 프로테스탄트라고 하는 개신교는 바로 이들에게서 갈라져 나온 여러 그리스도 교파들을 가리킵니다.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는 "항거자" 또는 "항의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당시 가톨릭 교회에 항의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한편 영국에서는 헨리 8세 국왕(1491~1547)의 혼인 문제가 발단이 돼 종교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헨리 8세는 교회법이 금지하는데도 아내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고 궁녀 앤 볼린과 결혼을 강행함으로써 1534년 파문을 당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교황권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영국의회는 1534년 11월 '수장령'을 통해 국왕을 영국 교회의 수장으로 선언함으로써 교황권과 결별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영국 성공회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1054년 동방이교에 이은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 혁명은 그리스도 교회에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교회는 쇄신 노력을 새롭게 하게 됐는데 트렌토 공의회(1545~1563)를 통한 교회 쇄신 작업이 그것입니다. 트렌토 공의회의 쇄신 작업들은 이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때까지 약 400년 동안 가톨릭 교회 신앙과 생활의 규범역할을 해왔습니다. 이와 함께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그 동안의 분열 역사를 청산하고 그리스도 교회들이 다시 일치할 수 있는 새로운 전망을 열어놓았습니다. [평화신문, 2007년 1월 28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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