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현 신부의 사회교리]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1)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외국인 근로자들은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들은 이주국의 국민이 아니기에 국민으로서 보호받지 못하고, 또 고국을 떠나 있기에 고국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다. 특히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들이 산업과 경제가 발달한 국가로 이동하면 이들은 새롭게 정착한 나라에서 온갖 고통과 아픔을 겪지 않을 수 없다. 가톨릭교회는 결코 이들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며, 이들의 고단한 삶을 돕기 위하여 가르침을 펼쳐 왔다. 이제 교회가 외국인 근로자에 대하여 어떠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지 살펴보자. 그리고 그 가르침에 따라 우리 신앙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실천해야 하는지 모색해 보자.
1. 외국인 근로자의 존엄성과 기본권
선진국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에서 외국인 근로자의 유입을 이야기 할 때 흔히들 노동력으로 환산하여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정부의 외국인 근로자 정책은 ‘외국 노동력 도입’ 혹은 ‘외국 인력 정책’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외국인 근로자를 한 인격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력, 하나의 노동력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외국인 근로자를 하나의 노동력으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존재 혹은 상품으로, 생산 라인의 하나의 톱니바퀴로 사물화(事物化) 하는 대표적인 행위라 할 수 있다.(백주년. 15)1) 인간을 사물화 하는 것은 인간을 인격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산요소로 보고 사회적 유용성이 없을 때에는 언제든지 파기하거나 버릴 수 있는 물건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외국인 근로자는 노동을 팔러온 존재이기 이전에 먼저 인간이다. 인격체를 지닌 인간으로 자신의 인격을 발휘할 수 있는 노동을 찾아 온 사람들이 바로 외국인 근로자이다. 따라서 교회는 외국인 근로자를 사물화 하는 사고를 절대로 받아들이거나 인정할 수 없다. 오히려 교회는 외국인 근로자를 하느님의 모상, 존엄한 인격체로 선언하고 있다.
교회는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어 동일한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초자연적 목적에로 부르심을 받은 고귀한 존재로 누구나 똑같은 존엄성, 똑같은 권리와 똑같은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확고하게 선포하고 있다.(지상의 평화, 33,46; 팔십주년,16; 사회적 관심,47) 동일한 존엄성 때문에 인간은 개인이 처한 조건, 즉 인종, 나이, 성별, 직업, 학력, 혼인유무, 신분 등에 따라 어떠한 차별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외국인근로자란 이유로 그 어떤 차별도 있을 수 없으며, 결코 사물화 될 수 없다. 오히려 외국인 근로자 역시 세상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니고 있으며,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기 위해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누려야 한다. 여기서 기본권이란 인권을 의미한다. 인권의 내용은 생명권, 자유권, 경제권, 사회복지권 등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유지하는 삶을 사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모든 권리를 포함하고 있다.
외국인 근로자들은 자신의 삶의 터전인 고국을 떠난 사람들이다. 이들이 고국을 떠난 이유는 고국이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마련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고국을 등지고 낯선 외국 땅으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나는 사람들은 자신의 고국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어려운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즉 외국인 근로자들이 낯선 외국 땅을 선택한 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은 아닐지라도 보다 나은 삶을 향한 선택을 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험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고국에 남은 가족들의 안정적인 삶을 위해2) 자신들의 고국에서보다 열악한 사회적 인정과 처우를 받으면서도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하고 있다.(서독과 중동지방에서 노동을 한 우리나라의 근로자들을 생각해 보라.)
하지만 외국인 근로자들은 자신들이 선택하여 일하는 나라의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으면서도 외국인이란 이유 때문에 기본적인 인권마저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외국인 근로자는 자신들이 일하는 국가의 국민이 아니기에 국민으로서의 의무와 권리의 행사에 있어서 제한을 받을 뿐만 아니라 기본권에서도 많은 제약을 받고 있다. 이것은 16세기 이후 민족 국가에서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21세기 다양한 민족들이 한데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 글로벌 시대, 다문화 사회, 다민족 국가의 시대에 이러한 논리가 정당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글로벌 시대의 다문화 사회에서는 다양한 문화와 전통에 기반을 둔 보다 보편적인 가치가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이제는 민족을 우선시하는 편협한 사고보다 모든 민족, 모든 사람이 하나의 인류 공동체라는 사고가 더 중요하며, 모든 민족들 사이에 또 모든 사람들 사이에 연대성이 존재함을 인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비록 외국인 근로자에게 국민으로서의 참정권은 제한되더라도,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은 확실히 보장되어야 한다. 그중 무엇보다 먼저 외국인 근로자가 다른 노동자들과 비교해서 불이익의 처지에 놓여서는 안 되며, 외국인 근로자란 것이 재정적·사회적 착취의 기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2. 이주권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은 이 세상을 다스릴 권한을 부여 받았다. 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은 한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고 어려움을 겪는 곳을 보살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인간은 이주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남으로써 이주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이 세상에 영원히 머무르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자의 삶, 이주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즉 인간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될 때부터 이주의 본성을 부여받았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에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끊임없이 하느님 나라를 향해 이주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이런 면에서 인간은 존재론적, 구원론적 측면에서 이주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이주의 삶을 사는 것은 자신의 본분, 즉 이 세상을 돌보아야 할 의무와 구원에로 부르심을 받은 존재로 당연한 것이다. 또 원죄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인간들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혀주신 하느님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원하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셨지만 처벌의 장소, 징벌의 땅에로 유배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이 원하는 장소를 찾아가서 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이와 같이 원죄로 인한 처벌에서도 인간이 자신의 삶을 영위할 곳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보장되어 있다.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은 자신의 삶에서 더 큰 행복, 궁극적으로 영원한 행복을 향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이를 위해 인간은 자신의 인격과 능력을 발전시킬 의무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사회, 나아가 인류 사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러한 의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모든 인간에게 이주권이 인정되어야 한다. 현재 세계 각국은 헌법에서 국민의 기본권으로 거주·이전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헌법 제14조는 “모든 국민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주권, 즉 거주·이전의 자유는 무한의 자유가 아니라 공동선과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누릴 수 있다. 거주·이전의 자유는 모든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곳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인정해 주는 것이다.(다음호에 계속)
--------------------------- 1) 참조. Centesimus Annus, n. 15.
[월간빛, 2013년 4월호, 김명현 디모테오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다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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