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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는 믿나이다: 전례 - 하느님과 인류의 사랑의 만남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8-10-15 조회수2,419 추천수0

[나는 믿나이다] 전례 - 하느님과 인류의 사랑의 만남

 

 

신앙을 세상과 동떨어진 것으로 이해할 때 불신앙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잘못된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한 반목과 전쟁이라든가, 자본과 시장을 절대적 가치로 삼아 생활하려는 유혹 따위가 그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한복판에서 인간의 존엄함을 증진하고 인류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이 같은 노력은 참된 ‘인간화’와 참된 ‘사회화’를 지향한다. 이는 하느님 나라를 향한 지상의 여정이며,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희로애락하시며 우리를 이끌어주신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구원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지난 호에서는 하느님의 구원의 통로인 법과 은총을 살펴보았다. 하느님의 이 은총은 가시적인 표징(성사)을 통하여 우리에게 베풀어진다. 이번 호에서는 이 가시적인 표징인 전례 일반에 대해 알아보고, 다음 호에서는 교회의 일곱 가지 성사를 정리할 것인데 특히 성체, 화해, 혼인 성사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1. 전례, 하느님 사랑의 몸짓

 

필자가 교리시간에 ‘전례’인 ‘성사’를 설명할 때마다 사용하는 비유가 있다. 바로 청춘남녀의 사랑과 그 사랑의 표현 양식이 그것이다. 요즘의 청춘남녀에게는 고리타분하게 들릴 수도 있겠으나 그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등하굣길에 우연히 마주치다가 어느 순간 마음이 끌린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음에는 온통 그 사람 생각뿐이다. 겉으로는 내색도 못하지만 같은 시각에 같은 길을 지나려고 무진 애를 쓴다. 우연으로 보이려고 말이다. 어떻게 말을 건넬까 온갖 궁리를 다하면서도 번번이 기회를 놓친다. 물론 용기가 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늘이 무심하지 않아 말을 건넬 절호의 때가 온다. 그렇다고 속마음을 시원하게 털어놓지 못한다. 쓸데없는(?) 말로 분위기를 살리지 못하기도 한다. 간신히 스쳐 지나가는 수준을 넘어 자연스럽게 인사하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게 된다. 차도 같이 마신다. 만날 약속도 한다. 정성을 담은 선물과 편지도 주고받는다. 아직까지는 앉을 때도 마주앉고, 걸을 때도 약간의 거리를 둔다. 어깨나 손의 접촉이 일어나지 않도록….

 

영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장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즈음이다. 분위기 좋은 길을 걷다가 손과 손이 스치다가 슬그머니 손을 잡는 장면을 보여주고 나면, 카메라는 어김없이 그들의 얼굴 표정을 잡는다.”

 

그 다음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독자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이 청춘남녀의 모든 행위는 바로 사랑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같은 시각 같은 길을 가려 애쓰는 것도, 말을 건네는 것도, 선물과 편지를 주고받는 것도, 손을 잡는 것도 모두 두 사람의 ‘사랑’이라는 보이지 않는 마음을 드러내는 표현(표징)들이다.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됐지, 그걸 꼭 말로 해야 되냐!”고 하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은어 떤 양식으로든 몸으로 표현되고, 그 표현을 통해 마음과 마음이 소통하기 때문이다. 물론 마음 없이 몸짓만으로 소통할 수는 있겠으나 금세 단절된다. 우리 생활은 마음과 마음을 드러내는 표현 양식(몸짓)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몸짓은 사랑(마음)을 전하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사랑을 발전시키는 힘을 가지며, 사랑은 말이든 행동이든 듣고 볼 수 있는 몸짓으로 드러나고 동시에 성장하는 것이다.

 

교회의 전례인 성사도 청춘남녀 사이의 사랑과 그 표현처럼 하느님께서 품으신 인류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는 표현양식과 같다. 성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은총을 보여주는 표징이다. 마치 청춘남녀가 손을 잡고 걷는 행위가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사랑을 보여주는 것처럼….

 

인류에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여준 분이 계시다. 그분은 하느님께서 인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인류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마음이 얼마나 뜨거우셨으면, 당신 아들을 죽음의 희생제물로 삼으셨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은 하느님 마음 곧 인류 사랑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드러내신 그분의 몸짓이다. 제자들이 스승 예수님께 하느님을 보여주십사 청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라고 하셨다(요한 14,8-9).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마음을 드러내신 얼굴 곧 성사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성사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뒤 승천하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되었고,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만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당신 교회를 세우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품으신 세상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당신이 떠난 뒤 남아있을 제자들에 대한 사랑을 교회를 통해 이어가고자 하셨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께서는 성령을 보내셔서 당신 교회를 이끌어 가신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표지이며 그리스도의 얼굴 곧 성사인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사이다.

 

 

2. 교회의 전례, 그리스도의 사랑의 몸짓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성사를 통해 교회에 당신 사랑을 펼치신다. 그러니까 교회의 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일곱 가지 성사를 통해 교회를 만나고,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을 만난다. 이렇게 전례와 성사를 통해 하느님 백성 곧 인간과 하느님의 만남, 하느님과 인간의 소통, 곧 구원이 이루어진다. 하느님과 인류 사이의 사랑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파스카 신비는 지금도 교회의 전례 곧 성사를 통해 실현되고 있다.

 

전례란? “교회는 전례를 통하여 우리의 구원사업을 완수하신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수난, 부활, 승천)를 기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전례를 통해서, 당신 교회 안에서, 교회와 더불어, 교회를 통하여 우리의 구속을 위한 일을 계속하신다. 전례는 그리스도의 행위이면서 동시에 당신 교회의 행위이기도 하다.”

 

성사의 경륜이란? “그리스도께서는 성사들을 통하여 활동하신다. 바로 이것을 ‘성사의 경륜’이라고 한다. 성사의 경륜은 교회가 성사의 전례 거행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서 얻은 열매를 전해주는(또는 나누어주는) 것이다.”

 

전례는 하느님과 인간이 이루는 친교를 드러내는 표징이기에 그리스도인에게는 ‘삶의 원천’이며, 생활에서 성령을 따르는 새로운 삶, 교회 사명에 참여, 교회 일치를 위한 봉사라는 열매를 맺기 위하여 복음 선포와 신앙과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 전례는 성령 안에서 성부께 드리는 그리스도의 기도에 참여하는 것이며, 이 모든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생활화하고 내면화한다. 전례는 교회의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71-1075항 참조).

 

성당이 있는 곳에는 전례가 있다. 전례가 거행되지 않는 성당은 없다. 교우들은 ‘신앙생활’을 성체성사가 이루어지는 미사에 정기적으로 참여하고 고해성사를 하는 것쯤으로 이해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교리서가 가르치는 전례의 의미와 교우들의 전례에 대한 태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 셈이다.

 

우리는 전례 참여를 일종의 형식적 의무 이행 정도로 이해하거나, 생활에서 거두어들여야 할 열매와는 무관한 종교 예식 정도로 이해하거나, 전례를 통한 기도를 하느님의 일 대신에 자신의 일을 도모하는 편리한 도구 정도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더 나아가서 전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은총을 나누어받는 것을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만 국한하여 소원을 이루어주는 것쯤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도 발견할 수 있다. 게다가 전례에 참여하면서 기계적으로 기도문을 외우는 정도의 수동적인 자세에 머무르기도 한다. 우리는 이 같은 태도를 형식적인 종교행위 또는 기복적인 신앙생활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거룩하신 삼위의 행위이다. 먼저 그리스도교 전례는 굿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전례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영적 축복’에 대한 하느님 백성의 신앙과 사랑의 응답이라는 두 가지 차원을 지닌다. 전례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강복하시고, 전례를 통해 인간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드러낸다. 그리스도교 전례를 통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거룩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 221항).

 

그리스도교 전례는 형식적 예식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전례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파스카 신비를 나타내시고 실현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교회에, 특별히 전례 행위 안에 계신다. 미사의 희생 제사 안에, 성체의 형상들 아래, 성사들 안에 그리스도께서는 현존하신다. 말씀과 기도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현존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전례를 통해 당신의 은총을모든 시대와 모든 신자에게 전해 주신다(요약편, 222항).

 

그리스도교 전례는 인간의 계산된 행위가 아니다. 그리스도교 전례를 통해 교회가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준비시키고, 교회를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명에 결합시키시어 교회 안에서 친교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요약편, 223항).

 

손바닥도 부딪쳐야 소리가 나듯이, 사랑도 서로 소통해야 열매를 맺는다. 전례도 그렇다. 하느님의 사랑의 몸짓에 시큰둥하거나, 그리스도의 사랑의 손길에 마지못해 손을 내밀면 열매를 맺더라도 그 맛이 밋밋하고, 억지로 먹으면 살로도 피로도 가지 않는다. 전례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의 초대인 동시에 우리의 하느님 사랑 고백이다. 그 고백에 인색할 이유가 없다.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전례 거행(참여) 속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겠다.

 

 

3. 전례는 누가, 어떻게, 언제, 어디서 거행하는가?

 

많은 교우가 전례는 성직자만 거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 전례는 대사제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 몸인 천상 교회와 지상 교회와 더불어 거행하시는 것이다. 천상 전례는 천사들, 구약과 신약의 성인들, 성모님, 사도들, 순교자들, 성인들, 그리고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거행하고, 지상에서는 사제직을 받은 우리 하느님의 백성 곧 교회가 거행한다. 성품을 받은 봉사자들은 그 품계에 따라 전례를 거행하며, 주교와 사제들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교회의 전례는 하느님 백성 모두가 거행한다. 세례를 받은 모든 교우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여 거둔 결실을 영적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자기의 삶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만큼 값진 것이 어디 있겠는가? 당연히 두렵고 떨리는 그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전례에 임하여야 할 것이다.

 

전례는 어떻게 거행하는가? 전례는 표징과 상징으로 짜여있다. 부활 전례에 인상 깊은 부분은 아마도 ‘빛의 예식’일 것이다. 빛은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표징이다. 세례 때 사용하는 물은 정화와 생명을 가져온다. 성찬의 전례 때의 빵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된다. 견진성사 때의 기름은 하느님 백성을 거룩하게 한다.

 

특정한 행위들도 있다. 빵을 나누거나, 기름을 바르거나, 손을 얹거나, 축성을 하는 행위들이 그것이다. 노래와 음악 그리고 성화상은 전례의 기도를 표현하고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전례는 언제 거행하는가? 교회는 그리스도의 강생에서 시작하여 영광스러운 재림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를 전례주년 안에서 거행한다. 구체적으로 교회는 한 해의 전례를 대림시기부터 시작해서, 성탄과 성탄시기, 연중시기, 사순시기, 부활과 부활시기, 연중시기를 거쳐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다시 오실 때를 기념하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 전례를 거행함으로써 한해를 마친다. 한 해의 교회의 전례 안에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 구원의 역사를 담아놓은 것이다. 날마다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전례는 어디에서 거행하는가? 신약의 예배는 어느 한 특정 장소에만 매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의 백성은 지상 조건 때문에 전례 거행을 위하여 공동체가 모일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우리는 그 장소를 성당이라 한다. 성당은 하느님의 집을 상징한다. 성당 문을 들어서는 것은 새 생명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을 상징한다. 교회 건물은 단순히 신자들이 모이는 장소일 뿐 아니라, 그 지역에 살아있는 교회 곧 하느님께서 머물러 계시는 곳을 의미한다. 우리가 사는 동네에 성당이 있다는 것은 곧 하느님께서 우리 동네를 몸소 보살피고 계시다는 뜻이다.

 

 

4. 성찰하기

 

곳곳에 성당이 있고, 그곳에서 날마다 하느님의 백성이 모여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 그 말은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당과 성당에 모이는 교우들은 세상에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는가? 우리가 오히려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전례는 하느님 백성인 교회가 거행하는 것이다. 전례는 바로 내가 이웃 하느님 백성과 함께 거행하는 것이다. 내가 거행하지 않는 전례는 단순한 자리 채움이자 시간 메우기에 불과하며, 이는 하느님의 사랑의 몸짓을 외면하는 것이다.

 

수동적으로 전례에 참여함으로써 사랑의 손길을 내미시는 하느님을 머쓱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경향잡지, 2008년 6월호, 박동호 안드레아(서울대교구 신수동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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