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가톨릭 교회 교리서 (29)
33. 예수님 죽음의 의미
1)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죽으셨다
지난 시간에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그분을 처형한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 보았습니다. 유다인들은 율법과 성전과 하느님의 유일성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더 깊은 차원에서는 그들이 완고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귀를 막고 외면하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배척하고 죽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예수님 죽음의 책임을 물어 유다인들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급기야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수많은 유다인들이 학살당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에 유다인들만의 책임을 묻는 것이 정당할까요?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이 교회의 생각입니다.
“당시에 살고 있던 모든 유다인에게 그리스도 수난의 책임을 차별 없이 지우거나 오늘날의 유다인들에게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교회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임에는 틀림없으나, 마치 성경의 귀결이듯이, 유다인들을 하느님께 버림받고 저주받은 백성인 것처럼 표현해서는 안 된다.”(비그리스도교 선언 4항)
오히려 교회는 “예수님의 죽음에 우리 모두가 책임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2천년 전에 이루어진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우리도 생활 안에서 끊임없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있으므로 그분의 죽음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죽음의 책임을 유다인들에게만 전가시키고 빌라도처럼 손을 씻을 수는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마태 23,29-30)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마귀들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악습과 죄를 즐김으로써 마귀들과 함께 주님을 못 박았으며, 지금도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성 프란치스코).
2)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유다인들과 오늘날의 우리까지도)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깊이 읽어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셨음도 알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1-23)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피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비위를 거스르는 말씀과 행적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요한 6,60).” 그러므로 그런 말씀과 행적을 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내가 생명의 길을 가르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들어 먹지를 않으니, 포기하련다.”라고 마음 먹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포기하실 수 없었습니다. 당신이 죽으시는 한이 있더라도 사람들의 멸망을 손 놓고 보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윗 임금은 아들 압살롬에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압살롬은 반역을 일으켜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갖은 고생 끝에 다윗 임금의 군대가 압살롬 군대를 이겼고, 압살롬은 다윗의 부하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다윗 임금은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울부짖었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 너대신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2사무 19,1)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다윗 임금은 자기를 죽이려던 아들이 죽었을 때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차라리 자기가 죽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당신을 배척하는 사람들을 포기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다윗 임금은 아들 대신 자기가 죽었으면 좋았겠다고 말은 했지만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배척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당신이 대신 죽는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이 완전하게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배척할 수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포기하실 수 없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입니다. 아르스의 비안네 성인은 종종 강론 시간에 십자가 모양으로 양팔을 벌리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라고 말하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셨다고 합니다. 어떠한 죄인도 이 무한하신 사랑 앞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 구원의 보증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통해서 인류의 결정적인 속량을 완성하는 파스카의 희생 제사이며, 동시에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시키고 일치시키는 새로운 계약의 희생 제사이다. 신약의 이 제사는 죄를 용서해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신 성자의 피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가톨릭교회교리서 613항).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 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구나”(이사 53,5).
[2013년 5월 19일 성령 강림 대축일 의정부주보 5-7면, 강신모 신부(선교사목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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