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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는 믿나이다: 혼인성사, 병자성사, 성품성사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8-11-01 조회수2,824 추천수0

[나는 믿나이다] 혼인성사, 병자성사, 성품성사

 

 

천주교 교우의 신앙생활은 성사생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사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보이는 표지로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드러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성사다. 또한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써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낸 것이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이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사다. 성사를 통해 하느님과 나의 만남 곧 구원과 해방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 천주교 신자들에게 성사생활은 신앙생활의 시작이며 절정이며 완성인 셈이다. 이번 호에서는 혼인, 병자, 그리고 성품성사에 대해 살펴보자.

 

 

1. 혼인성사 - 사랑의 계약, 이인삼각의 아름다움

 

혼인면담을 할 때 나는 운동회의 ‘이인삼각(二人三脚)’ 경기를 예로 든다. 보통 재미를 더하려고 신체조건이 다른 두 사람을 한 쌍으로 엮는다. 초등학교 5학년 사내아이의 오른쪽 발목과 운동회에 구경 오신 일흔이 넘으신 할머니의 왼쪽 발목을 묶고 어깨동무하고 반환점을 돌아오게 한다. 발목을 묶기 전 두 사람은 발걸음의 폭이 다르고, 내딛는 속도도 다르고, 성격도 달랐다. 그러나 일단 발목을 묶고 경기를 시작하면 보폭을 맞춰야 하고, 속도도 맞춰야 하고, 성격도 맞춰야 한다.

 

80cm 보폭으로 1분에 80걸음 갈 수 있던 사내아이는 보폭을 65cm로 줄여야 하고 발걸음도 60걸음 정도로 그 속도를 낮춰야 한다. 반면에 할머니는 비록 평소 50cm 보폭으로 1분에 40걸음으로 걸었더라도 이때만큼은 65cm 보폭으로 늘여야 하고 발걸음도 60걸음 정도로 속도를 높여야 한다. 성격이 급한 아이는 성격을 누그러뜨려야 하고, 성격이 느긋한 할머니는 조금 분발해야 한다. 그렇게 어깨동무를 하고 보폭과 속도와 성격을 조정하여 호흡을 맞출 때 발목도 아프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인삼각의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당연히 그 모습은 보기에도 아름다우며 두 사람은 서로에게 편한 웃음을 지을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물론 있다. 사내아이는 보폭과 속도를 줄이지 않으려 하고 할머니 역시 보폭과 속도를 높이지 않은 채 자기 성격대로 가려고 할 때가 그러하다. 사내아이는 급한 성격에 따라오라 하고, 할머니는 느긋한 성격에 빨리 가지 못하겠다고 한다. 그렇게 제 걸음만 고집하며 가다가는 무엇보다 묶인 발목부터 아플 것이고, 몇 걸음 내딛지 못하고 엇박자가 나서 제대로 나아갈 수도 없게 된다. 사내아이는 할머니가 따라오지 못하는 것을 두고, 할머니는 사내아이가 혼자 내빼려는 것을 두고 못마땅해할 것이다. 그러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서로를 탓한다. 그런 모습은 보기에도 불편하고 그 두 사람은 서로를 원망하고 심지어는 미워하며 발을 묶어놓은 그 끈을 빨리 풀어버리려 할 것이다.

 

혼인생활은 땀을 흘리며 노력하는 그만큼 아름답다. 혼인성사를 거행할 때 성전입구에 내놓은 두 남녀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나무랄 곳이 한 군데도 없다. 비록 지금의 모습을 담은 것이지만 동시에 미래의 모습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발을 묶고 어깨동무를 하고 도착했을 때 드러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인삼각 경기에서 보폭과 속도와 성격이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상대에 맞추어 같은 발걸음을 내딛어야 하는 것처럼, 혼인생활은 가치관, 성장 환경, 능력, 성격 따위의 모든 면에서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어깨동무하고 한 길을 가는 것이다.  당연히 쉽지 않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맞춰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다른 두 사람이 어깨동무한 채 내딛는 발걸음만큼 세상에서 아름답고 거룩한 모습은 또 없다. 혼인생활이 성사인 이유다.

 

혼인성사 - 불가해소성과 단일성

 

교회는 혼인을 남녀 두 당사자와 하느님 사이의 사랑의 계약이라고 가르친다. 하느님께서 계약의 한 당사자이기에 이 계약을 사람이 임의로 해약할 수 없다는 뜻에서 ‘불가해소성(不可解消性)’이며, 다른 어느 누구도 이 사랑의 계약에 개입할 수 없다는 뜻에서 혼인의 ‘단일성(單一性)’이라 한다. 운동회의 이인삼각 경기는 혼인의 불가해소성과 단일성을 비유적으로 설명한다. ‘이인삼각 경기’는 두 사람이 각각 한쪽 발을 서로 묶고 하는 놀이이기에 묶은 끈을 풀 수 없으며, 두 사람이 한 쌍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 수 없고, 임의로 짝을 바꿀 수도 없다.

 

 

2. 병자성사 - 예수님의 수난에 결합하여 정화와 구원을 가져오는 길


인류구원의 희생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와 결합함

 

교우들은 성체성사를 통해 예수님과 한 몸이 된다. 예수님과 결합하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다. 그런데 그 기쁨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다. 제대 위에 놓인 희생제물로서 그리스도와 합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 전혀 기쁠 수 없다. 성체성사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에 그 기원을 두고 있음을 기억한다면 이는 분명하다.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은 곧 십자가의 길목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경박하게 들리겠지만 밥을 먹고 죽으러 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이 ‘마지막’에서 기쁨과 영광을 즐기기보다는 오히려 슬픔과 비장함의 기운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 미사에서 예수님을 모시러 나아갈 때 우리의 한 걸음한 걸음은 제대 위에 제물로 봉헌되신 예수님과 함께 나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순간을 향하는 것이기에 그만큼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통스러운 성체성사를 그토록 갈망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과 십자가 죽음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구원의 길임을 믿기 때문이다.

 

병자성사 - 예수님의 고통에 결합함

 

성체성사를 통해 예수님과 결합한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스러운 희생에 자신을 결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병자성사를 성체성사의 의미와 함께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고통과 죽음’의 의미 때문이다.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으로서 피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가져오는 은총이다. 마땅히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은총에 결합되기를 갈망한다.

 

생로병사는 사람이 걸어야만 할 길임에도 질병이나 노쇠함으로 죽을 위험이 있을 때 누구나 고통스럽고 두렵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 몸소 죄와 고통과 죽음에 대한 승리의 길, 곧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음을 믿는다. 고통이 단순한 괴로움이 아니라 정화와 구원의 길임을 주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하고 싶어 하는 그 고통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오히려 그리스도와 결합하는 은총의 기회가 된다. 병자성사는 우리의 고통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에 결합시킴으로써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구원의 길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겪는 육체적 고통은 병자성사를 통해 우리 자신과 타인을 위한 정화와 구원의 도구로 승화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넘어 부활의 영광에 이르셨고, 고통의 제물이 되심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셨듯이, 우리가 겪는 육체적 고통은 병자성사를 통해 예수님과 결합됨으로써 자신에게는 정화의 은총을, 이웃에게는 구원의 은총을 가져온다.

 

흔히 사람들은 고통이 가져다주는 두려움을 외면하거나 피하려 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이웃에게 고통을 안기는 일조차 서슴지 않는다. 이때 용감하게 고통을 짊어질 뿐 아니라 그 고통을 정화와 구원의 도구로 승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의 병자성사는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된다.

 

 

3. 성품성사 - 하느님과 세상의 봉사자인 사제

 

모든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와 결합한다. 그리스도와 결합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을 말한다. 당연히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가 누구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사셨는지를 항상 묻고, 그분을 닮아가도록 노력하면서 하느님의 도움을 구한다. 세례성사로 새로 태어난 하느님의 백성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자직과 왕직을 수행한다. 교회의 성품성사를 통해 사제가 된 이들은 더욱더 그래야 한다. 혼인성사와 함께 성품성사는 친교에 봉사하는 ‘친교의 성사’로서 교회 안에서 특별한 사명을 부여하는 성사다. 특별한 사명이라 하는 이유는 성품성사를 통해 맡겨진 사명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곧 성품성사는 하느님 백성의 형성에 이바지하며 특별한 은총을 베풀 뿐만 아니라, 교회적 친교와 타인의 구원에 이바지한다.

 

성품성사는 그리스도의 사제직, 예언자직, 왕직의 삼중 직무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게 하는 성령의 특별한 은총을 내려준다.

 

‘사제는 누구인가? 그리고 사제는 무엇을 하는가?’ 하는 물음의 답은 ‘그리스도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셨는가?’라는 물음에서 찾아야 하며, 교회는 이를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자직과 왕직으로 설명한다. 세상의 구원자(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대사제가 되어,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어, 이 세상을 하느님께서 받으실 거룩한 제물로 봉헌하셨다(사제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을 세상에 빛내셨다(예언자직). 구원과 해방을 선포하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아버지의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우셨다(왕직). 성품성사를 통해 사제로 태어난 이는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듯이 마땅히 이 세상에 하느님의 이름을 빛내고,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

 

사제의 신원과 역할을 성당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성무를 수행하는 것쯤으로 제한하려는 경향이 없지 않다. 게다가 사제의 성무를 기계적인 성사집행 정도로 간주하려는 시각도 없지 않다. 때로는 사제들이 왜 세상일에 관심을 갖고 행동하느냐고 질책하기도 한다. 이 같은 태도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으며,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지를 간과한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왜 하늘에 계시지 않고 세상에 오셨는지를 잊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을 빛내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아버지의 나라를 세움으로써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완성하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을 버리고 하늘을 찾아서는 안 될 이유이며, 예수님께서 당신 교회를 이 세상에 세우신 이유다. 물론 우리가 부름을 받아 그분의 제자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은 사제들에게 끊임없이 교회 쇄신에 앞장서고, 세상 곳곳에 복음적 가치(하느님의 정의와 사랑)를 스며들게 하며, 이를 위해 세상과 대화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촉구한다.

 

[경향잡지, 2008년 10월호, 박동호 안드레아(서울대교구 신수동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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