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21) 기묘한 인연, 아들과 어머니
‘성모님, 옆에서 기도를 거들어 주시는 전구자’
■ 로비 기도
최근 개신교 신자들과 식사를 할 자리가 있었다. 대화 중 성모 마리아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질문이 어김없이 날아왔다. 나는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우리는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처럼 숭배하지 않아요. 그저 모든 성인들의 으뜸으로 공경하고 있을 따름이지요.”
“근데, 마리아에게 기도는 왜 하는 거죠?”
“아, 그거요. 그거는 마리아에게 직접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기도를 당신 아드님 예수님께 대신 전달해 달라고 바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 기도드렸으면 됐지, 또 무슨 기도가 더 필요하단 말입니까?”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들 사이에서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를 생각해 봅시다. 왜, 아들에게 직접 청하기 어려운 것은 어머니를 통해 전달하면 안 될 일도 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아,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납득이 되네요. 그러니까,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는 기도는 일종의 ‘로비 기도’인 셈이군요.”
“네, 바로 그겁니다! 로비 기도인 거예요!”
로비 기도! 그렇다. 우리가 매일 바치다시피 하는 ‘묵주 기도’의 본질은 바로 로비 기도인 것이다. 그런데, 신나는 사실은 이 로비에는 검은 돈이나 뒷돈, 어떤 것이 되었건 로비 자금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 효력이 참으로 신통방통하다는 사실이다.
■ 어머니의 간섭
예수님은 어머니의 간섭을 수용하였다.
마리아와 예수님의 관계는 예수님의 공생활에서 첫 기적을 베푸신 ‘카나의 혼인 잔치’ 사건에서 엿볼 수 있다. 잔치 도중 포도주가 다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알리게 한다. 이에 예수님은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 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신다. 마리아는 주저 없이 시중꾼들에게 이르신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그러고 나서 뒷전으로 물러나 아들을 신뢰하며 채근하신다. 결국, 예수님은 마리아의 청에 못 이겨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행하신다.
다분히 상징적인 의미를 띠고 있는 이 기적은 구세사 안에서 마리아의 역할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하겠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으소서”라고 성모송을 바칠 수 있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이 기적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겠다.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마리아는 우리의 필요를 먼저 들으시고 예수님께 우리의 애원을 전달해 주시는 ‘전구자’시다. 오늘도 이 어머니는 하늘에서 이 역할을 하고 계신다. 예수님이 기도 올라오는 것들 중에 “안 돼, 너도 안 돼, 걔도 안 돼, 쟤도 안 돼” 하실 때 옆에서 성모님이 “아휴, 좀 봐 줘요, 봐 주세요오~”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을 ‘전구자, 옆에서 기도를 거들어 주시는 분’이라 고백한다.
■ 여인 중에 복된 여인
이런 역할의 연장선상에서 성모 마리아의 위상이 새롭게 설정된 것은 십자가 위에서였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그 곁에 서 있던 사랑하는 제자를 가리키며 유언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
인류 구원의 대업을 완수하는 절정의 순간, 절체절명의 찰나에 예수님은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이 말씀을 하셨을까? 단지 제자 요한의 어머니가 되어달라고 사적인 부탁을 하신 것일까? 아니다. 요한이 상징하는 ‘제자단’, 나아가 ‘교회’의 어머니가 되어줄 것을 당부하신 것이다. 자신을 사적인 아들로 묶어두지 않고 공인의 길을 가도록 묵묵히 뒷바라지하며 가장 필요한 순간에 늘 곁을 지켜주신 어머니에게 예수님은 교회를 맡기신 것이다.
사실, 성모 마리아는 예수님과 격이 다르다. 예수님은 메시아시다.
나는 여기서 우리 구원에 대해 자신 있게 선언할 수 있다. 말하자면, 예수님만 아는 사람들은 구원 받는다. 성모 마리아에 대해서 몰라도 구원 받는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르고 성모 마리아만 아는 사람은 구원을 못 받는다.
그러니까 구세사적으로 성모 마리아 없는 예수님은 어떻게 됐든 우리 안에서 의미가 있지만, 예수님 없는 성모 마리아는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이는 성모님도 인정하시는 바다.
하지만, 우리가 훌륭한 신앙의 삶을 산 인물을 존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엘리사벳은 성모 마리아를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된’(루카 1,42 참조) 여인이라 칭송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루카 1,48)라시던 말씀은 빈말이 아니었다.
시리아 사람 에프렘이 쓴 시는 마리아를 향한 우리의 시선에 깨달음을 준다.
오, 주님. 우리가 당신 어머님을 어떻게 불러 모셔야 할까요?
‘처녀’라고 부르면 한 아이가 일어나고
‘유부녀’라고 부르면 한 여인이 일어서는데
그런데 그분은 처녀면서 남편이 있으셨지요.
오, 주님. 당신에게 마리아는 누구십니까?
분명히 그분은, 그분만이, 당신의 어머님이십니다.
그런데 또한 그분은 당신의 누이요 친구시지요.
온 교회와 함께 그분은 당신의 연인이요
당신에게 모든 것입니다.
당신이 오시기 전에 그분은 당신과 약혼하셨고
성령이 당신을 데려왔을 때 당신을 잉태하셨습니다.
당신이 태어나실 때 그분은 당신 어머니가 되셨고
당신이 설교하실 때 첫 제자가 되셨습니다.
남자를 모르는 몸으로 그분은 당신을 가지셨고
당신에게 먹일 젖을 가슴에서 생산하셨습니다.
그분의 젖가슴은,
목마른 영혼들에게 영의 젖을 먹이는
당신의 자비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인(sign)이지요.
당신은 그분 안에 들어가 종이 되셨습니다.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지으신 당신이
그분 자궁에서 깊은 침묵에 잠기셨지요.
그렇게 하여, 모든 사람이 당신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왕들의 왕인 당신이 그분 안에서 비천한 몸이 되셨고
풍요의 샘인 당신이 그분 안에서 가난해지셨고
전사들의 전사인 당신이 그분 안에서 무력해지셨고
새들까지도 입히는 당신이 그분 안에서 벌거숭이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비천한 자를 들어 올릴 수 있고
굶주린 자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고
힘없는 자들을 힘있게 할 수 있고
벗은 자를 입힐 수 있으십니다.
이 시야말로 가장 객관적으로, 그리고 가장 감동적으로 예수님의 탄생과 성모 마리아의 관계를 읊고 있다. 처음 이 시를 접했을 때 내게 이런 감동이 밀려왔다.
“야~ 과학은 시간이 미래로 갈수록 발전하지만, 영성은 과거로 갈수록 발전해 있구나! 옛 사람들의 영적인 눈이 오늘 우리들이 보는 영적인 눈보다 훨씬 깊었구나. 영혼은 옛날 사람들이 훨씬 맑구나!”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 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3년 5월 26일,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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