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교리상식] (131) 십계명 (6) 제5계명 (상) 사람을 죽이지 마라 '사람을 죽이지 마라'는 제5계명은 단지 살인을 금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육신과 영혼으로 이뤄진 인간을 온전히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육체 존중과 인격 존중까지도 포함하는 계명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를 따라 제5계명을 두 차례에 걸쳐 알아봅니다. 살인과 낙태 직접적이고 고의적인 살인은 물론 살인에 일부로 협력하는 행위도 안 됩니다. 하늘이 맺어준 유대 관계를 파괴하는 유아 살해, 형제 살해, 부모 살해, 배우자 살해는 특별히 중한 죄입니다. 우생학 또는 국민 건강이라는 구실로 행해지는 어떤 살인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나아가 간접적으로라도 무죄한 사람을 죽이려는 의향으로 자행하는 일체 행위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또 중대한 이유 없이 어떤 사람을 죽을 위험에 처하게 하거나 위험에 처한 사람에게 도움을 거절해서도 안 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이렇게 적시합니다. "인간 사회가 기근으로 사람들이 죽어가는 데 대하여 구제책을 세우고자 노력하지 않고 묵인하는 것은 파렴치한 불의이며 중대한 죄이다. 폭리를 추구하며 탐욕스러운 행위로 인류 형제의 굶주림과 죽음을 유발시키는 상인들은 간접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며, 그 책임은 그들에게 돌아간다"(2269항). 고의로 낙태를 하거나 낙태를 주선하는 행위는 교회법에 따라 자동파문의 벌을 받을 만큼(교회법전 1398조) 중대한 죄입니다. 배아 역시 존엄한 인간 생명으로 대우받아야 합니다. 생물학적 실험을 위해 배아를 인위적으로 만들고 조작하는 행위도 부도덕합니다. 태아를 보호하고 치료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유산을 염두에 둔 산전 진단(태아 성 감별 등)도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죄입니다. 이 경우 산전 진단은 태아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습니다. 안락사 안락사는 그 동기나 수단이 어떻든 간에 신체 장애인, 병자 또는 임종을 눈앞에 둔 사람의 목숨을 끊는 것으로,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없습니다. 다만 비용이 크게 들고 특수하거나 기대한 만큼의 효과를 내지 못하는 의료기구를 계속 사용하는 것을 중단하는 행위는 정당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는 '지나친 치료'에 대한 치료를 거부하는 것으로, 환자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막을 수 없는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죽음이 임박했다고 여겨지더라도, 환자에게 일반적으로 베푸는 치료 행위를 중단해서는 안 되겠지요. 자살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인간은 자신의 목숨이라도 해도 자기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생명의 관리자이지 소유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살은 이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그뿐 아니라 자살은 생명을 지키고 유지하고자 하는 본성적 경향과 상반되며, 올바른 자기 사랑에도 어긋납니다. 또 이웃 사랑을 거스르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자살은 가정과 이웃, 국가와 인류 사회와 맺는 연대 관계를 부당하게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살은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대단히 악한 표양이 됩니다. 따라서 자살뿐 아니라 자살을 방조하는 행위 역시 잘못입니다. 하지만 "자살한 사람들의 영원한 구원에 대해 절망해서는 안 된다"고 교회는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만 아시는 길을 통해 그들에게 구원에 필요한 회개 기회를 주실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자살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2283항). 정당방위와 사형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22,39)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자기 사랑은 도덕성의 기본 원칙입니다. 따라서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공격자에게 치명적 타격을 가한다 하더라도 살인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필요 이상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정당방위는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정당한 권리입니다만 특히 다른 사람의 생명을 책임진 사람에게는 중대한 임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공권력은 시민 공동체를 해치는 공격자들을 물리치는 데 무력을 사용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형에 대한 가톨릭교회 입장은 어떠할까요.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은 "불의한 공격자에게서 인간 생명을 효과적으로 보호하는 유일하고 가능한 방법이 오로지 사형뿐이라면 사형에 의존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사형을 인정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격자에게서 사람들의 안전을 방어하고 보호하는 데 사형이 아닌 방법으로도 충분하다면 공권력은 그러한 방법'만'을 써야 한다"고 교회는 강조합니다(2267항). 가해자의 죄질이 흉악하다는 이유만으로 사형에 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평화신문, 2009년 3월 8일, 이창훈 기자] [교회상식 교리상식] (132) 십계명 (7) 제5계명 (하) 사람을 죽이지 마라 악한 표양 악한 표양이란 다른 사람에게 악을 저지르도록 유도하는 태도나 행위를 말합니다. 이른바 스캔들(추문)을 일으키는 것이지요. 이렇게 스캔들을 일으키는 사람은 덕과 정의에 어긋나는 태도나 행동을 통해 이웃을 영적 죽음으로 이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일부러 악한 표양을 보임으로써 다른 사람이 심각한 과실을 저지르게 한다면 중죄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달고 바다 깊은 곳에 빠지는 편이 낫다"(마태 18,6)고 경고하셨습니다. 나아가 "부정 행위를 조장하는 규칙을 정하는 기업주들,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격분하게 하는 교사들, 여론을 조작해 도덕적 가치에서 벗어나게 하는 사람들"도 똑같이 악한 표양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건강 존중 자신뿐 아니라 남의 건강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행위는 제5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교회는 육신의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그렇다고 육신의 가치를 절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럴 경우 육신숭배에 빠질 수 있고 이는 또 다른 의미에서 우상숭배 잘못을 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음주 운전이나 과속으로 자신과 남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중죄를 짓는 것이며, 치료를 위한 처방용이 아닌데도 약물이나 마약을 사용하는 것 역시 중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마약 밀조나 밀매는 파렴치한 행위일 뿐 아니라 범죄에 직접 협력하는 것과 다름없는 행위입니다. 육체의 완전성에 대한 존중 사람을 납치하고 인질로 삼는 것 역시 제5계명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폭력행위는 정의와 사랑에 크게 어긋나는 부당한 행위입니다. 육체적 정신적 고문 역시 인간 존중과 존엄성에 어긋나지요. 합법적 정부가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가혹행위를 하는 것도 부당합니다. 고의적이고 직접적인 수족 절단, 신체 상해, 불임 수술도 도덕률에 위배되는 행위이지요. 그러나 치료를 위해 부득이하게 신체 일부를 절단하는 것은 육체의 완전성 존중에 위배되는 것이 아닙니다. 군 면제를 받기 위해 손가락을 절단하는 것은 도덕률에 위배되는 죄이지만 손가락에 난 상처가 곪아 썩어서 절단하지 않을 경우 손 전체에 손상을 준다면 잘라내는 것이 합당합니다. 장기 이식은 제공자가 겪는 신체적 정신적 손상과 위험률이 장기를 제공받는 사람이 얻게 되는 선익과 균형을 이룰 경우에는 도덕률에 부합합니다. 제공자를 불구로 만드는 적출이나 죽음을 직접 유발하는 일은 비록 이를 통해 장기를 제공받는 사람의 목숨을 연장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도덕적으로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은 후 장기 기증은 칭찬받을 일이며 장려돼야 한다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최근 고 김수환 추기경이 각막 기증으로 장기 기증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죽은 이들에 대한 존경 교회는 또한 죽은 이들 시신을 존경과 사랑으로 다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 육신은 땅에 묻히면 썩을 몸이지만 살아 있을 때 우리 몸은 성령의 궁전이었기에 시신을 존경과 사랑으로 다루는 것은 마땅하다고 할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부활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지니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시신을 존경과 사랑으로 다루는 것과 화장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교회는 육신 부활을 부정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화장을 허락합니다. 전쟁을 피함 전쟁은 인간 생명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죄악입니다. 하지만 다른 평화적 방법을 다 사용해봐도 어찌할 수 없을 경우에, 불가피하게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를 이른바 '정당한 전쟁'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러나 '정당한 전쟁'이 되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을 모두 충족시켜야 합니다. - 공격자에게 받는 피해가 계속적이며 심각하고 확실해야 한다. - 이를 제지할 다른 모든 방법들이 실행 불가능하거나 효력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야 한다. - 성공할 조건들이 수립돼야 한다. - 제거돼야 할 악보다 더 큰 악과 폐해가 무력 사용으로 초래되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해서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지켜야 할 도덕률이 있습니다. 민간인과 부상병, 그리고 포로들을 존중하고 인간답게 대우해야 하며, 국제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고의적으로 행하거나 그런 명령을 내려서도 안 됩니다. 특히 소수 민족에 대한 집단 학살은 죽을 죄로 단죄돼야 하며 이런 명령에는 항거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전쟁이 아닌 평화를 증진하는 것입니다. 평화는 단순히 무력 균형을 통해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게 아닙니다. "평화는 정의의 결과이며 사랑의 결실"(가톨릭교회 교리서 2304항)입니다. 평화의 길은 군비 경쟁이 아니라 군비 축소에 있습니다. [평화신문, 2009년 3월 15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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