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62) 사회는 진실 · 자유 · 정의 · 연대 의식에 근거한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 (2)
정보의 객관성 위한 소비자 권리 중요
지난 호에서 필자는 정보의 왜곡이 민주주의 제도를 위협한다고 밝힌 교회 가르침을 소개했다. “정보의 객관성에 대한 권리를 온전하게 행사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 가운데,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소수의 사람이나 집단이 조종하는 뉴스 미디어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에, 정치활동과 금융 및 정보기관의 유착까지 더해지면 이는 전체 민주주의 제도에 위험한 결과를 미친다”(「간추린 사회교리」 414항).
이 위험한 결과를 가져오는 데에 교회는 시민의 수동성 혹은 비판력 부족도 한몫을 할 수 있음을 밝힌다. 사회적 전달 수단(특히 대중 매체)이 그 이용자에게 일종의 수동성을 길러 주거나, 그들이 시청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력이 부족한 소비자가 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496항).
객관성이 부족한 정보 전달의 위험성
금속을 높은 온도로 높여 물리적· 화학적 성질을 바꾸는 파이로프로세싱(pyro-processing, 건식 정련)을 한미 양국이 공동연구 중이다. 핵연료를 사용 후 처리하는 기술로 전기분해를 통해 폐 핵연료를 플루토늄, 아메리슘 등이 섞인 금속과 우라늄 등으로 분리할 수 있다. 상용화된 습식 재처리(질산에 녹이는 방식)와 달리 핵무기 원료인 순수 플루토늄만 추출할 수 없다. 또 폐 핵연료에서 발생하는 열과 방사성 독성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소개된 바 있다(○○일보, 5월 24일).
하지만, 미국에서 고속증식로를 연구했던 한 교수는 “기술이 과장돼 있다”고 주장했다. 경제성과 안전성 문제로 미국에서도 포기한 사업이라는 것이다. 파이로프로세싱이 성공해도 재활용한 핵연료를 사용할 안전한 고속증식로가 개발되지 않았다. 1946년 최초의 실험 고속로가 만들어진 이래 일본이 ‘몬주’, 프랑스가 ‘페닉스’라는 이름의 고속증식로를 세웠지만 잦은 사고로 상용화되지 못하고 있다(△△일보, 5월 4일).
보통 시민이 접근하기에는 너무나 전문적인 분야에 대해 두 일간신문이 실은 글을 그대로 옮겨보았다. 같은 주제인데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앞의 기사를 보면 너무나 좋은 기술처럼 보이는데, 뒤의 기사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수동적 정보 접근, 사회 분열로 이어져
이 예에서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는 정보의 객관성에 대한 권리이며, 다른 하나는 시민의 수동성 혹은 비판력 부족이 갖는 위험성이다. 과연 어떤 기사가 객관적이고, 진실에 근거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을까. 왜 한 신문은 파이로프로세싱을 좋은 것이라 말하고, 왜 다른 신문은 경제성과 안전성에 문제가 많다고 말할까. 혹시 그 정보 제공이 “소수의 사람이나 집단들이 조종하는 뉴스 미디어 현상”은 아닌지, 혹은 정치 활동과 금융 및 정보기관들의 유착까지 더해진 것은 아닐지 짚어봐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 덧붙일 것이 있다. 대중매체가 전하는 정보가 보통 시민의 지식과 경험을 통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정보일 경우를 보자. 이를 ‘정보의 비대칭성’이라 한다. 의사와 환자 사이의 의학 정보처럼, 정보를 제공하는 쪽과 받는 쪽 사이에 균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파이로프로세싱도 마찬가지다. 매체가 제시하는 정보에 비판을 가할 수준의 전문 지식이 없기에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는 뜻이다. 이는 두 번째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혹시 그 매체가 일부 독자에게 수동성을 길러주어 비판력이 부족한 소비자가 되게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만일 두 매체를 접한 두 사람이 만났다고 가정해보자. 한 사람이 “내가 신문에서 읽었는데, 그 기술이 정말 좋은 것이니까 꼭 개발해야 해” 하고 주장할 것이고, 다른 사람은 “나도 신문에서 읽었는데, 그 기술이 엄청난 비용이 들고 게다가 얼마나 위험한데. 그러니까 개발할 수도 없고, 개발해서는 안 돼” 하고 주장할 것이다.
더욱이 거기에 멈추지 않고 이 같은 대화가 사회 영역으로 확장되면 이는 분명 집단과 집단 사이의 분열로 이어질 것이다. 이는 대중매체가 ‘민주주의 제도에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그리고 정보의 객관성에 대한 권리의 중요함을 다시 일깨운다.
[평화신문, 2013년 6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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