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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톨릭은 순수한 종교인가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6-30 조회수2,958 추천수0

[사서함 16호] 가톨릭은 순수한 종교인가

 

 

……(중략) 저희 집안은 할머니 때부터 프로테스탄트 가정이며 저 역시 감리교 세례를 받은 신자로 복무 중인 군인입니다. 저는 요즈음 가톨릭으로 개종을 생각하고 있는 중인데 개종에 대한 개인적인 사유는 말씀 드릴 수 없고, 막상 개종을 하려니 여러 가지 궁금함과 의문점 그리고 다소 불안함을 느낍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나온 이후 가톨릭 내에서도 많은 변화가 이루어졌고, 지금의 가톨릭은 순수하다고 합니다. 과연 가톨릭의 순수성은 무엇인지, 그리고 성모 마리아와 성상 공경 등 이해하기 힘든 점 몇 가지가 있어 문의합니다.

 

 

- 먼저 종교 개혁이 발생한 16세기로 시선을 돌려 당시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세 교회가 교회 행정상의 폐해, 도덕적 폐단과 과오, 봉건 제도 속에서의 정치적 대립으로 인한 교회의 대립, 사회 구조의 결과에 따른 과실을 보여 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거대한 교회 건축물들과 예술 작품들, 양로원, 병원, 자선 시설들 그리고 영원한 구원에 대한 갈망과 속죄에 근거한 신앙심은 중세를 종교적 시대라고 규정할 수 있을 만큼 훌륭하였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폐단 때문에 개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종교 개혁이 되어서는 안되었던 것입니다.

 

루터가 스스로 종교 개혁자가 된 것 역시 그가 교회의 폐해에 대해 악영향을 받은 때문이 아니라 그의 새로운 종교적, 신학적 인식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영국의 신학자 윌리암 오캄의 유명론(唯名論)이라는 학설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고 생활하였습니다. 이 학설은 자연과 초자연 사이에는 그 어떤 교량도 없고, 신과 인간은 인간의 이성이 뛰어넘을 수 없는 심연에 의해 서로 분리되어 있으며, 신이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낼 때만 인간은 신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된 성서만이 신앙의 기초요 원천이며, 이성은 무력하여 신앙만이 신을 인식케 하고 구원에로 인도할 수 있으며, 인간의 본성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모든 것이 은총이라는 루터의 신학적 인식이 이에 상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루터의 신학적 인식에서 구원 기관으로서의 교회, 은총의 중재자로서의 성사(聖事)는 퇴색할 수밖에 없었고, 교회 자체가 문제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교회 안에 머물면서 개혁 운동을 전개하여야 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에 영광을 드리기 위한 사랑의 ‘새 계명’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며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과실을 가정 밖으로 들고 나가 고치려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교회 역시 인간의 집단이기에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따라서 그러한 아픔들은 우리 모두 사랑으로 감싸 안아 쇄신해야 할 우리의 과제인 것입니다. 만약 루터가 교회 안에 머무르면서 개혁자가 되었다면 그는 세기를 두고 칭찬받을 위대한 종교 개혁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오늘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프로테스탄트의 분열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고려할 때 교회는 쇄신하고 개혁할 수 있는 부분을 항상 쇄신해야 할 의무와 권리를 지니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의 본질과 특성 자체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 내일도 변함이 없을 것이고 이 불변성으로 인해 가톨릭은 순수한 것입니다.

 

 

마리아 공경과 성상 공경은 우상 숭배인가

 

-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가톨릭의 성모 마리아 공경을 비판하고 부정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다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은 마리아를 독립시켜 “어머니 신”이나 “여신”으로 공경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특별한 방법으로 참여하셨기에 공경하고 있습니다. 루터 역시 칼빈과는 달리 마리아 공경을 아주 긍정적으로 고백했으며 다만 마리아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남용 행위를 비판했을 뿐입니다.

 

가톨릭은 마리아가 영원한 동정녀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하느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 이해합니다.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하여는 생물학, 역사학, 종교학은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마리아의 동정성의 근거는 인간의 구원을 다른 양식으로가 아니라 바로 그러한 양식으로 계획하시고 실행하신 하느님의 절대적인 의지에 놓여 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예”라고 응답함으로써 마리아는 하느님의 그 계획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가톨릭은 예수님의 형제 자매들에 대한 성서 구절 역시 예수님의 친형제나 자매들이 아니라 사촌이나 그 밖의 친척들에 대한 언급이라고 전통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상(聖像)이란 예수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성인 또는 천사의 모습을 조각하거나 주조한 물건입니다. 루터는 성상들이나 교회를 세움으로써 공로를 쌓을 수 있다는 일부 그릇된 구원 신앙을 거부했으나, 그에게 있어 교회 안에 성상을 모셔 두는 것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니었습니다.

 

성당이나 가톨릭 신자 가정에 성상을 모셔 두고 그 앞에서 기도를 하는 것은 그 물건 자체를 공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상을 대할 때 보이지 않게 우리 곁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및 성인들 그리고 구원의 역사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업적을 연상하고 흠숭이나 공경을 효과적으로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결코 우상 숭배와 동일시될 수 없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그 외 성모 마리아 공경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자 하시면 본지 1992년 1월호 ‘사서함 16호’를 보십시오.

 

 

성직자의 동정성(불가 혼인)은 필요한가

 

- 어떤 이들은 사제의 독선 제도가 여성의 지위를 과소 평가하는 제도라고 비판하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인간의 성숙과 균형에 해로운 제도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톨릭은 독선 생활의 동기와 이유가 단순히 교회법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에 놓여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 독신 생활은 처음부터 교회법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라 초세기 교회의 관습으로부터 유래하여 법으로 규정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독신 생활과 관련된 성서의 말씀들은 안내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마태 19,12), “하느님 나라 때문에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루가 18,29), “결혼을 안하는 남자는 어떻게 하면 주님의 마음에 들까 하고 주님의 일을 걱정합니다.”(1고린 7,32)는 성서 말씀들은 직접적으로 사제직과 관련된 말씀은 아니나, 독신 생활을 위한 동정성의 특별한 가치에 대한 암시를 담고 있습니다.

 

가톨릭 사제의 독신 생활의 이유와 동기는 인간 생활의 다른 가치들을 경시하거나 인간의 본능을 억압하는 데 있지 않고 온전한 마음으로 그리스도께 더욱 친근하게 일치하며, 커다란 자유를 가지고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데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가톨릭 교회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필요한 직무 수행의 구체적인 방법을 위해 독신 제도를 선택하였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듯, 사제는 정신적 혼인을 통해 신앙 공동체와 결합되어 있으며, 이 공동체에 초자연적 생명을 중재해 줌으로써 교회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타종교에서 세례를 받고 개종할 경우 이 세례는 유효한 것인지, 또 세례명은 어떻게 지어지는 것이며, 누가 어떤 방식으로 짓는가

 

- 세례는 하나이며 한 번 받으면 원칙적으로 유효합니다. 그러나 세례의 유효성이 의심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교회법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비가톨릭 교회 공동체에서 세례를 받은 이들은 조건부로 세례받지 아니하여야 한다. 다만 그 세례 수여 때에 사용한 재료(질료)와 말의 형식을 조사하고 또한 세례받은 어른 본인과 세례 준 교역자의 의향을 검토한 후 세례의 유효성에 대하여 의심할 만한 중대한 이유가 있으면 그러하지 아니하다”(교회법 제869조 2항). 한국에는 수많은 프로테스탄트 종파들이 있고 세례 수여의 방식도 다양하기 때문에 개종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예비 신자 기간을 통해 가톨릭 신앙의 진리, 가톨릭 신자의 의무와 생활을 습득케 한 후 조건부로 세례를 수여하고 있습니다.

 

세례명을 본명(本名)이라고도 합니다. 세례 때에 세례명을 지어 주는 것은 세례를 통해 하느님 안에서 새로이 탄생하여 새롭게 신앙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세례명은 성인의 신앙 생활을 본받고 그분의 도움을 청하며 그분의 뜻을 기리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세례명의 성인의 축일을 본명 축일 또는 영명(靈名) 축일이라 하여 생일처럼 지내기도 합니다.

 

세례 후보자는 특정한 지향으로 특별히 공경하고자 하는 성인이나 성녀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보자가 성인들에 대한 지식이 없을 때는 신부, 수녀, 대부나 대모 혹은 그 밖의 신자들과 상의하여 세례명을 지을 수도 있습니다.

 

 

대부모의 역할은 무엇인가

 

- 세례는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육신의 부모 사이에서 우리가 태어나듯 교회 역시 세례로 그 자녀를 탄생시키는 데에 있어 인간적인 조건을 취합니다. 따라서 세례성사, 견진성사로 다시 태어나고 자라는 자녀의 신앙 생활을 돕는 후견인을 이름하여 대부 대모라 하고, 이는 오랜 교회의 관습이기도 하며 또한 이를 교회법이 명문화한 것입니다. 옛날에는 세례 때 대부모 모두를 필요로 했는데 근래에 와서는 여러 가지 번거로움 때문에 남자는 대부만 여자는 대모만을 정합니다. 이 대부모는 대자 대녀를 신앙의 친자녀로 맞아 신앙 생활의 전반적인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육신의 부모가 자녀의 행실에 대해 걱정하고 책임을 지듯, 대부모 역시 영신의 자녀에 대해 책임과 지도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합니다. 따라서 대부모와 대자녀의 관계는 이러한 교회 내의 영적인 문제로 받아 들여야 하기 때문에 서로 잘 아는 사이에서 관계를 맺음이 적절합니다. 아울러 예비 신자 때부터 대부모를 정해 신앙과 인간적인 만남이 조화를 이루도록 함이 바람직합니다.

 

[경향잡지, 1992년 6월호, 홍범기 베드로(수원 가톨릭대학 교수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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