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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기쁨의 성사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6-30 조회수2,456 추천수0

[사서함 16호]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기쁨의 성사

 

 

요즘 몇몇 본당에서 미사 시간에 고해성사를 주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 본당도 그렇습니다. 하루는 미사 시간에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영성체 시간이 되었기에 먼저 성체를 영하고 뒤에 고해성사를 보았습니다. 그런 행위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요? 또한 고해성사 뒤에 보속을 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체를 모셔도 되는지요?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은 오로지 죄를 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선 우리에게 지켜야 하는 것들을 주시고, 우리가 죄를 짓는지 용의 주도하게 살피고 계시는 가차없는 최고의 심판자가 아닙니다. 성서는 하느님께선 자비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반복하여 말합니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만 하느님에 대해 올바르게 말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 주실 때 항상 “측은히 여겨서” 또는 “불쌍히 여겨서”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요한 복음에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이야기(8,1-11 참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법에 따라 그 여인을 돌로 쳐죽이려 하지만, 예수님은 “나는 당신을 단죄하지 않습니다.” 하시면서 사람들의 손에서 구해 낸 여인을 돌려보내십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빙자하여 사람을 죄인으로 판단하고 죽이지만 하느님은 살리신다는 것이 이 이야기 안에 들어 있는 가르침입니다. 루가 복음(7,36-50)은 ‘죄 많은 여자’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예수님에게 다가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은” 사건을 보도합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만일 예언자라면 이 여인이 죄인이라는 사설을 알 것이라고 중얼거립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도 사람들은 사람을 죄인으로 판단하고 소외시키지만 예수님은 용서를 선포하십니다. 이 밖에도 성서 안에는 하느님 또는 예수님이 사람을 용서하고 살리신다는 것을 전하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이 아버지라는 말의 뜻은, 하느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베푸신 분이고, 우리를 위하고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는 악하면서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마태 7,9-11). 이것이 아버지이신 하느님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믿고 살아야 하며, 우리도 주변에서 바로 이런 사랑과 용서를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가 6,36) 하고 권하십니다. 자녀는 아버지의 정신을 따라 사는 것이고 아버지가 자비하시다고 믿는 신앙인은 사랑과 용서를 실천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에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비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는 용서하시는 하느님께 필요하기 때문에 있는 성사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선 그것 없이도 얼마든지 용서하십니다. 고해성사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받기 어려워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성사입니다. 고해성사에서 우리는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가쁜 소식을 듣는 것입니다.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우리는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에 고해성사를 통한 용서가 선포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만나는 순간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이 세상의 무서운 지배자와 비슷한 분으로 끊임없이 착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잘못한 일에 대해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해성사는 하느님이 그런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선포하는 성사입니다. 고해성사는 하느님이 참으로 자비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신시키는 성사입니다. 따라서 고해성사와 관련하여 불안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고해성사는 죄를 고하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고해성사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듣는 기쁨의 성사입니다.

 

미사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시기 전에 남긴 성사입니다. 우리는 미사에 참여함으로써 ”너희들을 위해 주는 몸, 너희들을 위해 쏟는 피”를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고 마시면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삶이 당신 스스로를 주는 삶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도 그렇게 나를 주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미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죄가 되기 때문에 미사에 참여하고, 영성체를 하지 않으면 죄가 되기 때문에 성체를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에 미사 시작에 참회하는 기도를 함께 바칩니다. 그뿐 아니라 성찬에 참여하는 자체도 우리 죄를 용서받는 기회입니다. 성찬 기도문에는 “너희와 모든 이의 죄사함을 위하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초기 교회 교부(敎父)들은 미사를 비롯하여 세례, 순교, 자선, 형제를 용서하는 행위, 사랑의 실천, 단식, 기도, 순례, 성서 독서 등이 모두 죄를 용서받는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현재 몇몇 본당에서 미사 시간에 고해성사를 보게 하는 것은 신자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지만, 미사와 고해성사의 뜻을 충분히 살린 것이라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의 뜻을 잘 실현할 수 있도록 동시에 둘 다 하는 일은 피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죄를 짓지 않고 완전하게 살아서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우리가 구원되는 것입니다. 죄를 생각하고 불안해 하는 것은 노예의 자세입니다. 하느님께선 우리를 자녀로 생각하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자녀는 부모에 대해 불안해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생명은 살리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생명입니다. 그런 아버지의 생명을 따라 아버지의 정신을 따라 사는 것이 자녀의 자세입니다. 또한 자녀는 부모의 사랑에 대해 자신 있어 합니다. 자녀 된 마음으로 자신감을 가지고 하느님 아버지의 생명을 살아갑시다.

 

[경향잡지, 1994년 4월호, 서공석 요한(서강대학교 교수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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