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함 16호]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해 오셨습니까? 예수님이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해 파견되었다(마태 15,24)는 성서의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또 이스라엘 민족과 다른 민족들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해(?) 오셨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해서 파견되었다는 성서의 내용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마태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가문의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습니다. ……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15,24-26; 마르 7,27 참조). 언뜻 보면 이 내용은 마치 이스라엘 민족만이 구원의 대상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은총 가득한 마무리로 끝납니다. “아! 부인, 당신의 믿음이 장합니다. 소원대로 당신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마태 15,28). 자신의 딸을 귀신의 손아귀에서 구해 달라는 가나안 여인의 청원을 결국 어여삐 받아들여 주는 예수님 모습이 더욱 돋보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귀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마르코 복음서를 보면 더욱 뚜렷한 답을 얻을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은 앞에서(마르 7,1-23) 조상들의 전통에 대하여 바리사이들과 격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이 지나치게 전통을 고수하는 경향에 대해 심하게 질책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전통을 세우려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물리칩니다. …… 여러분이 전하는 여러분의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마르 7,8-9. 13). 여기서 그분이 이스라엘의 모든 전통을 뒤엎는 가운데 이스라엘을 우선적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시킨다고 오해한 바리사이들까지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제 그분은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었다고 봅니다. “먼저 자녀들이 배불리 먹어야 합니다”(마르 7,27).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자녀’이고 이방인들은 강아지라는 표현은 하느님이 이루시는 인류 구원 역사[救世史]에서 이스라엘이 차지하는 자리를 잘 드러내 줍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이 우선적 구원의 대상임이 명백해집니다. 위에 설명한 마르코 복음 7장은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해줍니다. 첫째, 이방인들이 결코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부정한 민족이 아니며, 둘째, 이스라엘 영역 밖에도 예수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마르 7,26.28.32). 이러한 이유에서 그분은 자신을 찾는 이방인들한테도 구원의 손길을 펴십니다. “돌아가시오. 바로 그 말 때문에 당신 딸에게서 귀신이 떠나갔습니다”(마르 7,29).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관계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이 이루시는 구원이 먼저 이스라엘 민족에서부터 시작되어 온 누리 뭇민족들에게로 퍼져 나가리라는 내용은 이미 구약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사상입니다. 그 몇 가지 예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에게 복을 비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내릴 것이며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리리라.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업을 것이다”(창세 12,3; 민수 24,8-9 참조).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 민족들은 암흑에 싸여 있는데 야훼께서 너만은 비추신다. …… 민족들이 너의 빛을 보고 모여들며 제왕들이 솟아오르는 너의 광채에 끌려 오는구나”(이사 60,1-4). 또한 하느님께서 인류 역사 안에서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선택하시어 그들을 통하여 인류 구원 사업을 이루셨다는 내용을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9장부터 11장에서 매우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반죽의 첫 부분이 거룩하면 온 덩어리도 그러합니다. 뿌리가 거룩하면 그 가지들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몇몇 가지가 잘려 나가고 그대가 야생 올리브나무로서 그 가지들의 자리에 접목되어 올리브나무의 기름진 뿌리에서 한몫 얻게 되었으니 …… 그대가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그대를 지탱합니다”(로마 11.16-18; 9,25-26 참조). 루가 복음에 보아도 예수님은 먼저 이스라엘 민족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나자렛의 희년 선포는 그 대표적 예입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과연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셨도다. …… 주님의 은혜로운 해(희년)를 선포하게 하시려는 것이로다”(루가 4,18-19). 이스라엘 외의 다른 민족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이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의 예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납니다(루가 4,25-27). 실제 이방인 선교는 사도 바오로에 의하여 꽃을 피우게 됩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당당하게 설교하여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것을 거부하고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합당치 못하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는 셈이니 이제 우리는 이방인들에게로 돌아서렵니다”’(사도 13,46). 인류 구원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한 백성 이스라엘로부터 시작되어, 온누리 뭇민족들에게로 확산되리라는 내용이 요한 복음서에도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즈가리야 예언자가 지상 과제로 삼고 꿈꾸던 ‘새 예루살렘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을 보게 됩니다. “부인, 나를 믿으시오. 당신들이 이 산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될 때가 옵니다. 당신들은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이 유대인들로부터나오기 때문입니다. 과연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게 될 때가 오고 있으니 바로 지금입니다”(요한 4,21-23).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바는 ‘하느님의 보편 구원 의지’입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어 그들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뭇민족들에게 계시하시려고 그들을 도구로 삼으신 것뿐입니다(히브 1,1-4 참조). 묵시록에도 하느님의 이러한 뜻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는 보았다. 보라, 아무도 그 수효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자들인데 흰 예복을 차려 입고 그들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들을 들고서 옥좌와 어린양 앞에 서 있었다”(묵시 7,9). 그 앞에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서 만 이천 명씩 모두 144,000(12지파 x 12,000명)이 이마에 인장을 받았다고 소개됩니다. 이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이 다 구원받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곧 충만함을 뜻하는 숫자들이 모두 결집되어 있음이 뚜렷이 나타납니다. 문제는 그 뒤에 숫자를 알 수 없는 엄청난 사람들의 무리가 모든 민족들에서 다 모여든다는 이 대목에 있습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이, 그 다음으로 뭇민족들(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두 어린양한테로 모여 옵니다. 구원의 풍요로움이 너무도 멋지게 묘사되고 있다고 봅니다. [경향잡지, 1994년 5월호, 신교선 가브리엘(수원 가톨릭 대학 교수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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