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해설] 나는 믿나이다 - 사도 신경 (2) 우리가 흔히 이웃들로부터 듣게 되는 이야기 가운데는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신앙에 관한 내용이 많다. 때로는 불가사의한 신비의 내용도 많지만, 때로는 신앙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미신 행위라는 가혹한 비판의 말도 듣게 된다. 그런가 하면 성당에 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무조건 믿기만 하면 됩니다”라고 답해 버리는 이들도 있다. 믿기 위해선 얼마만큼 알아야 하는가? 신앙과 지성과 의지는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교리 내용을 이해하고서 갖는 신앙과 무조건 믿는 맹신은 구분할 수 있는 것인가? 그 외에도 많은 의문점들을 신앙과 결부시켜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런 구체적인 물음들에 하나하나 답하기보다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한 일반적인 특징들을 몇 가지로 한정하여 실펴보는 것이 여기에선 더 바람직하리라 여겨진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특징 사도 신경을 흔히 Credo(크레도)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라틴어 사도신경의 첫 말마디가 Credo(“나는 믿나이다”)로 시작하기 때문에 그 말을 따서 그렇게 부른다. 그런가 하면 마지막 단어는 Amen(아멘)인데, 구약성서의 허브리말 어원에서는 이 두 말마디가 같은 어원에 속하는 것으로, ‘견고하다 · 항구하다 · 신뢰하다’의 의미를 띠면서, 넓게는 사도신경의 윤곽을 이루고 있다. 이 두 말마디가 윤곽을 이루면서 강조하는 것은 하느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인간의 응답 행위를 특정짓는 데 있다.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은 고백하는 그 신비의 내용 속으로 우리가 깊숙이 동참하여 우리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하며, 신앙은 이론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을 이루어야 함을 뜻한다. 1. 그리스도교 신앙의 일반적 윤곽 넓은 성서적 의미에서 신앙이란 인간이 하느님과 가지는 가본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이런 관계성에서 신앙을 가장 간략하게 고백하는 것을 보면, 구약에선 “야훼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다.”로, 신약에선 “예수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혹은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로 표현한다. 신약성서에서 이러한 신앙 고백의 내용을 좀더 설명적으로 말하는 것을 보면, 믿는다는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구원 행위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제시된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유추해본다면 구원 신앙의 대상 혹은 내용은 계시로써 밝혀진 하느님 자신과 여러 가지 모습으로, 특히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구원 행위이다. 또한 인간이 행위자로서 하는 신앙(신앙 주체)은 회개하고 베풀어진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인데, 이는 계시를 받아들임으로써 그 계시가 품고 있는 내용, 즉 구원 역사를 통하여 자신이 스스로 우리에게 접근해 오시는 바로 그 하느님을 이해하는 데서 따라오는 그분께 대한 인간의 전적인 자기 응답의 태도이다. 그러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 헌장 5항은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신앙의 복종’(로마 16.26; 1,5; 2고린 10,5-6 참조)을 드러내야 한다. 이로써 인간은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지성과 의지의 완전한 순종’을 드러내고 하느님이 주선 계시에 자의로 찬동함으로써 자기를 온전히 하느님께 자유로 의탁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2. 신앙 인식의 특징 과학 기술이 발달된 세계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세뇌시키는 사고 방식은 불가시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야 하며, 학문의 근본 태도는 현상계와 파악될 수 있는 것에만 국한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 방식의 확대에 따라 과거의 인간들이 추구했던 존재의 본질에 관한 탐구는 비생산적인 것으로 일축해 버린다. 그래서 역사 안에서 일어난 사실과 또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것만을 참되다고 여긴다. 예를 든다면 생물학자들은 인간의 기원에 관심을 두는 것보다는 유전 공학을 이용한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는 데 더 관심을 기울인다. 위의 사고 방식에 따르면 과학 기술은 진리를 추구하지만, 신앙은 그것에 반대되는 듯이 이해된다. 그러나 분명 신앙도 진리에 관계된다. 신앙이라 해서 결코 바이성적이고 맹목적인 행위가 아니다. 신앙 역시 이해와 통찰과 인식을 지향한다. 하지만 신앙은 사랑과 신뢰 안에서 인격적인 경험을 의미하는 인식이란 점에서 과학 기술 분야에서 가지는 진리 탐구와는 차이가 있다. 3. 신앙은 신뢰의 행위 분명 신앙의 분야는 자연 과학 분야와는 다른 세계를 추구한다. 믿음은 주어진 것을 초월하는 삶의 모험이며, 보이는 것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은 미리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보장이 아니라, 신뢰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라 하겠다. 신앙은 단순히 교의의 명제들이나 신앙 조목들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말들이 그분으로부터 나오고 또 그분께로 향하는 그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신뢰는 우리의 신앙에 영혼을 부여하는 것과 같다.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이 없을 때 신학 명제들이나 신앙 조목들은 영혼이 없는 인간 육신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신앙이란 우리가 온몸으로 하는 “실제적 동의”이지 머리로서만 하는 “개념적 동의”가 아니라고 뉴만 추기경은 말한다. 인간 서로를 결속시켜 주는 믿음 안에서도 신뢰가 중요함을 우린 알고 있다. 나의 부모는 나의 부모였고 또 그것은 사실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나의 부모의 증언이 믿을 만하다고 신뢰하기 때문에 이러한 사설을 믿는다. 그래서 나는 나의 부모를 믿으며 또 나의 존재의 근원자로서, 나의 행복을 지켜 주시는 분으로 그들을 신뢰한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과 그분은 우리를 위한 분이라는 사실을 믿기에 우리는 그분을 신뢰한다. 알아듣고 사랑하도록 우리를 부르시고, 또 우리의 정신을 비추어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타오르게 하시는 하느님을 우리는 믿는다. 4. 신앙은 행동을 수반한다 우리는 복음을 우리의 신조로써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활로써 전파한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를 하루 종일 따라다닌다면, 그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의 믿음을 발견하게 된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진리를 추구하고, 선을 보호하며, 아름다움을 소중히 여기는 이들이 하느님을 믿는다고 여긴다. 그들의 지식이 깊지 못하다 해도 그들은 훌륭히 신앙을 선포한다. 반대로 하느님에 관해서는 청산 유수처럼 말은 해도 자기 생활 안에서 하느님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이는 입술 신앙에 불과하다. 사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랑하기를 시작하는 것을 수반한다. “만일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요한 4,20). 우리가 말로써 신앙을 고백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선포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야고보 사도가 서간에서 말하는 바대로, 살아 있는 신앙은 좋은 일을 탄생시키며, 그렇지 않으면 신앙은 죽은 것이다. 일만으로 우리를 정당화시킬 수는 없지만, 우리는 일함으로 정당화한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알았다면, 우린 하느님의 사랑을 살아간다. 신경이 윤리 계명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나는 믿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올바르게 알아듣는다면, 말 안에서 믿는다는 것은 또한 행위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5. 신앙은 인격적이다 Credo(“나는 믿는다”)라는 말의 어원을 “자신의 마음을 주다.”라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찾는 신학자도 있다. 나의 마음을 준다는 것은 바로 신뢰이고 또 사랑이다. 신뢰하고 사랑하는 이런 신앙은 추리적 결론보다는 혼인 계약에 더 가깝다. 혼인 약속의 제의에 동의를 하는 응답이나 신앙의 제의에 동의를 하는 응답은 같다. 예를 들어 “나와 함께 혼인하겠소?” 하는 제의나 “나를 따르겠소?”라는 예수님의 제의는 같은 것이며, 이런 요청에 “아니오”라고 응답할 수 있는 길은 많지만, “예”라고 응답할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답할 수 있는 길은 하나도 없다. 여기에서 본다면 믿는다는 것은 인격적임을 알 수 있다. 혼인 계약에 유비해 생각해 본다면, 한 인격체인 인간과 다른 한 인격체인 하느님의 만남이 곧 신앙이다. 이러한 신앙의 만남은 나의 인격을 온전히 ‘너’에게 맡기는 것에서 성립되므로, 참된 신앙이란 ‘너’에 대한 나의 온전한 자아 봉헌이라 하겠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께 전적으로 내맡길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와 함께 계신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자기를 온전히 내어 주시는 그 하느님께 신앙을 통하여 기대지 않는다면, 그분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하느님이 나를 도와주시고 나와 함께 계시는 분이심을 입증할 길이란 없다. 이를 위해 묵은 자신을 포기하고 새로운 만남을 향해 도약하는 행위가 요구된다. 6. 신앙의 종말적 특징 또한 혼인 약속의 특징이 일생을 두고 서약하듯이, 신앙도 ‘신뢰 - 지속성’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고 시작하는 히브리서 11장은 신앙의 모델이 되는 구약의 인물들을 소개한다.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극한 한계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하느님께 신뢰를 둠으로써 새로운 삶의 행진을 한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삶의 십자가 아래 정지해 버리는 신앙이 아니라 부활의 약속을 향해 방향을 잡는 종말적 신앙이 우리의 신앙이다. 그러기에 나의 삶 안에서 끊임없는 탈출, 출애굽의 행진을 계속해야 한다.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결코 굳건히 서지 못하리라.”(이사 7,9). 하여튼 우린 믿기 위해 먼저 믿어야 한다. 하느님께 대한 물음을 던질 때 그 물음의 방향은 실제적으로는 우리 자신의 존재 안에 하느님께서 부여해주신 물음에 응답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린 우리 스스로가 결코 우리 자신의 존재 근거가 아니기 때문이며, 우리는 하느님을 떠난 독립되고 완전한 절대적인 출발점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경향잡지, 1993년 10월호, 하성호 요한(주교회의 사무차장 · 본지 주간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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