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해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하느님 아버지, 착한 당신의 아틀 요한이를 살려 주세요. 하느님께선 전능하시기 때문에 예수님도 다시 살리셨잖아요. 하느님, 당신은 하시고자 하시면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잖아요” 이글을 쓰려고 하니, 교통사고를 당해 죽은 남편을 살려 달라고 감실을 붙들고 애걸복걸하던 루치아 자매님의 울부짖던 모습이 몇 년이 지났는데도 머리 속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이렇게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거나 죽은 사람을 살려 주시는 것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의 전능인가? 우리는 어떤 감정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가? 그분을 전능하신 분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하늘과 땅의 창조주라는 고백이 내 삶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느님은 아버지이시다 어려서부터 성당에 다닌 사람은 성부라고 하면 왜 그런지 잿빛 수염을 기른 근엄한 모습의 할아버지를 떠올린다. 하느님을 꼬부랑 할머니로 그린 그림을 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최신식’ 여성들은 하느님을 어머니라 하지 않고 아버지라 해서 울화통이 터지는 모양이다. 성서에서는 하느님을 여성(특히 어머니)으로 비유하는 대목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을까? 다신론적인 타종교에서 신들 가운데 최고의 신을 남성으로 표현하기 때문일까? 구약에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나 ‘압바’라고 부른 적은 없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역사와 관계가 있다. 예수님은 세례받으실 때와 거룩한 변모 때에 “하느님의 아들”로 불리고 여기서 하느님은 ‘아버지’로 선포된다(마르 1,11; 9,7). 다시 말해 성서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른 것은 무엇보다도 지상에 계신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하느님과 자신의 깊은 관계, 하느님께 전권을 받은 관계를 드러내실 때 하느님을 압바 · 아버지라고 불렀다(마르 14,36; 마태 11,25 이하; 루가 23.34; 요한 11,41; 14,9; l7,1 이하 등). 예수님은 그렇게 부르면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 당연히 전권자의 임무를 수행하셨다. 다시 말해 자신의 전생애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를 보여 주셨다. “나를 보는 사람은 아버지를 보는 것”(요한 14,9 참조)이라고 말한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의미이다.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신약의 하느님은, 인간을 찾아, 인간을 향해 직접 찾아 나서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바로 ‘임마누엘’이시다. 자식에게 보고 싶으니 오라고 전화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식을 찾아 길을 떠나시는 분이시다.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그 인간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놓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아버지이시다. 하느님께선 우리 인간에게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하고 살맛나는 생을 허락하심은 물론이요, 우리가 당신의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당신의 성자를 우리에게 내어 놓으셨고, 그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신의 생명을 바쳐 이를 수행하였다. 아무리 사람이 애완용 강아지를 사랑한다 해도 강아지가 될 수는 없다. 창조주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부서지기 쉬운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게 하셨다는 사실도 엄청난 사랑이거늘, 하물며 성자이신 예수님은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는 것을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몸소 보여 주셨으니, 이 얼마나 위대한 하느님의 사랑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선 가부장적인 권위를 내세우시는 분이 아니다. 이는 잃었던 아들의 비유에서도 잘 드러난다. 돌아오는 방탕한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를 보라. 아들은 온갖 변명의 말을 찾으면서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데 반해, 아버지는 그런 자식을 괘씸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향해 무조건 뛰어나가시는 분이시다. 아버지가 보여 주신 사랑에서 ‘무조건’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그분의 사랑은 똑똑하다고 자처하는 인간들의 판단이나 논리를 무색케 하신다. 바로 이분이 예수께서 압바 · 아버지라 부르신 하느님 아버지이시다. 이러한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모습을 아버지의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증거하셨고, 아버지는 아들의 부활을 통해 자신과 아들의 전권의 관계를 증거해 주셨다. 물론 불의와 악에 대해 진노하시고 정의로운 심판관이신 하느님이시지만, 우리에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신 것에서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일에 얼마나 적극적인 자세를 지니시는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동시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특권(마태 6,9; 루가 11,2; 로마 8,15 참조)을 가졌다. 그렇다면 우린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예수께서 하느님을 압바 · 아버지라 부르시면서 사셨던 생활 모습, 즉 자신의 생애를 통해 아버지를 보여주셨던 그 삶을 따라 우리도 살아야 한다. 그 길은 우리에게 생활 속의 십자가로 드러나며, 십자가의 길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내 삶을 통해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나 하느님을 목말라 하는 사람에게 하느님 아버지를 보여 줄 수가 있다. 하느님께선 전능하신 분이시다 “하느님께선 전능하시다.”는 표현은 지배하는 힘이 어느 정도인가를 저울질하는 표현이 아니다. 하느님이 전능하시니 ‘개’를 ‘돼지’로 만들 수 있느냐고 핏대를 올리며 싸움질하던 어린 시절의 신학 논쟁이 기억난다. 그런 의미의 전능이 아니다. 하느님은 만물에 대해 완전한 통치권을 가지신 분이시라 인간이 원하는 대로 왔다갔다 하는 줏대 없는 양반이 아니다. “하느님께선 전능하시다.”는 것은 믿음의 표현임을 염두에 두어야겠다. 그럼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느님께선 전능하시다.”는 것은 하느님은 원하시기만 한다면 모든 일을 다할 수 있다는 뜻에서 이 고백을 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치하신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의 이단자들이 물질 세계를 다스리는 악한 하느님과 영적 세계를 다스리는 사랑의 하느님[알지 못하는 하느님]이 있다고 주장하던 이단을 반박하면서, 영적 세계뿐 아니라 이 세상[물질 세계]을 다스리시는 분은 아버지 하느님 오직 한 분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힘의 가능성’이 아니라 보호하고 다스리고 돌본다[섭리하신다]는 의미를 우선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원래 이 말이 신경에 쓰일 때는 그리스어였기 때문에 ‘만유의 주’(Pantocrator)로 쓰였지 ‘전능하신’(형용사)이란 말이 쓰인 것이 아니다. 이 두 말에는 큰 차이가 있다. ‘만유의 주’는 어떤 존재 자체를 의미하지만, ‘전능하신’은 어떤 존재의 속성 가운데 하나를 말하는 것이다. 구약의 예를 들어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만유의 주’는 구약에서 야훼 하느님의 칭호로 ‘만군의 주’로 표현되었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관계가 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선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음의 종살이에서 새로운 자유의 생활로 이끌어 주신 분이시며, 어떠한 역사적 시련이 닥치더라도 자신이 택한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자유로 이끌어주실 분이심을 고백하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전능은 바로 역사의 현장에서 백성들을 해방시켜 주시는 분, 또 역사의 참된 주관자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유산을 이어받고 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화된 것을 사도 신경은 ‘전능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고백한다. 즉 출애굽 사건에서 하느님의 전능이 종살이의 땅에서 약속의 땅[해방]으로 옮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관련지어 볼 때, 이는 참된 이스라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구체화됨을 알 수 있다. 사람을 죽이는 세상 권력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 해방시키는 하느님의 전능은, 인간을 버린 자식 취급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내어 주시고 생명까지 바치게 하심으로써 만물을 해방시키는 사랑의 하느님으로 구체화되었으며, 당신 아들의 부활로써 이를 입증했다. 여기서 하느님의 전능은 인간을 비롯한 만물을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고백하는 표현임을 알 수 있다. 하느님께선 생명을 주시는 힘이시고, 능력 있는 아버지이시며, 자녀들을 행복으로 이끌어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사랑은 힘[창조]이고, 하느님의 힘은 사랑[섭리]이다. 하늘과 땅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사도 신경에 나오는 ‘하늘과 땅의 창조주’란 부분이 ‘세례 문답 형식의 신경’이나 ‘고대 로마 신경’에는 나타나지 않는 반면, ‘니케아 콘스탄티노폴 신경’에는 “유형 무형한 만물”(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첨가 부분까지 있다. 이 변화들이 일어난 배경이 무엇일까? 앞에서 언급한 그 이단자들을 공박하기 위해서이다. 당시 영지주의에 물든 이들은 구약의 하느님과 신약의 하느님을 구분하면서, 구약의 하느님은 나쁜 하느님으로서 물질 세계를 창조했는데 이 물질 세계 역시 나쁘다고 했다. 여기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하느님이나 신약의 하느님은 오로지 한 분으로 같은 분이시며, 하느님께로부터 창조된 모든 것은 좋은 것이라는 그리스도교의 믿음을 재확인했다. 사실 ‘하늘과 땅의 창조주’란 고백의 내용은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신앙 고백의 보충문이다. 고독 속에 홀로 계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계시려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새로운 현실이, 모든 존재가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창조는 시작이지 완성이 아니다. 또한 창조의 기초가 되는, 더불어 함께 계시려는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기에 창조된 모든 것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다(창세 1,31 참조). 하느님의 뜻에 따라 창조된 모든 존재는,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자기 안에 자기 존재의 바탕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바탕을 하느님의 창조 의지 안에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자칫 하찮게 여길 수 있는 내 존재지만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작품이니 얼마나 소중한가!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일어나는 환경 보전 운동의 소중함도 바로 창조 신앙에 근거할 때 비로소 그 가치가 더욱 빛날 것이다. 또한 ‘하늘과 땅’이란, 극과 극을 연결하는 표현으로 보이든 보이지 않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서 하늘과 땅은 분명 다르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땅[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세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세계]도 있다는 사실은, 물질 만능주의에 물든 우리들을 환상의 세계에서 깨어나게 한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는 고백을 절실하게 외칠 때, 세상은 제 위치에서 고유한 자신의 가치를 찾고, 우리의 삶도 새로운 의미와 가치로 이끌어질 것이다. [경향잡지, 1993년 12월호, 하성호 요한(주교회의 사무차장 · 본지 주간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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