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해설]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이다 ‘예수쟁이”라면서 그리스도인들을 얕잡아 보는 이들과 “예수”라는 이름만 들어도 경건함을 느끼는 이들 사이에, “예주”라는 이름은 엄청나게 다른 의미를 갖는다. 어떤 이들에게는 별볼일 없는 분인가 하면 어떤 이들에겐 전생애를 바쳐 신봉하는 분인 것이다. 도대체 그분의 정체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 사도 신경의 첫 조항에는 일반적인 신(神)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계시하신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짧게 얘기하고 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밝혀 주신 하느님은 우리가 “아버지” 혹은 “압바’라 부르는 하느님이시며, 책장 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인간이 숨쉬는 곳 어디서나 경험할 수 있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그렇다면 그런 하느님 아버지를 우리에게 밝혀 주신 예수라는 분은 도대체 누구인가? 예수라는 분을 우리가 알아듣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분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따를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사도 신경의 두 번째 조항은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로 시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 신앙을 고백한다. ‘예수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 예수’라는 표현에서 ‘예수’는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칭호인데,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가장 잘 드러낸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리스도교 신앙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해설이 교리의 핵심과 기초를 이루며, 그분께 대한 자기 결단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결정짓는다. “이분을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 ‘예수’라는 이름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부르던 ‘야훼’라는 신비스런 하느님의 이름과 ‘구원하다’라는 두 말이 복합되어 이루어진 이름이다. “야훼께서 구원하시다.”는 의미의 이름은 히브리식으로는 ‘여호수아’이고, 이를 그리스식으로 표기하는 데서 ‘예수’로 변화되었다. 이 이름은 구약이나 예수님 당대에 불린 일반적인 이름 가운데 하나다. 구원의 구체적인 역사는 수많은 다른 ‘여호수아’나 ‘예수’라는 인물들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마리아라는 한 여인에게서 태어난 나자렛 출신의 ‘예수’ 바로 이분과 관련이 있다. 나자렛의 예수는 로마의 지배를 받던 갈릴래아의 한 마을에 살던 평범한 주민이었다. 그분은,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당대에 자타가 공언하던 유명한 율법학자들과 지도자들의 논리를 반박하여 그들의 말문을 막았으며, 아픈 사람을 고쳐 주는 신통한 위력을 보이심으로써 한쪽에선 그분을 왕으로 추대하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그분은 백성들의 지도자들의 미움을 받아 결국 하느님을 모독한 죄의 누명을 쓰고 십자가에 처형됨으로써 짧은 삶을 사셨다. 이분의 마지막 몇 년의 생애가 우리에게 비범하게 전해지고 또 그렇게 해석된다. 또한 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쓰여진 이름이 구체적인 구원 역사와 관련된 인물일 경우에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성서에서 특이한 상황과 연결된 이름은 그 사람의 운명과 관계된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 이야기 중 그의 이름을 짓는 부분을 보면, 그의 탄생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안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가 있다(루가 1,57 이하 참조).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 탄생의 경우도 평범한 한 인간의 탄생이 아님을 그 이름조차 말하며, 아기의 우연히 조상들의 이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명령으로 요셉과 마리아에게 미리 주어졌음을 전한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아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마태 1,21). 이렇게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의 이름 짓기에서부터 삶과 업적 등 예수님의 운명을 규정하면서 이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임을 말한다. 예수님의 이름은 “야훼께서 구원자이시다.”라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핵심되는 신앙 고백이다. 구약을 통해 제시되고 약속된 하느님의 구원이 이제 바로 나자렛의 예수를 통하여 결정적으로 성취된다. 구약을 통하여 야훼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신 구원의 길을 신약의 예수께서 완성하신다. 이분이 완성시켜 주시는 구원의 길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단절시켰던 죄를 용서함으로써 성취된다. 나자렛의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질 이러한 구원 계획이 이미 그의 작명에서 밝혀졌음을 마태오 복음 사가의 해설에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한 인물을 통하여 역사적이고 종말적인 구원 희망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나자렛 예수라는 인물과 그의 생애, 특히 그의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그를 하느님의 아들로 말하는 것은 신성 모독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분의 십자가 죽음은 자신들의 생각을 뛰어넘어 그분에게서 하느님의 임재를 발견할 수 없게 하는 걸림돌이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1고린 1,23). ‘그리스도’(메시아)란 호칭의 의미 초대 교회 때부터 주님을 ‘예수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 예수’라고 불렀다. ‘그리스도’는 ‘나자렛 예수’라는 분에게 주어진 칭호이다. ‘그리스도’(christus)란 말은 ‘메시아’(masiah, mesiha)란 히브리말이나 아람말을 ‘크리스토스’(christos)란 그리스어로 옮기고, 다시 라틴어로 표기한 단어로서, ‘도유된 이’ 즉 ‘하느님의 도유를 받은 이’를 의미한다. 그리스도 - 메시아란 말은 원래 옛 이스라엘 왕국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하나의 특정 칭호로서, 주로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 왕조의 왕을 ‘야훼의 도유받은 자’로 해석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 개념은 차츰 타민족의 속박에서 벗어나 정치 종교적으로 유다 왕국을 해방시켜 줄 메시아 사상으로 발전한다. 이는 유다 백성이 바빌로니아 유배를 비롯한 숱한 외침과 타민족의 속국이 되는 쓰라린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다윗왕 시절을 회상하며 다시 한번 그런 왕정이 재건되기를 희망하는 가운데 발전되었다. 구약 말기에는 예언직, 왕직, 사제직에 해당하는 각각의 메시아관이 대두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에 관한 전승들을 살펴볼 때, 그러한 정치 종교적 메시아 사상을 예수께서는 받아들이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그분의 직무와 활동은 당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상에 상응하지도 않았다. 그리스도인들과 유다인 사이에 벌어진 논쟁에서 바로 이 점이 상당히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음을 예수 유혹 사화(마태 4,1-11)나 예수 신원을 둘러 싼 논쟁(요한 7,25-31; 8-10장)에서 엿볼 수 있다. 또한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과 예수의 첫 번째 수난 예고(마르 8,27-33)에서는 전통적인 정치 종교적 메시아상과 십자가에 못박힐 메시아상이 서로 대립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하여 예수의 메시아성을 선포하게 되었는가? 제자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 희망을 예수라는 인물에 부여시킨 조작일까? 아니다. 그들은 예수의 생애와 역사를 통해 이사야 61장 1절의 말씀을 재조명하고 ‘기름 부음 받은 이’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인식하였다. “주 야훼의 영을 내려 주시며 야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고 나를 보내시며 이르셨다. 억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찢긴 마음을 싸매 주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알려라. 옥에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루가 4,18-19; 마태 5,3-4 참조). 예수의 메시아성을 이해하게 되는 중요한 관건은 죽음에 대한 해석이다. 예수 수난사가 전해 주는 것에 따르면 예수는 빌라도에 의해 ‘유다인의 왕’(요한 19,19), 즉 메시아로 공포되고 처형당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그분의 메시아성을 거부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메시아에 관한 유다인들의 사상을 뒤집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다. 이는 십자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 현양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고백을 내포한다. 다시 말해 예수의 메시아성을 이해하는 바탕은 언제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다. 여기서 우린 예수께서 가지셨던 메시아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예수님은 화려한 영광이 아니라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택함으로써, 참된 그리스도는 힘으로 지배하지 않고 봉사로써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보여 주셨다. 그분은 참된 메시아로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을 성취하실 분이셨지만, 서슬이 퍼런 칼을 든 분이 아니라, 죄많은 인생들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놓으신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이사 42,19; 49,1-6; 50,4-9; 52,13-15)의 모습을 택하신 분이다. 세례 때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스런 아들로 선포되고 성령에 의해 도유되셨지만, 신성 모독죄로 십자가에서 비참한 모습으로 죽으셨다.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요한 19,19)라고 빌라도가 써붙인 조소적인 십자가의 명패가 바로 참된 메시아가 이 세상에서 당할 운명이 무엇이었는지를 말해 주었다. 세상이 버린 이들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주시는 하느님의 통치는, 바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놓는 참사랑의 봉사에 있음을 모범적으로 보여 주셨다. 앞으로 계속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인가를 살펴보겠지만, 우선 십자가에 처절하게 못박히신 나자렛 예수의 모습 안에서, 인간을 그토록 사랑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사도 신경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신앙 고백인 것을 명심하자. 다시 한번, 나에게 과연 예수가 그리스도인가를 되물어 보고 우리의 신앙을 곰곰이 돌아보자. [경향잡지, 1994년 1월호, 하성호 요한(주교회의 사무차장 · 본지 주간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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