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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교리 해설: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5 조회수2,605 추천수0

[교리 해설]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있다. 예수께서도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자신의 명을 다하지 못하고 불명예스런 십자가를 동행한 이름을 남겼다. 사람들은 명예를 위해 인생을 살아가는데, 예수는 십자가의 치욕스런 죽음을 향해 인생을 살아갔다. 예수의 인생길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인간이시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성신으로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란 사도 신경의 부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자의 육화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육화를 보았으니까, 이젠 그분의 인간성을 살펴볼 차례이다.

 

성서에선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4장 4절은 “때가 찼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셨으니, 그이는 한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된 것입니다.”고 말한다. 또한 로마서 1장 3절은 “그분은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부터 태어나셨으며”라고 하였고, 요한 복음 1장 14절은 “정녕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서 거처하셨다.”고 하였다.

 

때가 되어 한 여인에게서 인간으로 태어나신 그분은 자신의 생애 대부분은 공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살다가, 마지막 몇 년 동안 ‘자신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자신이 메시아라고 자처하다가 유다 지도자들에 의해 고발당하여 예루살렘에서 본시오 빌라도의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힌 자’이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분을 선포하는 것이 초대 교회의 사명이었다. 고린토 전서 1장 22절부터 23절은 “사실 유다인들은 표징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처형되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고 하였다. 신약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 특히 그분의 죽음과 관련된 대목에서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지니신 분이심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문제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신약 성서는 분명히 말하고 있지만 그리스도론이 발전하면서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부인하거나 약화시키려는 이단들이 속출하기도 하였다. 그들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영지주의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적인 요소들은 가치도 있고 좋은 것으로 보았지만 물질적인 것은 악한 것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인간의 육신도 물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나쁜 것으로 보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영지주의에 물들어 있던 사상가들은 자꾸만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약화시키고 은폐시켜 버리려는 유혹을 받게 마련이다. 그 결과 어렸을 때 재미있게 들었던 ‘도깨비’ 이야기와 비슷한 ‘예수 가현설’(假現說) 같은 이단이 나오기도 하였다. 도깨비는 잡된 귀신이기 때문에 원래 육신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사람의 형상을 하고 나타나 사람을 호리기도 하고, 짓궂은 장난을 치기도 하는 하나의 허상이다. ‘예수 가현설’을 주장하는 이들도 이 세상에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형상을 한 가짜 인간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오류에 반대하여 성자께서는 참으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요한 복음사가는 “살”(요한 1,14)이란 단어를 사용하면서 ‘예수 가현설’을 논박한다. 이렇게 사도 시대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의 아들이 “육화하여 오셨다”(1요한 4,2)고 하는 참된 강생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451년에 열렸던 칼체돈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신성에서 완전하시고 인성에서 완전하시며 참 하느님이시고 이성적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참 인간이시며, 신성으로는 아버지와 일체이시고 인성으로는 우리와 일체이시며 ‘죄 외에는 모든 일에서 우리와 똑같으시다’(히브 4,15).”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 헌장 22항은 “하느님의 아들은 인간의 손으로 일하셨고 인간의 지력으로 생각하셨고, 인간의 의지로 행동하셨으며 인간의 마음으로 사랑하시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참으로 우리 중의 한 사람이 되셨으며 죄를 빼고서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으셨다.”라고 말한다.

 

아무튼 예수의 인간성을 약화시키려 하거나 은폐시키려 하던 유혹을 물리치면서 그분은 참 인간이셨고 또 인간으로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고 그리스도인들은 고백한다.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고성소에 내리셨다.”라는 사도 신경의 간결한 표현은 그분의 인간성을 상징화하려는 일체의 시도를 용납하지 않는다. 사도 신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고난, 죽음, 시체라는 엄연한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우리에게 증거해 준다. 다시 말해 고난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한 인간의 현실이 그리스도교 신앙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말해 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 강조 이유

 

다른 종교에서는 보통 자신들의 신앙의 대상을 인간이라고 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설령 이 세상에 살았던 한 인물이라도 애써 신격화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한사코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고 고집스럽게 강조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교의 ‘구원관’에 기인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창조의 꽃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으며, 늘 그 인간과 함께하시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늘 인간을 만나러 오셨고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신 분이시라 당신을 언제나 인간에게 송두리째 주셨으며 마지막엔 당신의 아들까지 인간 세상에 보내셨다(히브 1,1-2 참조). 인간이 되신 그분은 다른 종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역사 밖의 먼 곳에서 원격 조종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 역사 가운데 오심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인간을 늘 만나시는 분이시다. 하느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그 사실 자체가 바로 우리에겐 구원이다.

 

구원은 인간의 삶 전체와 관계되는 것이며, 결코 인간적인 삶의 어떤 부분들이 그분과의 만남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성자께서 인간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은 우리 인간 구원을 위해서는 아주 중요하다. 그분이 구체적인 인간이 되셔서 인간의 역사 안에 탄생하시지 않으셨다고 가정한다면, 다른 종교가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구원자께서 역사 안에 개입하심을 말하였고, 신약은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말한다. 이제 그분이 인간이 되셔서 역사 안에 현존하시므로 하느님께서는 “마치 친구를 대하듯이 인간들과 담화하시고 또한 그들과 함께 상종하신다”(계시 헌장, 2항).

 

사도 신경이 그리스도의 사생활과 공생활에 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단지 강생과 파스카의 신비(죽음, 부활, 승천)에 관해서만 말하고 있음을 알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사실 그리스도의 강생과 파스카의 신비가 그분의 지상 생애 전체를 밝혀 준다. “처음부터 승천하신 그날까지 …… 예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모든 것”(사도 1,1-2)은 바로 그분의 탄생과 파스카의 신비에 비춰 봐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하여 말하는 사도 신경의 조항을 이해해야 한다.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사도 신경 안에 동정 마리아와 본시오 빌라도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 신앙의 모델이신 동정 마리아가 사도 신경의 중심부에 등장하는 것은 은총의 순간처럼 느껴지지만, 본시오 빌라도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대쪽같이 밀고 나가지 못하고 인기에 야합하는 기회주의자처럼 느껴진다.

 

역사적인 문헌에서 빌라도라는 인물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로마 제국이란 거대한 정치 세계에서 별볼일 없고 골치만 아픈 한 지역의 총독에 불과하였다. 빌라도는 자신이 맡은 직책 때문에 팔레스티나 지방의 주민들로부터 원수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루가 복음이 전하는 내용을 보면 그의 모습은 잔악한 지배자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바로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는 갈릴래아 사람들의 일을 예수께 알려 드렸다. 사실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했던 것이다”(13,1).

 

빌라도는 이런 잔인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또 다른 면에서 유약한 타협적인 관리의 인상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 모습은 자신의 직책 때문에 관련된 예수라는 인물을 재판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당시 유다 백성의 최고 의회 지도자들인 대제관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예수를 고발하여 빌라도가 재판을 하도록 한다. “그러자 빌라도는 ‘여러분이 그를 데리고 가서 여러분의 법대로 심판하시오.’ 하고 말했다. 유대인들이 그에게 ‘우리는 아무도 죽여서는 안됩니다’ 하고 말했다”(요한 18,31).

 

빌라도는 예수를 심문했으나 그의 죄목을 찾지 못한다. “사실 나는 그에게서 죄목을 찾아내지 못하겠소”(요한 19,6). 빌라도는 무고한 예수라는 한 인물을 처형하기를 주저했지만, “군중의 비위를 맞추기로 작정해 그들에게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는 채찍으로 매질한 다음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넘겨주었다”(마르 15,15). 살인자를 놓아주고 무죄한 자를 처형하도록 한 그의 행위는 로마법의 기본적인 정신마저 짓밟아 버렸다. 정치판에서는 ‘야합’이 승리하고 ‘대쪽’은 매장되는 법!

 

하여튼 빌라도라는 인물을 여기서 살펴보는 것은 그의 오판을 나무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구원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의 구원사에는 동정 마리아와 같은 거룩하고 순결한 인물만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엘리트들의 활동 무대도 아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연약한 여인들의 이야기를 보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역사를 꾸며 내지 않고, 역사 현실을 신앙 안에서 수용한다. 빌라도의 재판으로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기 때문에 빌라도라는 인물은 곱든 밉든 구원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경향잡지, 1994년 7월호, 하성호 요한(대구 가톨릭대학교 교수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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