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믿나이다] 그리스도인의 삶
인간의 존엄함과 인류 공동체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제3편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루는데, 지난 호에서는 제3편 제2부 ‘십계명’을 성찰하였다.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요약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느님을 인간의 도구로 삼고, 사람 대신에 ‘시장’을 섬김으로써 십계명이 자칫 우상숭배의 빌미가 될 수도 있음을 살펴보았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라는 표현이 있다. 여러 배경을 갖는 표현이긴 하겠지만, 어느 경우나 세상과 사람에게 해악을 끼쳤음을 전제하는 말이다. 신앙의 언어로 이야기하면, 하느님을 도구로 전락시키거나 밀어내면 필연적으로 인간의 존엄함과 공동체를 파괴한다고 할 수 있다. 이번 호에서는 인간의 존엄함을 증진하고 인류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임을 교리서 제3편 1부의 내용으로 살펴보려 한다. 1. 인간의 존엄함 증진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모습을 너무나 쉽게 볼 수 있다. 피부색, 민족, 성 따위의 기준으로도, 종교, 전통, 국적 따위의 기준으로도, 직업, 신체조건, 사상 따위의 기준으로도 차별받지 않아야 함에도 현실에는 온갖 차별이 존재한다. 관습과 문화뿐만 아니라 제도와 법으로도 차별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나라에는 수십만의 외국인 노동자와 결혼 이민자가 있다. 단지 그가 가난한 나라 출신이라서, 피부색이 백(?)색이 아니라서 그리고 노동자이거나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받는 수모는 열거하기조차 부끄럽다. ‘양극화’라는 용어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어른들만의 어려움이라면 그나마 괜찮다. 책임을 물을 수 있고, 넘어설 수 있는 힘이 있으니 말이다. 양극화가 예사롭지 않은 것은 더 큰 고통을 물림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등교육의 기회 박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편부, 편모, 조손 가정이 허다하며, 학교 급식이 끊기는 방학이면 학원은 고사하고 끼니를 거르는 아이들이 수도 없이 많다. “고아와 과부의 눈에서 눈물 흘리게 하지 말라.”는 야훼 하느님의 말씀은 최소한의 공동체와 국가의 의무임에도, 하느님의 호소에 귀를 막고 무죄한 아이들의 신음소리를 경쟁력이니 실용이니 하는 그럴듯한 말로 덮어버린다. ‘인간답게 살 권리’는 결코 사람이 만들어낸 창작물이 아니다. 국가가 만들어준 것도 아니다. 사람이라는 그 사실 하나 때문에 지니는 권리이다. 하늘이 준 권리라 하여 ‘천부(天賦)의 권리’라고도 한다. 이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절대적 권리라고 하는 것인데, 이 절대적 권리(인격)는 바로 인간의 존엄함에서 나온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주를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다. 구속자이시며 구세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원죄 때문에 인간 안에서 일그러진 하느님의 모상은 그 본래의 아름다움이 복원되었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고귀한 품위를 지니게 되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701항. 이하 교리서로 표기함). 교회는 인간의 존엄함의 근거를 ‘하느님의 모상’과 ‘그리스도의 강생과 죽음과 부활’에서 찾는다.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겉모습을 닮은 것으로 이해한다면 대답하기 곤란한 물음에 부닥친다. 하느님이 남성이냐 여성이냐 하는 것이다. 유치하게 들리겠지만 이 같은 이해는 역사 속에서 남녀차별을 가져온 여러 근거 가운데 하나로 작용하기도 했다. 하느님을 남성으로 간주하고 이를 바탕으로 여성을 비하하거나 남성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을 겉모습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사람이 하느님을 닮았다고 고백할 때에는 겉모습 때문이 아니라, 사람만이 지니고 있는 불멸의 영혼, 이성과 지성, 양심, 자유의지 같은 본성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이를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사람에게는 불멸의 영혼이 있다. 사람은 자연의 한 조각이거나 인간 사회의 무명의 요소일 수만은 없으며 그 내면성으로 만물을 초월하는 존재이다. 사람은 하느님에게 지성의 빛을 나누어 받음으로써 진리를 탐구하고 발견한다. 사람의 지적 본성은 현상에만 한정하지 않고 현상 너머의 실재를 인식할 수 있다. 사람은 하느님께서 자기 마음에 새겨주신 도덕적 양심으로 선을 사랑하고 실행하며 악을 회피하도록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이 양심의 법에 복종하는 것이 곧 인간의 존엄이다. 마지막으로 참자유(의지)는 인간 안에 있는 하느님 모습의 탁월한 표징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의식적이고 자유로운 선택(의지)에 따라 행동하도록 요구한다(사목헌장 14-17항 참조). 사람은 불멸의 영혼으로 만물을 초월하며, 이성과 지성을 갖고 진리를 탐구하며, 양심에 따라 선과 악을 구별하며, 자유의지로 행동할 수 있기에 하느님을 닮은 것이며, 바로 그 때문에 존엄하다. 게다가 교회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죽음과 부활 때문에 그 무엇보다도 존엄하다고 가르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참인간이 되셨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인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것이다.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죽음에서 해방되었다. 생성 소멸하는 세상 사물처럼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초대를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에 초대를 받은 존재이기에 사람은 존엄하다. 인간의 존엄함을 증진하는 것은 신앙 행위이다.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성령 안에서 생활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인간의 존엄함을 꽃피우는 것이 곧 고백을 몸으로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예를 든 경우로 돌아가 보자. 외국인 노동자와 결혼 이민자들의 존엄함과 인간답게 살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신앙인의 눈으로 보면, 곧 하느님의 모상을 짓밟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강생과 죽음과 부활을 욕보이는 것이다. 한마디로 불신앙이다. 국적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르며, 신분이 다르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불멸의 영혼, 이성, 양심, 자유의지를 심어주지 않았다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빼놓고 구원하고자 강생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고 할 수는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2. 인류 공동체 : 공동선, 보조성, 책임과 참여, 사회정의 너무나 익숙하기에 독자에게는 생소한 제도로 들리겠지만 우리에게는 모든 의료기관이 건강보험 환자를 거절할 수 없도록 하는 ‘건강보험 당연지정 제도’라는 것이 있다. 건강보험은 국민의 의무이기 때문에 모두가 가입해야 하고, 그래서 가난하든 부자든 어느 병원에 가더라도 보험을 통해 같은 돈을 내고 같은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제도 때문이다. 개인이 짊어지기 힘든 부담을 나누어 부담함으로써 개인과 공동체가 함께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건강권을 보호하는 제도라 할 수 있다. 이 제도를 완화 또는 폐지할 때 의료기관이 ‘돈 안 되는’ 건강보험 환자를 기피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경쟁이니 생산성이니 규제완화 같은 명목으로 공동체가 짊어져야 할 공공성 마련의 의무를 포기하는 결과는 힘없는 사람들의 고통뿐이다. 사회적 약자가 설 자리가 없는 공동체는 더 이상 공동체라 할 수 없다. 그곳은 약육강식이 작동하는 동물의 세계일 뿐이다. 또 있다. 우리 사회를 들끓게 하는 문제 가운데 하나인 ‘교육’이 바로 그것이다. 교육을 인재양성 과정으로만 보는 우리의 시각은 필연적으로 사람을 쓸모 있는 사람인 인재와 그렇지 못한 쓸모없는 사람으로 구별하게 하며, 쓸모없는 사람은 공동체에 머물 자격이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우리는 쓸모없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엄청난 비용을 지불한다. 건강한 사회 구성원을 양성하고자 정치 공동체(국가)가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나서서 소위 ‘사교육’을 부채질하는 셈이다. 동물과 사람을 구별하는 특징은 무엇인가? 사회적 약자와 더불어 살 수 있는 공동체가 사람에게는 그 본성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나’만 존엄한 것이 아니라 ‘내 이웃’도 존엄하다는 같은 본성과, 너와 나 우리 모두 하느님을 향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같은 소명을 지니기에 인간은 공동체(사회)의 차원을 지닌다. 게다가 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의 결합과 진리와 사랑 안에 있는 하느님 자녀들의 결합에는 유사성이 있다고 가르친다. 구체적으로 교회는 사회생활이 인간 본성의 요구이며, 사회생활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키우고 자기 소명에 응답할 수 있다고 가르치면서, 동시에 모든 사회 제도의 근본도 주체도 목적도 인간이며 또 인간이어야 함을 잊지 않는다(교리서, 1878-1881항 참조). 인류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지켜야 할 몇 가지 원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각 개인의 선익은 반드시 공동선과 연관되기 마련인데 “공동선이란 집단이든 구성원 개인이든 자기완성을 더욱 충만하고 용이하게 추구하도록 하는 사회생활 조건의 총화로서 인간을 인격체로 존중할 것을 전제하고, 사회의 안녕과 집단 자체의 발전을 요구하며, 평화를 지향한다”(교리서, 1906-1909항 참조). 사회화에는 위험도 따르는데, 국가의 강제 개입이나 전체주의가 개인의 자유와 자발성을 위협할 수 있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사회화의 위험을 피하고 개인과 사회의 조화로운 관계를 겨냥하여 교회는 “상위층의 사회는 하위층 사회의 내적 사안에 간섭하여 그 고유의 임무를 제거하면 안 되고, 오히려 반대로 필요한 경우에는 공동선을 목표로 그 행동의 하위층 사회의 행동과 조화되도록 지원하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보조성의 원리를 가르친다. 한마디로 상위 사회가 아래 사회를 도와야지 지배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보조성의 원리는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와 대립된다(교리서, 1883-1885항 참조). 모든 인간은 각자가 차지하는 지위와 맡은 일에 따라 개인이 책임을 맡은 분야의 의무를 다하고 가능한 한 공공생활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공동선을 증진하여야 하는데, 이 의무는 인격의 존엄함에서 나온다. 단체나 개인들이 그들의 본성과 소명에 따라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조건을 실현함으로써 사회정의를 보장한다. 사회정의를 실현하려면 존엄함에서 나오는 인격의 존종, 모든 사람이 지닌 이성적 본성의 평등의 실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제단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드린 구속의 희생을 통해서 천명하고 부과한 인간의 연대성(우정 또는 사회적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 연대성은 재화의 정당한 분배와 근로에 대한 평등한 보수, 그리고 더욱 공정한 사회질서를 위한 노력에서 드러난다(교리서, 1913-1914항, 1928-1942항 참조). 인류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은 신앙행위이다.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고 성부의 외아들의 모습으로 변해야 하는 사명은 각자의 개별적인 형태를 취하면서도 인류 공동체 전체와 관련되어 있으며(교리서, 1877항 참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서로 아무런 연결도 없이 개별적으로 거룩하게 하시거나 구원하시려 하지 않으시고, 오직 사람들이 백성을 이루어 진리 안에서 당신을 알고 당신을 거룩히 섬기도록 하셨기 때문이다(교회헌장 9항 참조). 공동선, 보조성, 연대성, 책임과 참여, 평등과 정의의 원리들은 독자들에게 낯선 용어들일 수 있다. 그만큼 일선 사목 현장에서 소홀히 여긴 탓이다. 골치 아픈 내용들이며, 괜한 분열을 가져올 것이라 두려운 탓일 수도 있다. 교회 안에서 홀대를 받는 이 교리들이 교회 밖에서 더욱 활발하게 실현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3. 성찰하기 - 공동선의 원리와 집단 이기주의의 충돌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탐욕스러운 집단 이기주의가 공동선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추모공원 설립을 놓고 해당지역 주민의 이해관계와 다른 지역 주민 사이의 여론 갈등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 지방자치제도의 도입과 시행은 보조성의 원리를 적용한 구체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상위층 사회(국가)가 수행하는 국방과 외교 따위의 행위를 제외한 여러 사회생활 영역이 광역과 기초 자치단체의 관할로 이양되고 있다. - 공동선과 사회정의를 실현하고자 시민단체를 결성하여 많은 이들이 적극 참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인격의 존엄함, 곧 인권의 증진과 민주화를 위한 활동이 계속되고 있다. -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찾으려고, 온갖 차별을 개선하고자 제도적 법적 장치를 마련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인간의 존엄성을 증진하는 일이다. - 그러나 빈부의 양극화, 문화와 교육의 양극화, 불평등의 심화 같은 부조리한 현상이 심화되는 것도 현실이다. 복음과 교회의 가르침의 빛으로 비추어 믿음을 실천할 사회생활의 분야들은 앞에서 열거한 것 말고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의 가르침과 믿음을 실천할 몫이 여러 분야에 여전히 남아있는데, 이는 곧 하느님께서 우리 신앙인을 부르시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복음적 가치를 세상 곳곳에 스며들게 하는 일이야말로 교회와 신앙인이 이 세상에서 수행해야 할 사명이기 때문이다. [경향잡지, 2008년 4월호, 박동호 안드레아(서울대교구 신수동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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