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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믿음살이: 교회의 끊임없는 참회와 쇄신 - 기복적이고 개인적인 신앙생활을 넘어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30 조회수3,934 추천수3

[세상과 교회 그리고 믿음살이] 교회의 끊임없는 참회와 쇄신


기복적이고 개인적인 신앙생활을 넘어

 

 

지난 호에서는 본당 공동체를 구성하면서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평신도 교우들이 얼마나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성찰하였다. 평신도 교우들은 “영혼이 육신 안에 있는 것처럼” “세상 안에서 그 혼”이다(교회헌장, 38항). 우리 그리스도인 평신도는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세상 한복판에서도 하느님의 이름을 빛내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는 하느님의 일꾼이다. 이번 호에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종교적 심성을 조심스럽게 성찰한다.

 

 

심령기도의 은사와 치유의 은사

 

장면 1. “신부님, 우리 자식이 사업을 할 때마다 저렇게 잘 안 풀리는 것이 시댁의 돌아가신 시고모님께서 아직 하느님 품 안에 들지 못하고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이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요?” 물론 필자에게 묻는 어르신은 그 답마저 갖고 있다. 신부의 입에서 “그러면, 그분을 위해서 연미사(위령미사)를 봉헌해야지요!” 하는 답을 기대한다. 그렇게 말해주는 대신에 필자는 되묻는다. “할머니, 누가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러면 성당 올 때 갖고 다니시는 가방을 뒤져 이른바 ‘가계치유기도’(경향잡지 2008년 1월호 참조)라는 것을 다룬 작은 책자를 꺼내 보인다. 책이 낡은 것을 보면 꽤 많이 들춰보았음을 알 수 있다.

 

장면 2. 미사가 끝나고 성당 입구에서 교우들을 배웅하는데, 교우 한 분이 유인물을 한 장 갖고 와 보여주며 “신부님, 이런 것을 어떤 분이 저쪽에서 나누어주는데, 못하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제가 못하게 할까요?” 그 유인물은 성모님께서 발현하여 주신 메시지라는 것을 빼곡하게 담아놓은 것이다. 그분께 다가가 “이런 유인물 이곳에서 우리 교우들에게 나누어주지 마세요.” 하면 조용히 자리를 피한다. 더러는 “이곳은 성당 밖이니까 신부님께서 하라 말라 할 수 없지 않나요?” 하는 분도 있고, 또 더러는 “신부님께서도 꼭 읽어보셔야 합니다.” 하며 한 부를 건네기도 한다. 물론 그 사이 유인물을 받아 읽어본 어떤 분은 그 유인물을 갖고 와서 “신부님, 진짜 성모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런 말씀을 하셨나요? 이것을 믿어야 하나요?” 하며 묻기도 한다.

 

성당 마당에서 성물을 축복하고 있을 때 이른바 ‘기적의 패’라는 것을 갖고 와서 축복을 청하는 경우가 있다. “이건 뭡니까?” 하고 물으면 “기적의 패지요.” 하고 대답하며, 거의 예외 없이 “000에게 주려고 합니다.” 한다. 필자가 “이건 어디에 쓰는 것인가요?” 하는 식으로 물으면, 그것도 모르느냐는 표정으로 “이걸 목에 걸고 다니고, 정한 기도를 바치면 성모님께서 지켜주십니다.”는 내용의 답이 돌아온다. 입시철이 다가오면 심지어는 수험생의 목에 걸어주겠다는 분들도 있다.

 

장면 3. “신부님, 이 본당에는 성령기도 모임이 없나요?” 하고 새로 이사 온 교우가 필자에게 물을 때가 자주 있다. “우리 본당에는 성령기도 모임이 없는데요.” 대답하고 이야기가 끝날 때도 있지만, 더러는 성령기도 모임이 있는 인근 성당이 어디 있느냐고 되묻거나 우리 본당에도 ‘기도모임’을 만들어 달라고 청한다. 다른 교우를 두고서 그분이 성령의 은사 가운데 치유의 은사를 받은 분이라거나, 심령기도를 할 줄 아는 분이라는 식으로 소개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듣는다. 어떤 경우는 아예 대놓고 필자에게 “신부님께서는 심령기도를 하실 줄 아나요?” 하며 묻는 분도 있다. “저는 할 줄 모르는데요.”라고 대답하면 적잖이 실망한 표정을 짓거나, “아니, 신부님이 할 줄 모르세요?” 하며 의아해하는 분도 있다.

 

앞의 경우들은 사목자로서 일선 사목현장에서 심심치 않게 만나는 일들이다. 이런 경우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할지 정말 조심스럽다. 교우들의 착하고 순수한 마음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교만하다 하겠지만) 다른 사목자의 뜨거운 신심(?) 을 원망하며 답답하고 때로는 화도 난다. 거칠게 표현하면 착한 교우들을 협박하고 윽박지르는 데 하필이면 성모님을 이용하고 조상을 끌어다 들일까 하는 생각이다. 성령께서는 어떻게 이 땅에 심령기도의 은사와 치유의 은사 말고 다른 좋은 선물을 주실 수는 없나 하는 생각에 답답해진다.

 

 

치열하게 사신 예수님처럼 살아야

 

간략하게 위의 경우들을 살펴보자. 먼저 ‘가계치유기도’라는 것은 우리 교회의 ‘통공(通功) 교리’를 교묘하게 왜곡한 것이다. 통공은 말 그대로 ‘공’이 통하는 것이지 ‘벌’이 통하는 것이 아니다. 빛이 통하는 것이지 어둠이 통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이 통하는 것이지 저주가 통하는 것이 아니다. 이 ‘가계치유기도’는 성경 말씀을 교묘하게 왜곡한 것이다. 구약성경의 하느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 범한 중한 죄에 대해 천대(千代)를 이어 갚으신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돌아가신 조상이 지은 죄 때문에 지금의 자손이 일이 잘 안 풀리고, 그 죄를 대신 기워 갚지 않는 한 제대로 바로 잡을 수 없다는 식의 그럴듯한 설명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폄훼하는 것이다.

 

앞의 성경 말씀은 하느님의 징벌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 그것도 변함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밝힌 것이다. 더구나 이 ‘가계치유기도’는 예수님의 죽음과 성사의 은총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예수님의 희생은 인류 구원을 가져왔으며, 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에 참여한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변함없는 믿음이며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성모님의 메시지라는 것도 그렇다. 성모님의 메시지를 담았다는 유인물들을 읽어볼 때마다, (불경스럽게 들리겠지만) “참, 성모님께서도! 아니, 이런 말씀을 하시려고 그렇게 요란하게 나타나셨나?” 성모님의 메시지라는 것들이 하나같이 지당하신 말씀들뿐이다. 굳이 발현하셔서 세상 깜짝 놀라게 하시면서까지, 그렇게 요란하고 힘들게 하실 말씀들이 아니다. 사람들이 하도 지당하신 말씀대로 살지 않아서 충격요법을 쓰신 것이 아닌 바에야 굳이 발현하실 필요도 없다. 충격요법을 쓰실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저절로 떠오른다. 부자가 뜨거운 불에 시달리면서 이 세상에 다시 가서 자기 형제들에게 미리 알려야 하겠다고 했을 때 하신 예수님의 말씀 말이다. 예수님 말씀의 취지는 “이미 그들도 알 것은 다 알고 있다.”는 것 아니었을까?

 

얼마 전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진 일이 우리 교회에서 일어났다. 성모상에서 피눈물이 나고, 성체가 피가 묻은 살로 변한 기적(?)이 일어났고,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이 그곳을 찾는다고 한다(경향잡지 2009년 5월호 참조). 물론 성모님의 메시지가 동반한다. 교회 안에서는 (사적)계시 논란과 성체성사 논란을 불러왔다. 마침내는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권위를 놓고도 논란이 벌어졌다. 아무리 신학적으로 논쟁을 벌이더라도 필자에게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계시’란 어디까지나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을 말한다. 감추어진 것은 볼 수가 없으며, 당연히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러니까 (사적)계시라고 할 수 있으려면 보통사람이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환하게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빵이 실제로 사람의 살로 변했다고 내세우는 것은 더더욱 걱정스럽다. 성체성사를 본질적으로 왜곡한 탓이다. 빵이 예수님의 몸이 되고, 포도주가 예수님의 피가 된다는 믿음은 성체성사의 올바른 이해를 전제한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참뜻을 놓쳐서는 곤란하다. 여기서 ‘기억’은 단순한 지나간 정보의 축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기억’은 정보의 축적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실현되는 것을 말한다. 백 번 양보해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뜻이 ‘성찬례’를 기계적으로 수없이 반복하라는 뜻이겠는가? 제자들과 작별하면서 “너희도 나처럼 살아달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빵이 실제로 사람의 살로 (기적적으로) 변한다고 제자들에게 초능력의 시범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짧은 생애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죽음마저 받아들이는 당신처럼 치열하게 살아달라는 뜻이 아니었겠는가!

 

‘기적의 패’ 라는 것을 목에 걸고 다니는 분들을 자주 만난다. 종교 상징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인간의 행위는 그 자체로 상징이기 때문이다. 상징은 의미를 전하고 동시에 의미를 담는 그릇과도 같다. 상징이 없으면 의미를 구체화할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상징과 의미를 동일하게 여기는 것은 곤란하다. 성모님을 그려 넣은 패를 지니면 잘될 것이라는 ‘소박한 바람’ 정도에 그치거나, 그 기적의 패를 바라보며 마음을 추스르는 정도에 그칠 일이지, 그것이 기적의 힘을 발휘해서 만사형통하게 될 것이라 믿는 것은 곤란하다. 그 기적의 패가 매매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싼값에 아무데서나 구할 수 있는 것이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있다면, 이미 이 세상은 완성되고도 남았을 터이기 때문이다.

 

 

공동선을 향하여

 

지난 성령강림대축일의 하느님 말씀은 ‘성령’이 사사로운 것이 아님을 잘 가르쳐준다. 성령을 주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신다. 그 성령은 공동선을 위한 것임을 바오로 사도는 고백한다. 물론 성경은 이상한 언어를 하는 은사와 치유의 은사를 주시는 분으로 성령을 소개하지만, 그 역시 어디까지나 공동선을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고백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 “공동선은 그 근본원리에서는 영원법의 지배를 받지만, 공동선이 구체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평화는 결코 한 번에 영구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꾸준히 이룩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사목헌장, 78항).

 

사도들의 시대에 ‘이상한 언어’가 ‘하느님의 위업’을 전하는 도구 가운데 하나였다면(사도 2,11 참조), 오늘날 공동선을 실현하는 데, 곧 하느님의 위업을 밝히는데 구체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인류의 올바른 이성과 지성이 아닐까? 치유의 은사 역시 마찬가지다. 질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이 지극히 제한적이었던 사도들의 시대에 성령께서 치유의 은사를 내리셨다는 것을 의학과 과학의 발달이 이루어진 시대에 글자 그대로 차용하는 것은 곤란하다.

 

“성령께서는 성사와 교역을 통하여… 모든 계층의 신자들에게 특별한 은총도 나누어주신다. 각 사람에게 주신 성령의 선물은 공동선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에 따라, 성령께서는 그러한 은총으로 교회의 쇄신과 더욱 폭넓은 교회 건설을 위하여 유익한 여러 가지 활동이나 직무를 받아들이는 데에 알맞도록 신자들을 준비시킨다. 그러한 은사는 뛰어난 것이든 더 단순하고 더 널리 퍼진 것이든 교회의 필요에 매우 적합하고 유익한 것이므로 감사와 위안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례적인 은총은 함부로 간청하지 말아야 하며, 지레 그러한 은총에서 사도직 활동의 결실을 바라지도 말아야 한다”(교회헌장, 12항).

 

왜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그렇게 자극적이며, 기복적이며, 개인적이며, 이례적인 체험을 부추기는 경향이 생기는 것인지 그 원인을 살펴야 하겠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의 내용을 빌려 요약하면, 인간의 한계와 세상의 미완성이라 할 수 있다(물론 인간의 존엄함과 위대함, 세상의 발전과 진보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의 유한함, 불안, 고독, 나약함, 권태로움 따위가 전자의 예라면, 정치의 불안정성, 경제구조의 모순, 사회의 부조리, 문화의 혼돈, 미래사회의 불확정성 따위는 후자의 예라 할 수 있다.

 

종교가 ‘기쁨과 희망’보다는 ‘슬픔과 고뇌’에 직면한 현대인에게 좁은 문에 이르는 ‘길’을 여는 대신에 현실과 타협하여 넓은 길을 연 탓이 제일 크다. 고통스러운 진리를 드러내는 대신에 달콤한 거짓에 침묵한 탓이 제일 크다. 영원한 생명을 위한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대신에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교세 확장에만 열을 올린 탓이 제일 크다. 하느님을 외면하고 세상(공동선을 실현하는 공동체)을 시선에서 놓친 탓이 제일 크다.“그리스도께서 가난과 박해 속에서 구원 활동을 완수하셨듯이, 그렇게 교회도 똑같은 길을 걸어 구원의 열매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부름 받고 있다”(교회헌장, 8항).

 

[경향잡지, 2009년 7월호, 박동호 안드레아(서울대교구 신수동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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