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교회 그리고 믿음살이] 강론, 건전한(?) 논란을 기대하며 강론이(은) 힘들다(어렵다), 왜? 일선 사목 현장에 있는 사제들에게 사목생활에서 “무엇이 가장 어렵습니까?”라고 물으면 거의 대부분의 사제들이 ‘강론’ 준비라고 대답할 것이며, 필자도 예외는 아니다. 강론에 대해서 교우들이 보이는 반응도 사제의 강론 준비를 힘들게 한다. 사제의 강론에 실망하는 교우들도 있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데서부터 “강론 시간에 강론을 하지 않고 정치적인 발언을 하기 때문에 싫다.”까지 그 이유도 다양하다. 강론을 듣기 싫어서 다른 본당을 찾는다거나 성당에 가지 않는다는 교우도 있고, 때로는 강론을 하는 도중에 격렬하게 항의하는 교우도 있다. 강론을 경청하는 교우도 있지만, 강론시간에 주보를 정독하는 교우도 있다. 강론시간에 심지어는 묵주기도를 바치는 교우도 있다. 왜 강론이 그렇게 힘들까? 왜 같은 강론에 대해 교우들 사이의 반응은 천차만별일까? 도대체 강론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사제뿐만 아니라 교우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을까? 한마디로 ‘강론’이 갖는 성격 때문이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사제의 강론을 “말씀 선포의 연장”(교리서, 1154항 참조)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은 “전례주년의 흐름을 통하여 거룩한 기록에 따라 신앙의 신비들과 그리스도인 생활의 규범들을 해설”(전례헌장, 52항 참조)하는 것으로 강론의 성격을 밝힌다. ‘하느님 말씀의 교역자’, ‘성찬례와 성사의 집전자’, ‘하느님 백성의 교육자’로 사제의 직무를 정리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은 강론과 관련된 소임을 가장 먼저 다룸으로써 그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현대 세계의 상황’에서 그 어려움의 배경을 찾기도 한다. 교령은 이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사제들은 주님께 받은 복음의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전달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또 이방인들 가운데에서 올바른 생활을 하면서 그들이 하느님을 찬양하도록 인도하거나, 공개적인 설교로 그리스도의 신비를 비신자들에게 알려주거나,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전수하고 교리를 설명하거나, 당대의 문제들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거나, 언제나 자신의 지혜가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모든 사람을 끊임없이 회개와 성덕으로 부르는 것이 사제들의 소임이다. 그러나 현대 세계의 상황에서 사제들의 설교는 흔히 매우 어려운 일이어서,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적절하게 움직이려면, 하느님의 말씀을 일반적으로나 추상적으로만 설명할 것이 아니라, 복음의 영원한 진리를 구체적인 생활환경에 적응시켜 설명하여야 한다”(4항). 이 같은 교회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강론’과 관련한 논란(?)을 몇 가지로 정리하여 성찰하자. 강론은 말씀 선포의 연장이다 첫째, 사제의 강론은 ‘말씀 선포의 연장’이다. 미사는 사적인 신심행위가 아니다. 미사는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공적인 거룩한 제사이며, 이 공적인 제사를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해 뜨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일을 계속할 뿐이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고 교회의 이름으로 이 제사를 거행하며, 하느님의 백성은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제물로 봉헌함으로써 세상, 이웃, 하느님과의 일치에 참여한다. 이 미사 가운데 말씀의 전례가 있는데, 이때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의 말씀, ‘거룩한 기록’ 곧 성경(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냥 책을 읽고 듣는 것이 아니라, 선포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온 회중이 한자리에서 듣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사제도 교우도 그런대로 이견이 없다. 그러나 강론을 ‘말씀 선포의 연장’이라고 볼 것인지, 아니면 ‘사제의 발언’ 정도로 볼 것인지에 따라 논란이 발생할 수 있다. ‘말씀 선포의 연장’이라고 믿는다면 사제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막중한 소임을 수행하는 만큼 열성을 다해 준비하고 기도해야 한다. 마치 구약의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 소임 앞에서 두려워했던 것처럼 말이다. 동시에 교우들도 강론이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그 강론에 귀를 열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마치 구약의 예언자들의 말씀에 이스라엘 백성이 경청했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거짓 예언자도 있었고, 예언자의 말씀에 아랑곳하지 않은 백성도 있었다. 강론을 사제도 교우도 ‘말씀 선포의 연장’이 아니라 ‘사제 개인의 발언’ 정도로 여긴다면, 사제는 아예 강론을 하지도 말아야 하겠고, 교우들은 그것을 들을 필요도 없다. 이 경우 강론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와 들을 필요가 없는 이유는 ‘미사’가 사제 개인의 또는 교우 개인의 선택에 따른 신심행위가 아니라 교회의 공적 예배이며, 이 공적인 거룩한 제사에서는 개인의 사사로운 견해가 소통될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미사는 그 자체로 교회의 공적 행위이므로 그 어떤 경우도 사사로운 만족을 채우려는 수단쯤으로 전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강론은 그리스도인 생활규범의 해설이다 둘째, 사제의 강론은 성경에 따라 신앙의 신비들과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들을 해설하는 것이어야 한다. 신앙의 신비들을 해설하는 것에 대해서는 논란이 적은데, 그것이 신앙의 신비를 완전하게 해설하고 온전하게 이해해서라기보다는, ‘신앙의 신비’ 그 자체 때문일 것이다. 신앙의 신비를 누군들 완전하게 인간의 언어로 해설하고,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들에 대한 해설’ 때문에 논란이 벌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에 대한 이해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생활규범을 지나치게 좁은 의미로 접근하면 신앙인의 생활규범은 단순한 종교적 의무를 이행하는 정도에 머무를 것이며, 넓은 의미로 접근하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세계평화 같은 구체적이면서 현실적인 영역에서의 신앙인의 생활규범까지 포함할 것이다. 우리의 경우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을 지나치게 좁은 의미로 해석하는 경향이 아주 강하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은 미사에 참례하기, 아침 저녁기도 바치기, 고해성사를 정기적으로 하기, 교무금 내기 정도다. 이 정도의 몇 가지 규칙을 어기면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것이고, 이 생활규범을 잘 따르면 신앙생활을 충실히 한다고 여긴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세계평화 같은 영역으로 확장하여 해설하면 불편해한다. 예를 들어 십계명 가운데 5계명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인데,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이 대목에서 ‘평화’와 ‘전쟁’에 대한 가르침을 밝힌다. 전쟁을 다루면서 군복무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는데, 그 가운데 이른바 ‘대체복무제’에 대해서도 가르친다.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행위를 적극적인 평화 수호와 증진 행위로 칭송하면서 국가는 이런 이들을 위해 대체복무의 기회를 마련해 줄 의무가 있다고 가르친다. 만일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을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내용의 강론을 하면서 언급했다면, 그 강론 내용은 ‘말씀 선포의 연장’인가 아니면 ‘사제 개인의 발언’인가? 필자의 경험으로는 많은 교우들이 그런 교리가 있는지조차 모를 뿐만 아니라, 그런 내용의 발언을 미사 시간에 해도 되느냐고 불편해한다. 당대의 문제를 그리스도의 빛에 비추어 셋째, 당대의 문제들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제들의 소임이다. 앞의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는 내용인데, 당대의 문제는 당연히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문제로서 그 문제의 원인이 사회에 있고, 사회 구성원 다수에게 영향을 미치며, 그 문제해결의 필요성이 강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대의 문제는 곧 교회가 처한 사회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며, 교회 곧 하느님 백성이 살아가는 삶의 환경의 문제를 말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문제들 가운데 사람들 대부분을 곤혹스럽게 하는 문제는 당연히 경제문제일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경제문제에 직면해 있고, 그리스도인은 경제문제로부터 초월해 있다면 모를까, 그럴 수 없으니 당연히 경제문제는 당대의 그리스도인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제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복음 말씀을 놓고 강론을 하면서,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모순을 설명하였다고 하자.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모순은 자본이 축적되면 될수록 노동의 피폐를 가져온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이들도 인정하는 내용이다. 교회도 경제 원리로서 자본주의가 갖는 한계를 명시하면서 어떠한 경우에도 자본이 결코 노동을 예속시켜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이는 공의회의 가르침이기도 하고, “가톨릭교회 교리서”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통제되지 않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며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렇기 때문에 무자비한 자본주의 경제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고 강론을 하면, 이것을 당대의 문제를 복음의 빛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세상 문제에 대한 참견으로 보아야 하는가? 넷째, 사제는 하느님의 말씀을 일반적으로나 추상적으로만 설명할 것이 아니라, 복음의 영원한 진리를 구체적인 생활환경에 적응시켜 설명하여야 한다. 앞의 이야기의 연장일 수 있는데, 복음의 영원한 진리를 구체적인 생활환경에 적응시키지 않으면 진리는 관념에 머물 수밖에 없다. 모두가 철학자라면 모를까 구체적 생활환경에서 발견되지 않는 진리는 공허하다. 어쩌면 그것은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 진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보편성, 타당성을 갖춰야 하는데, 구체적인 생활환경에서 찾을 수 없다면 보편성을 결여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의회와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평화를 사랑과 정의의 열매라고 가르친다. 평화도 사랑도 정의도 추상적인 용어이다. 구체적으로 정의는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할 때에 있는 상태’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있어야 할 것은 유형의 것과 무형의 것이 있으며, 무형의 것은 자유, 권리 같은 것을, 유형의 것은 재산과 소득 같은 것을 말할 수 있다. 강론은 공허하지 않아야 한다 사제가 “정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고 강론을 한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일반적이며 추상적이다. 그러나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노동의 권리, 이런 것들은 모든 사람에게 그가 사람이기 때문에 언제나 당연히 있어야 하며, 그것이 실현된 상태가 곧 정의로운 것이며, 그런 자유와 권리가 사람에게 없으면 그 사회는 불의한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입니까? 불의한 사회입니까? 만일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라면 평화는 아직 오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처럼 느끼는 평화는 참평화가 아니라 거짓 평화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공공의 안녕’을 명분으로 또는 평화를 명분으로 그와 같은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것은 어디까지 허용되는 것인지, 그것은 심각하게 따져봐야 할 문제입니다.” 하고 강론을 했다고 하자. 그리스도의 평화라는 진리를 구체적인 생활환경에 적용하여 설명한 것인가? 아니면 일반적이며 추상적으로 설명한 것인가? 교우들은 강론을 구체적인 생활환경에 맞추어 복음의 진리를 설명하는 것이라는 데에 대체로 동의한다. 그런데 여기서 구체적인 생활환경에 대한 이해가 다양하다. 어떤 이는 자신과 가족 또는 가까운 생활영역만을 생각하지만, 어떤 이는 지구 저편의 처지도 자신의 생활환경의 범주에 포함시킨다. 앞의 태도도 부정할 수 없지만, 나중의 태도도 무시할 수 없다. 더더욱 흔히 ‘세계화’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오늘날 자신과 가까운 생활영역에서 체험하는 것들의 배경을 따져 들어가면 그 영역은 확장될 수밖에 없다. 가정에 불화가 있었다고 치자. 그 원인을 개인의 성격에서 찾을 수도 있으나, 때로는 경제적 곤란, 실직, 경제구조의 변화, 세계경제의 부침 따위로 그 원인에 원인을 찾아 나설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가정의 불화를 극복하려면 성격과 태도의 변화뿐만 아니라, 그 가정이 놓인 사회, 국가, 세계의 환경의 변화도 필요하다. 강론에 대한 건전한(?) 논란은 그만큼 하느님 말씀에 대한 성찰에 관심이 크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사제에게도 교우에게도 강론이 복음의 진리를 세상에 드러내는 은총이기를 소망한다. [경향잡지, 2009년 8월호, 박동호 안드레아(서울대교구 신수동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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