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교회 그리고 믿음살이] 하느님의 목마름, 우리의 목마름 - 기도 기도란 어떻게 해야 하나? 영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신자들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또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교리 기간에 외워야 할 기도문을 다 외우지 못했다는 말, 또는 외웠어도 자꾸 까먹는다는 이야기가 꼭 뒤따라온다. 그런 경우 필자는 몇 가지 방법을 알려준다. 대개 이런 내용이다. 성당에 오실 때 “성경”과 “가톨릭 기도서”를 꼭 갖고 오셔서, 먼저 성경 내용을 마음에 두고, 만일 나라면 그 자리에서 ‘하느님과 또는 예수님과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나눌 것인지’ 생각(묵상)해 보라고 한다. 아니면 가톨릭 기도서에 있는 여러 기도문 가운데 하나를 골라서 한 구절 한 구절 그 뜻을 음미해 보시라고 권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주님의 기도’는 다 외울 것이니, 주님의 기도를 마치 내가 예수님인 것처럼 생각하고 한 구절 한 구절 그 뜻을 살피면서 마음을 다해 바쳐보거나, 괜찮다면 ‘미사경문’을 기도로 바쳐보라고 권하기도 한다. 필자의 이런 권유는 어디까지나 영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신자들에게 해당하는 경우다. 세례를 받고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 신앙생활에 익숙해진(?) 교우들은 어떻게 기도하고,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잘 알기 때문에 사제에게 기도에 대해 묻지도 않을 뿐더러, 필자의 위의 이야기가 그다지 만족할 만한 대답이 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익숙해진 신앙생활이란 한편으로는 신앙생활이 일상처럼 자연스러워졌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상처럼 활력을 잃어버렸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신앙생활에서 우리의 태도가 전자의 의미처럼 긍정적인 자세를 보이는 것이라면 괜찮겠으나, 사목현장에서는 후자의 의미처럼 아쉬움을 발견할 때가 없지 않다. 이를 흔히 기계적이고 습관적이며, 기복적이고 이기적인 신앙태도라고 지적한다. 그 부정적 현상을 뒷받침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로 교우들의 기도하는 태도와 내용을 제시한다. 교우들이 바치는 기도가 ‘기복적이며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기복적이고 이기적인 기도생활 기복(祈福)과 이기(利己)의 태도는 어쩌면 유한하고 나약한 인간으로서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태도로서 우리 인간의 본성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신앙생활 특히 기도생활에서 이 기복과 이기가 마치 요철(凹凸)처럼 맞물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하느님께 복을 비는데 그 복이 자기에게 이로움을 주는 것에만 한정되기 때문이다. 이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바라는 것과 타인이나 공동체에 이로움을 가져다주는 것을 철저하게 배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복적인 태도는 자연스럽게 기계적인 기도생활로 이어진다.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은 좋으나, ‘양을 채우는’ 것이며, 양을 채우면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하는 태도는 곤란하다. 예를 들어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교우로서 ‘매일 묵주기도 00단씩’ 바친다는 식의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본받을 만한 태도다. 이럴 때 (분위기가 허락하면) 필자는 되묻는다. “훌륭한 분이군요. 그러면 묵주기도를 왜 그렇게 열심히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열심히 성모님께 매달리면 제 정성을 보시고 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어요?” 하는 식으로 대답한다. 역시 본받을 만한 태도다. 그러면서도 아쉬운 마음이 들어 “혹시 묵주기도를 그렇게 열심히 하시면, 우리 뜻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야 하고, 그렇게 되면 우리 뜻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라고 되묻는다. 그리고 묵주기도의 각 신비와 각 단의 묵상주제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인류 구원 역사(役事)임을 환기시키고, 하느님의 그 구원 역사에 동참할 것을 다짐하는 뜻에서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이고, 그리하면 내 뜻을 완전하게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대부분의 경우 이 같은 필자의 설명에 수긍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꽤 많다. 내 뜻을 이루지 못할 기도라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바치느냐는 식으로…. 이기적인 태도의 기도생활은 자기도 모르게 공동체의 문제에 대한 무관심으로 또는 사회 구조악의 악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해마다 이맘때쯤 되면 볼 수 있는 현상이 있다. 겉으로 끊임없이 지적되는 사교육 문제에는 전국의 학부모들이 앓는 열병이 숨어있다. 전국의 성지와 사찰을 찾는 학부모들의 정성을 섣불리 이야기할 수는 없다. 입시생을 둔 학부모들 가운데 “우리 성당에서는 입시생을 위한 00일 기도 같은 것 하지 않습니까?” 하고 필자에게 묻는 분들이 더러 있다. 하지 않는다고 대답하면 적잖이 실망하며 “근처 00성지에서는 자리가 없어서 못 들어갈 정도로 많이 오는데….” 하며 우리 성당에서도 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요구한다. 필자는 기회가 되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물론 입시생을 둔 부모로서 힘든 것은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내 자식이 시험 잘 치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그만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대학입시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정성과 뜻을 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학입시를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모두가 말하면서, 정작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데는 뜻을 모으지 않고 내 자식만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필자의 이런 식의 이야기에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래도 표정은 밝지 않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로 필자의 입을 막아버린다. “저도 그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막상 아이가 대학입시를 앞두게 되니까 마음이 그렇지 않더라고요. 신부님도 한번 제 경우가 되어보세요.” 기도가 값싼 부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앞의 두 경우는 우리의 기도생활 가운데 지나치게 기복적이며, 기계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이런 태도에서 하느님의 뜻은 철저하게 배제되고, 공동체의 선익을 기대하는 마음은 찾아볼 수 없다.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은 점점 그 수를 더해가는데, 하느님의 뜻은 이 땅에서 점점 밀려나고, 하느님의 나라는 점점 허물어져 가고, 하느님의 이름은 값싼 부적처럼 아무데나 나뒹굴고 있다면, 만일 그렇다면, 한참 잘못 되어도 잘못된 것 아닐까! 물론 많은 교우들이 마음을 다하여 올바른 자세로 기도하고 있으나,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기도가 지나치게 기복적이며 이기적이라는 비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필자가 글머리에서 새 교우들에게 해당하는 경우를 예를 든 이유가 있다. 열심히 그리고 능숙하게 기도하는 것도 좋으나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그리고 무엇을 기도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처음부터 익혔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훌륭하고 완벽한 기도서는 성경이라 할 수 있다. 성경에는 인간으로서 한 개인뿐만 아니라, 그 인간이 살고 있는 환경으로서의 사회와 세상, 그리고 공동체의 모습까지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에 상응하는 하느님의 행적과 뜻이 드러나 있기(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나의 구석구석을 살필 수 있는 거울이며, 사람들끼리 얽혀 이룬 사회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 속사정을 성찰할 수 있는 잣대이며, 개인이든 사회든 어떤 모습으로 발전 완성되어 가야 하는지 그 길을 가리켜 주는 표지이다. 물론 어느 경우나 하느님께서 개입하시며, 당신 뜻을 밝히시며, 때로는 적극적으로 때로는 침묵하며 이끌어가신다. 성경은 하느님과 나, 하느님과 인류, 하느님과 세상 사이의 대화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내 모습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습을 비추어보고,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면, 성경을 펼쳐놓고 내 모습을, 세상의 모습을,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보자. 기복적이며 이기적인 기도생활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성경을 읽어도 잘 모르겠다고 하는 분들이 많다. 당연하다. 언어, 문화, 역사 따위의 배경이 우리와 너무나 다를 뿐만 아니라, 시대적으로도 큰 간격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공부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성경을 앞에서 밝힌 것처럼, 개인이나 공동체의 기도서로서, 하느님과 사람이 나눈 대화록이라는 시각에서 그 뜻을 찾으면 그다지 어렵지도 않다. 사람 사는 이치, 세상 돌아가는 이치는 환경과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가는 힘이지, 환경과 시대가 이치를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랑과 미움, 평화와 갈등, 행복과 불행은 비록 겉모습은 변화무쌍하더라도 그 본질은 마찬가지다. 풍부한 내용을 담은 기도들 성경을 기도서로 삼으면서, 좀 더 구체적인 내용으로 기도하고 싶다면, 기도서를 펼쳐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기도서에 실려있는 열두 개의 주요 기도(성호경,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사도신경(신앙고백), 반성의 기도, 천주십계, 고백의 기도, 통회의 기도, 삼덕송, 봉헌의 기도, 삼종기도)는 교회가 공적으로 바칠 수 있는 내용들이다. 아무리 짧은 기도라도 교회가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이기에, 기도문의 한 구절 한 구절은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기도 가운데 하나가 성호경이다. 성호경을 바치면서 교우들은 자기 몸에 십자표를 만든다. 물론 성삼위 하느님을 고백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기억하며, 그 십자가로 온 인류를 구원하였다고 고백하는 뜻을 갖는다. 필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십자가에 매달린 나의 모습’을 묵상한다. 성호경이 비장한(?) 기도가 되는 순간이다. 이처럼 열두 개의 주요 기도문은 자신과 공동체 그리고 세상의 모습을 성찰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훌륭한 길잡이가 된다. 그 가운데 특히 ‘주님의 기도’는 가장 탁월한 자리를 차지한다.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 ‘일용할 양식’, ‘죄’, ‘유혹’, ‘악’ 따위의 구절들을 작은 소리로 또는 마음속으로 읊어보라. 필자의 예를 들어보자면, ‘우리 아버지’란 구절을 통해 ‘고통스럽고 안타까운 사랑’을 묵상하곤 한다. 가장 보잘것없는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고통스러울 것이며,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 다른 자식의 모습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사랑은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정작 아버지를 고통스럽고 안타깝게 하는 것은 자식의 고통이며, 자식끼리의 형제애 부재가 아닌가. 그러면서 나는 아버지께 효를 다한다고 하면 아버지는 속으로 말할 것이다. “얘야, 나한테 잘하는 것 정말 고맙지만, 힘겨워하는 막내를 네가 좀 보살펴주면 원이 없겠구나.” 하고 말이다. 이처럼 ‘주님의 기도’ 한 구절 한 구절을 묵상하면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그 풍부함이 무궁무진하다. 우리의 기도를 올바로 그리고 풍부하게 이끌어주는 기도가 또 있다. 바로 우리가 자주 봉헌하는 미사가 그것이다. 필자는 새로 영세한 교우들에게 당분간은 미사경문을 자주 볼 것을 권한다. 교회의 공적 기도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백성이면서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에 참여한다. 미사경문 한 구절 한 구절은 교회의 기도이기 때문에 바로 우리 자신의 기도가 된다. 안타깝게도 아니 다행히도(?) 많은 교우들은 미사경문 가운데 회중이 해야 할 부분을 거의 다 외우고 있다. 그렇게 외우다 보니 사제들이 바치는 기도 내용에는 무심한 것 같아 안타깝다 한 것이다. 그러나 사제가 바치는 기도문의 뜻을 찬찬히 음미한다면, 마음이 떨리고 또 떨릴 것이다. 예를 들어, 성찬 기도 제3양식 첫 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고백이 있다. “주님께서는 … 끊임없이 주님의 백성을 모으시어, 그들로 하여금 해돋이에서 해넘이까지 깨끗한 제물을 바치게 하셨나이다.” 하느님 백성이 하느님께 바쳐야 할 깨끗한 제물이 무엇일까를 찾는 사람이라면, 그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느님께 맞출 수밖에 없지 않을까. 미사에서 기계적으로 응답하는 것보다는 기도문 한 구절 한 구절 그 뜻을 헤아리고 마음에 새기며 삶으로 드러낸다면, 그보다 훌륭한 제사가 또 어디 있겠는가. 기도는 하느님과 나의 대화 필자는 이 글의 제목을 ‘하느님의 목마름, 우리의 목마름 - 기도’라고 하였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기도를 “하느님의 목마름과 우리 목마름의 만남”(2560항)이라고 정의하였다. 또 기도는 “하느님의 행위이며 인간의 행위”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 관계”(2564항)이며,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는 생활”(2565항)이라고도 하였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기도는 ‘하느님과 나의 대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화는 마주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상대의 얼굴 표정을 읽고 눈빛을 살피며 듣고 말하는 것이 대화다. 마음을 헤아리며 서로 연대하는 것이 대화다. 그동안 우리는 하느님과 마주하지 않은 채, 하느님의 말씀은 듣지 않은 채, 나의 처지만 살피면서 나의 이야기만 쉼 없이 늘어놓은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겠다. 만일 그랬다면, 하느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을 짝사랑에 불과하고, 하느님의 말씀은 아무도 듣는 이 없는 광야의 외침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만일 그랬다면, 우리는 지금도 하느님을 외롭게 만들고 있는 셈이다. 가끔은 하느님의 고통스럽고 안타까운 얼굴을 바라보자. 가끔은 하느님의 흐뭇한 표정을 찾자. 가끔은 하느님의 떨리는 감격의 목소리, 가끔은 간절한 호소의 목소리를 듣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끔은 하느님의 목마름을 헤아리자. 기복을 바라는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가끔은 하느님의 기쁨과 행복도 살펴야 하지 않겠는가. 이기를 바라는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가끔은 하느님께 이로운 것도 살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대화가 이루어지고 일치를 이루며 결합될 수 있지 않을까! [경향잡지, 2009년 9월호, 박동호 안드레아(서울대교구 신수동성당 주임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