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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믿음살이: 교회다움의 상실과 쇄신 - 왜곡된 권력과 지배와 순종을 타파하자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10-17 조회수4,393 추천수5

[세상과 교회 그리고 믿음살이] 교회다움의 상실과 쇄신 - 왜곡된 권력과 지배와 순종을 타파하자

 

 

흔히 현실세계와 대조되는 세상을 일컬어 이상향이라 한다. 이상향이 현실주의자에게는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부질없는 꿈에 지나지 않겠지만, 인류의 발전을 이끌어주는 강력한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이상향을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창조질서의 완성 또는 회복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성사라고 고백하는데, 이 말은 교회가 이 현실세계에 실재하는 ‘하느님 나라의 가시적인 표지’임을 의미한다. 어떤 신학자는 이를 두고 ‘대조사회로서의 교회’라고도 한다.

 

 

세상의 희망 - 대조사회로서의 교회

 

세계 교회사에서 그리고 한국 교회사에서밝힌 교회의 성장 원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성사로서의 교회, 대조사회로서의 교회의 성격이었다. 간략하게 소개하면 이렇다. 로마제국의 통치 질서든 조선시대의 통치 질서든 사회는 철저하게 신분이나 계급을 구별하는 데에 기초를 두었다. 사람이라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품위 있는 귀족과 가축과 같은 노예가 있었으며, 지체 높으신 나리와 마님이 있으면서 동시에 하찮은 종놈이 있었다. 그 신분과 계급 사이에는 넘나들 수 없는 높고 견고한 장벽이 있었다. 한쪽에는 가문의 영광이 빛나고 족보가 있지만 다른 한쪽에는 이름조차 우스꽝스럽고 사고팔 수 있는 문서가 있었다. 그렇게 신분과 계급의 견고하고 높은 사회적 장벽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생물학적으로도 장벽이 있었는데, 성에 따른 구별이 그것이다. 여성은 사람이 아니었다. 비록 사람이라 하더라도 남성만 못했다. 교회가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의 현실세계가 그랬다.

 

현실세계의 질서에서 교회는 분명한 일탈이었다. 교회에서 모든 구성원은 그가 귀족이든 노예든, 양반이든 종놈이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서로 형제였다. 비록 현실세계에서는 사람대접 받지 못하는 비천하고 하찮은 이들이지만 교회에서는 모두 한 형제가 되었다. 차별과 채찍질이 있는 곳과 평등과 사랑이 있는 곳이 동시에 실재하고 있음을 상상해 보라. 누군들 평등과 사랑의 땅으로 발길을 옮기지 않겠는가! 초대교회가 양적으로 급속하게 팽창한 중요한 원인이 된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현한 초대교회의 이 모습이 기존질서를 유지하려는 세력에게 체제의 근간을 위협하는 심각한 일탈로 보인 것은 당연했다. 체제 전복세력을 뿌리 뽑지 않으면 사회의 안정은커녕 붕괴의 길을 걸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인에게는 그것이 박해요 순교였지만, 그들에게는 심각한 일탈을 바로잡는 정당한 조치였다.

 

이렇게 교회는 그 시작부터 현실세계에 도전하는 대조사회였으며, 현실에서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표지 곧 성사였다. 교회는 현실세계를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도구였으며, 실재하는 그러나 미완의 하느님 나라였으며, 이상향으로 이끌어가는 선구자였다. 물론 맨 앞에는 성부 성자 성령의 하느님께서 그 길을 열어가고 계신다고 믿는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땅에서도 실현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죄 말고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오신 것도, 하느님의 아들이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도, 그리고 성령께서 교회를 이끌어가시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교회의 또 다른 일탈 현상 - 차별 생산

 

그런데 처음 일탈에서 다시 일탈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사회적 장벽철폐의 일탈을 교회다움이라 말할 수 있다면, 이 교회다움에서의 일탈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뜻이다. 모두가 평민인 사회, 모두가 하느님 나라의 시민인 사회, 모두가 같은 형제인 사회, 곧 대조사회로서 출발한 이 교회 울타리 안에서 표현양식만 달리할 뿐 다시 귀족과 노예, 양반과 종, 남성과 여성 사이의 차별 같은 해괴한 장벽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필자의 해석이 적절하다면 이는 분명 교회다움에서의 일탈이라 볼 수 있다.

 

오히려 현실세계는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권리의 확장으로 차별을 극복하고 평등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다움에서의 일탈은 초대교회 때와는 다른 의미에서 현실세계에서의 일탈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초대교회의 일탈이 현실의 차별을 철폐하는 것이었다면, 오늘날 교회다움에서의 일탈은 차별을 생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예를 들어보자. 물론 필자 역시 일탈의 현장에 서있음을 먼저 고백한다.

 

본당은 하나의 사회다. (물론 교회법적으로 또 신학적으로 개별교회는 교구이다.) 당연히 그 속에는 질서가 있게 마련이다. 수직적 구조든 수평적 구조든 그 자체를 놓고 탓할 것은 없다. 책임과 권한과 의무가 발생하는 그곳에서 수직적인 구조의 질서가 필요할 때가 있고, 수평적인 구조의 질서가 적합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질서를 건강하게 성장시키는 원리이다. 교회라는 조직의 구성 원리는 마땅히 사랑,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사랑이 핏줄처럼 흐르는 수직적 구조, 사랑이 신경처럼 퍼져있는 수평적 구조는 인간의 건강한 신체와 같다. 이 비유를 교회에 적용하면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것이다. 사랑이 실종된 수직적 구조는 억압과 차별의 폭력 구조에 불과하고, 사랑이 실종된 수평적 구조는 끼리끼리의 이익집단을 만들 뿐이다. 이는 분명히 교회다움을 잃어버린 일탈이다.

 

본당에는 다양한 구성원이 있다. 이른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그들이다. 본당 운영과 사목(성화 소명)에서 당연히 수직적인 구조와 수평적인 구조를 갖는다. 본당 운영의 의사결정과정(decision making process)에서 책임과 권한과 의무를 실현하는 수직적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다. 동시에 교회의 사목(세상의 성화소명)에서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모두 각각 고유한 몫을 차지하면서도 하나로 결합하여 있으므로 수평적인 구조를 이룬다고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서 일탈현상이 발생한다.

 

가끔 본당신부는 ‘폭군’이고 평신도는 ‘○신도’라는 소리를 듣는다. 때로는 본당신부와 수도자, 수도자와 평신도, 본당신부와 평신도 사이의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한쪽에서는 본당신부가 수도자와 평신도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본당을 운영한다고 비난하고, 다른 쪽에서는 평신도들이 무책임하고 무관심하거나 사제(교계)의 권위에 겁 없이 도전한다고 비난한다. 본당신부 편에 선 교우들과 반대편에선 교우들이 선전전(宣傳戰)을 벌이기도 한다. 평신도사도직협의회의 간부 또는 신심단체의 간부가 세도를 휘두른다며 파벌을 이루어 다툼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럴 때 교회나 세상이나 하나도 다를 것 없다며 한 걸음 물러서 있는 이들도 있다. 그런 꼴 보기 싫어서 교회에 안 나간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나의 신앙생활과는 무관한 일이기에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조차 모르는 이들도 있다. 이웃 교우와 친교가 없으니 기쁜 소식뿐만 아니라 천만다행(?)으로 추한 소문까지도 듣지 못한 탓이다. 물론 이런 다툼을 극복하고 이해와 화해의 길을 열고자 애쓰는 교우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사제와 평신도는 형제관계다

 

왜 이런 갈등과 다툼이 생기는 것일까? 교회의 질서에서 사랑과 평등(핏줄과 신경계)이라는 절대가치가 훼손되고 그 자리에 왜곡된 권력과 지배와 순종이 들어섬으로써 그리스도의 신비체에 병이 발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회의 권력은 조직 구조상 위에서 아래로 봉사하는 권력이지, 위에서 아래를 다스리는 지배 권력이 아니다. 교회의 지배 곧 다스림은 섬기는 다스림이지 억압하는 다스림이 아니다. 교회의 순종은 하느님 뜻에 헌신하는 것이지 세속 권력에 굴종하거나 맹종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범이 분명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의 고백이 그렇다.

 

교회다움에서의 일탈은 우리 신앙의 원천인 성경과 공의회의 가르침을 실현할 수 없는 꿈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기고, 그러면서도 비현실적인 태도를 취한 탓이다. 필자가 이를 비현실적인 태도라 한 이유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적어도 현실세계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 분야에서 권리로서 평등’이라는 가치를 실현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 내의 다툼과 갈등의 원인 곧 왜곡된 권력과 지배와 순종의 태도는 현실의 이 같은 발전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기에 비현실적이다. 교회 안의 갈등과 다툼을 보고 “교회가 세상만도 못하다.” 또는 “교회가 세상보다 더하다.”는 혹평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쇄신이 필요하고 정화가 필요하다.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신 그리스도께서 죄를 모르셨지만, 오로지 백성들의 죄를 없애러 오셨으므로, 자기 품에 죄인들을 안고 있어 거룩하면서도 언제나 정화되어야 하는 교회는 끊임없이 참회와 쇄신을 추구한다”(교회헌장, 8항).

 

사제나 평신도나 이 참회와 쇄신의 호소는 언제나 유효하다. 특히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관계를 정화하려는 노력은 교회의 교회다움, 대조사회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지이기에 더더욱 멈출 수 없다. 다음의 공의회의 고백은 성찰에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거룩한 목자들은 평신도들이 얼마나 교회 전체의 선익에 이바지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목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향한 교회의 구원 사명 전체를 자기들이 독점하도록 세우신 것이 아니며 오로지 모든 이가 나름대로 공동 활동에 한마음으로 협력하도록 신자들을 사목하고 그들의 봉사 직무와 은사를 인정하는 것이 자신들의 빛나는 임무임을 안다”(교회헌장, 30항).

 

물론 여기서 ‘거룩한 목자’는 주교직을 수행하는 하느님 백성을 말한다. 단호하게 ‘독점’을 거부하고 ‘모든 이가 나름대로 공동 활동에 한마음으로 협력’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공의회의 이 가르침을 본당 사목구에 적용하면, 교계사제직을 수행하는 사제와 평신도 사이의 관계는 명령과 순종 또는 독단 대신에 형제로서의 협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비록 교계제도가 있고 그 안에 위계질서가 있지만, 그 질서는 협력을 촉진하는 것이지, 왜곡된 권력과 지배와 순종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성품의 구성원과 교회가 인정한 수도신분의 구성원이 아닌 모든 그리스도인이 평신도라는 이름으로 이해된다. 곧 세례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하느님 백성으로 구성되고,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자직과 왕직에 자기 나름대로 참여하는 자들이 되어, 그리스도교 백성 전체의 사명 가운데에서 자기 몫을 교회와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을 말한다”(교회헌장, 31항).

 

평신도는 성직자와 수도자와는 구별되지만, 교회와 세상 안에서 자기 몫이 있음을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평신도에게는 그리스도교 백성 전체의 사명 곧 성화소명에서 포기해서는 안 될 분명한 자기 몫이 있다. 굴종과 순명, 자기 몫을 포기하는 것과 착한 것을 혼동하는 것은 곤란하다. 흔히 ‘말 잘 듣는 신자’를 ‘착한 신자’라고 한다. 그럴 수도 있으나, 아닐 경우도 분명 있다. 그 말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에 따라 구별된다. ‘말을 잘 들어먹지 않는 신자’라 하여 무작정 탓하고 윽박질러서는 안 된다. 감정적으로 거슬리고 불편한 사람이 사실은 옳은 길로 안내하는 스승일 수도 있고, 게다가 정의와 진리는 때로는 저항하기 때문이다.

 

“주교, 본당 사목구 주임, 그 밖의 교구사제와 수도 사제들은 사도직 수행의 권리와 의무가 성직자나 평신도나 모든 신자에게 공통된 것이며, 교회 건설에서 평신도들도 고유한 역할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목자들은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하여 평신도들과 함께 형제로서 일하여야 하며, 사도직 활동을 수행하는 평신도들에게 특별한 배려를 하여야 한다”(평신도 교령, 25항).

 

사목자와 평신도들이 서로 형제인 교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대조사회로서의 훌륭한 표지가 될 수 있다. 특히 인간 자체를 상품화하려는 현대사회에서 ‘형제’ 관계는 참인간화와 참사회화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다.

 

교회다움을 상실시키는 끼리끼리 문화(?)에서 벗어나야 마지막으로 본당 사목구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일탈현상이라 할 수 있는 ‘끼리끼리’ 현상을 짚어보자. 교회 안에서 사랑과 평등의 가치가 훼손되고 왜곡된 권력과 지배와 순종이 암세포처럼 자라 수직적 차별의 장벽을 쌓아올려 교회를 병들게 한다면, 이 암세포는 그리스도 신비체의 다른 부위로 전이된다. ‘끼리끼리’ 문화(?)를 형성하는 것이 그것이다.

 

성직자나 수도자와 가까이 어울리며 극진한 형제애를 나누는 특정 교우들이 있는가 하면, 그 울타리 밖에 서성이는 이들도 있다. 뜻이 맞는 교우들 사이에 형님 아우님 하며 끈끈한 결속력을 과시하는 무리가 있는가 하면, 어느 무리에도 끼어들지 못하여(끼어주지 않아) 주변을 맴도는 이들이 있다.

 

특별한 신심으로 결합한 단체이거나, 특별한 사도직으로 연대하는 경우라면 문제 삼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오히려 다양성으로 교회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세속적 수준의 차이(경제, 지역, 신분과 지위 따위의) 또는 사람에 대한 호불호(好不好)에 근거하여 신앙생활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끼리끼리’ 여가생활을 즐기는 데에 있다. 신앙생활에도 품위가 있는 셈인데, 그 품위의 잣대가 그리스도교 가치인 사랑과 평등과는 무관하다.

 

형제애로 치장한 결속력은 배타성과 폐쇄성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이 ‘끼리끼리’ 모임의 위계질서는 대단히 엄격하여 감히 누구도 섣불리 건드리지 못한다. 그랬다가는 그가 누구건 ‘왕따’를 당하기 일쑤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신비체는 비현실의 꿈에 불과하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 안에서만 실현될 뿐, 그 테두리 밖에서 서성이거나 신음하는 이에게는 사랑의 계명이 미치지 않는다. 나누고 섬기며 사귀는 대상은 격이 맞거나 마음에 드는 이들일 뿐이다.

 

배타성과 폐쇄성을 친교로 가장한 이 ‘끼리끼리’ 현상이 극성을 부리면, 당연히 아흔아홉 마리 양을 놓아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서는 교회의 모습은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다. 교회의 인류구원의 성화소명과 신앙을 여가생활쯤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교회다움의 상실이다.

 

[경향잡지, 2009년 10월호, 박동호 안드레아(서울대교구 신수동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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