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교회 그리고 믿음살이] 성당에서 봉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으며…”(사목헌장, 3항) ‘교우’ ‘본당’ ‘활성화’에 대한 의구심 가끔 사목현장에서 “000 형제님 없으면 본당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또는 “신부님께서 새로 오셔서 본당이 활성화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교우들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필자는 한편으로는 수긍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과연 이분이 말하는 본당이란 무엇이며, 교우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을 갖는다. 필자의 성급한 판단으로는 여기서 말하는 ‘본당’이란 하느님 백성 모두의 공동체라기보다는,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본당 운영에 참여하는 일부 교우들의 조직 정도로 이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쉬는 교우’는 물론이고 아무런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는 교우들이나, 미사전례에만 참여하는 교우들은 본당이라는 테두리 또는 사목의 영역 밖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교우들’로 보지 않는다. “본당이 잘 돌아간다.”느니, “본당이 활성화되지 않았다.”느니, 하는 말에는 일부 사도직 단체나 사목협의회의 구성원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활동하느냐의 여부로 결정된다는 뜻이 숨어있다. 대놓고 이야기하면 어느 본당이나 사도직 단체의 구성원들(신자 규모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개 100-300명 정도의 교우들일 것이다.)이 본당의 전례나 행사에 활발하게 참여하면 ‘활성화’된 것으로 간주한다. 이 같은 현상을 간단하게 부정할 뜻은 없다. 어차피 현실 세계에서 가시적인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는 교회로서는 적극성을 갖고 참여하는 구성원과 그렇지 않은 구성원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세 가지 점에서 유감스러움이 있어 성찰하고픈 것이다. 유감 세 가지 - ‘교우’의 유감, 유물론의 유감, 중복가입의 유감 첫째 유감은, 성직자, 수도자, 또는 본당에서 적극적으로 사목이나 운영에 참여하는 분들의 인식에는 ‘교우들’의 범위가 지나치게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쉬는 교우’와 ‘발바닥 신자’들도 ‘교우들’이다. 그들이 비록 본당 사목과 운영에 참여하고 있지 않더라도, 아니면 침묵하고 있더라도 그 교우들에게 생각이 없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본당 운영이나 사목에 대하여 더 깊은 뜻을 지니고 있을 수 있다. 침묵이나 방관 또는 발걸음을 멈춘 그 자체가 가장 강력한 웅변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쉽게 간주하는 것은 곤란하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침묵하는 다수의 목소리를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교회다움의 표지이다. 둘째 유감은, 본당의 활성화에 대한 인식을 지나치게 양적으로만 판단하려는 경향이다. 미사에 몇 명이 참석했는지, 또는 행사에 몇 명이 참석했는지를 갖고 교우들의 신앙심과 본당 행사의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는 분위기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양의 팽창이 질적 변화를 가져온다고 믿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그토록 강하게 부정하는 유물론에 빠지는 셈이다. ‘활성화되었다’고 말할 때 혹시 침묵하는 교우나 쉬는 교우들의 참여는 처음부터 고려하지 않은 채, 본당의 여러 단체에 소속된 구성원의 활발한 참여만을 계산한 것은 아닌가? 셋째 유감은, 앞의 내용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인데, 그러다보니 본당에서 사도직 단체에 가입한 교우들은 이것저것 모두 해야 하기 때문에 너무 바쁘고, 그러다보니 결국 ‘하느님 백성’이라는 보편성은 찾아보기 어렵고, 일부 교우들의 ‘그 얼굴이 그 얼굴’ 현상이 점점 일반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단체든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이 단체 저 단체 이른바 ‘중복가입’의 길을 피하기 어렵다. 한 사람이 각종 후원회 활동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신심단체에서도 활동하고, 또 동시에 사목협의회 임원으로도 활동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얼마나 단체 활동이 힘들었으면 “이제부터 다 끊어버리고 좀 쉬면서 조용히 신앙생활에만 전념하겠습니다.” 하는 말을 하겠는가? 처음 두 가지 유감은 이른바 하느님 백성의 보편성을 잃어버린 ‘그들만의 교회’의 모습에 대한 것이며, 세 번째 유감은 ‘평신도 사도직’에 대한 왜곡현상에 대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사도직 - “그리스도의 나라를 온 세상으로 넓히기 위한 신비체의 모든 활동”(평신도교령, 2항) 여기서 ‘신비체’는 ‘교회’를 말한다. 그 교회가 그리스도의 나라를 온 세상으로 넓히고자 하는 모든 활동은 ‘사도직’이다. 영적이면서 동시에 가시적 구조를 갖는 교회의 활동 방향은 교회 안으로 향한 것이 아니라 교회로부터 세상을 향한다. 물론 교회가 그 자체로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그 때문에 본당사목구는 가장 훌륭한 가시적 표지이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자족’의 집단이 될 수는 없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 확장의 사명을 지닌 하느님의 도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도직의 본질과 사명을 공의회의 평신도 교령은 다음과 같이 밝힌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모든 사도직의 원천이시며 기원이시므로, 평신도 사도직의 결실이 그리스도와 평신도의 일치에 달려 있음은 자명하다. 사도직은 소명과 시대의 요청, 성령의 여러 은사에 따라 매우 다양한 형태를 띠게 된다”(4항, 3항 참조). 평신도 사도직에 대해 우리가 진지하게 성찰해야 이유는 ‘소명과 시대의 요청, 성령의 은사에 따라 매우 다양한 형태’라는 가르침 때문이다. 평신도사도직 단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본당 사목구에서 ‘소명’, ‘시대의 요청’, ‘다양한 형태’를 찾아볼 수 있어야 한다. 소명은 지나치게 개인의 신심으로 환원하고, ‘시대의 요청’은 괴상한(?) 성속이원론(聖俗二元걩)을 동원하여 외면하고, ‘다양한 형태’는 몇몇 거대 조직집단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나라를 온 세상으로 넓히기보다는 오히려 자족집단으로 남기려는 힘이 더 강하다면 교회의 사명을 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회가 그 사명에 충실하기보다는 양적 팽창만을 꾀하면서 사회에서 그 영향력을 넓히려고만 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일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이야기 하나를 소개해야겠다. 시험을 치르는 데 ‘사회 안에서 종교의 기능’을 묻는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출제기관이 밝힌 정답은 ‘통합의 기능’이었는데, 그분은 자신이 그 문제를 틀렸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종교가 ‘사회통합의 기능’을 수행하기보다는 오히려 ‘분열의 기능’만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체험에 따르더라도, 그리고 역사를 놓고 보더라도 종교는 결코 통합의 기능보다는 분열과 다툼의 기능만 했다는 것이며, 그 사례를 열거하였다. 필자가 아무리 종교의 통합 기능을 이야기해 주어도, 그의 마지막 반응은 “신부님의 말씀에 동의하더라도 그것은 원론일 뿐이고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였다. 필자에게는 현실세계에 있는 한 드러난 종교의 모습을 평가할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본당 사도직 단체 활동 - 그 울타리를 넘어 이 같은 원론과 현실의 괴리는 왜 생긴 것일까? 앞에서 지적한 ‘성속이원론’에 기초한 사도직활동이 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성속이원론에 기초한 신앙생활 특히 평신도의 사도직 활동이 옳지 않음은 다음의 교회헌장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평신도들은 바로 주님께 사도직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 하느님의 구원 소식을 사람들과 온 세상에 알리고 받아들이게 하는 일을 수행할 의무와 권리를 가지고 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900항, 참조). “평신도들은 그들의 예언자적 사명을 복음화를 통해, 곧 생활의 증거와 말씀으로 전하는 그리스도 선포를 통해 실현한다. 평신도들이 하는 이러한 복음화 활동은 세속의 일반 환경에서 이루어진다는 바로 이 점에서 어떤 특별한 징표와 독특한 효력을 얻는다”(“가톨릭교회 교리서” 900항). 평신도 사도직 활동은 세상을 피해 본당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와 자리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 나아가 복음적 가치를 그 안에 스며들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본당의 여러 사도직 활동이 그 교본이나 가르침을 통해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하고, 신앙을 세상에 드러낸다고 하지만, ‘세속의 일반 환경’에 침투하여 복음적 가치를 스며들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벽을 높이 쌓는다. 정치 영역, 경제 영역, 사회 영역, 제도의 영역 그 모두가 세속의 일반 환경인데도, 그러한 영역에 종교가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평신도 사도직 활동은 교회의 울타리 안에 머물면서 ‘그리스도와 (일부) 평신도의 일치’를 꾀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일치를 드러내야 할 곳은 마땅히 세속의 일반 환경이다. 비유를 들어 도로 표지판이 도로 위에 설치할 때에만 도로 표지판인 것처럼, 그리스도와의 일치 곧 신비체인 교회는 세상에 그 실체를 드러내야 한다. 이를 두고 ‘특별한 징표와 독특한 효력’이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하자. 그는 분명 가정에서는 가족 구성원 가운데 하나일 것이며, 직장에서는 노동자일 것이다. 만일 그의 세속 영역이 정치 영역이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면서 동시에 정치인일 것이다. 특별한 징표, 독특한 효력이란 무엇일까? 가정에서, 직장에서, 정치 영역에서 복음적 가치를 실현하여 열매를 맺는 것이다. 정치를 펼치되 권력 자체를 목표로 삼지 않으며 그리스도교적 가치인 정의와 사랑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삼아 활동하는 것, 경제활동을 하되 이기적 욕망에 매몰된 이윤 추구만을 목표로 삼지 않고, 오히려 노동의 품위, 경제정의를 실현함으로써 창조질서에 참여하는 경제활동을 하는 것, 그런 것들이야말로 평신도 사도직의 특별한 징표요 독특한 효력이다. 이땅에 얼마나 많은 평신도가 있는가? 그들 모두 나름대로 세속의 일반 환경에서 살고 있다. 신앙생활은, 사도직 활동은 교회 안에서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두고 평신도 교령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세상 한가운데에서 세속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평신도의 신분이므로 바로 평신도들은 그리스도인 정신으로 불타올라 마치 누룩처럼 세상에서 사도직을 수행하도록 하느님께 부름 받았다”(2항). 혹시 이상한 성속이원론을 들어, 또는 이상한 정교분리의 원리를 들어 교회가 세상일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 분들이 있다면, 그리고 신앙생활은 교회 안에서 하는 것이고, 본당에 있는 사도직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것이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것이라고 믿는 분이 있다면, 다음의 “가톨릭교회 교리서”의 가르침을 되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정치구조나 사회생활의 조직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교회 사목자들이 할 일이 아니다. 이 임무는 동료 시민들과 더불어 주도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평신도들의 소명이다. 사회활동에는 여러 가지 구체적인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사회활동은 항상 복음의 메시지와 교회의 가르침에 부합하며, 공동선을 목표로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다운 열정으로 현세적인 일들을 활성화하고, 이를 위해 평화와 정의의 일꾼으로 행동하는 것은 평신도의 의무이다”(2442항). 교회는 이제 본당 평신도 사도직 단체 활동을 활성화시키는 그 관심과 열성만큼이나 세속의 일반환경에서 수행해야 복음화에 활동을 촉진하고 이 사명을 지닌 평신도를 양성하고 격려해야 한다. 만일 교회가 평신도 사도직을 교회 유지와 운영에 필요한 수단쯤으로 여기거나, 이른바 본당 활성화의 척도쯤으로 간주한다면, 양적으로는 팽창할지 모르나 세상의 복음화라는 하느님께 받은 교회의 사명을 수행한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양적팽창이 질적 변화를 가져온다고 믿는 것은 그 자체로 교회와 양립할 수 없는 태도다. 교우들이 본당에서 봉사한다는 말을 할 때에는 전제해야 할 것이 있다. 본당 사목구가 구체적인 현실 세계에 실현된 하느님 나라 곧 구원의 가시적 표지로 드러나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교회를 위해 봉사한다는 것은 교회가 세상 한복판에서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일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어야 한다. 본당 사도직 단체들이 본당이라는 테두리 안에 머물며 자족하기보다는 지금까지 보여준 그 열정으로 세상을 향해 나섰으면 하는 바람이다. “모든 활동을 쉬고 조용히 신앙생활에만 전념하겠다.”는 말 대신에 “조용히 신앙 생활하여 얻은 그 힘으로, 또는 본당 내 사도직 활동을 통해 얻은 그 은총으로 세속의 일반 환경을 하느님 나라답게 가꾸도록 하겠습니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렸으면 좋겠다. [경향잡지, 2009년 11월호, 박동호 안드레아(서울대교구 신수동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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