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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편 - 그리스도인의 삶 해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7-20 조회수3,192 추천수0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27)

제3편 - 제1부 - 제1장 - 제2절 : 인간의 품위와 소명


지금까지 우리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제1편과 제2편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이 무엇이고, 파스카 신비에 어떻게 참여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품위’를 깨닫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이제 제3편으로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전반적으로 제3편의 제1부는 성령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합니다. 제1부는 인간의 존엄성과 소명(제1장), 그 소명을 이루고자 하는 인류 공동체(제2장), 그리고 이를 이루어 주시는 하느님의 법과 은총(제3장)에 관한 교리를 담고 있습니다. 제2부는 십계명을 하느님의 사랑(제1장)과 이웃사랑(제2장)으로 나누어, 계명 하나하나 설명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되었습니다(창세 1,26-27).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향하고 하느님과 친교를 누리며 ‘참행복’에 초대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인간의 존엄성, 곧 우리의 품위는 근거합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에 우리는 진 · 선 · 미를 사랑하고 영혼과 지성과 의지를 지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능력에 힘입어 자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를 남용하여 유혹에 넘어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업적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새 삶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원죄 때문에 잃었던 고귀한 품위를 되찾은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품위에 맞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로 산상 설교(마태 5-7장)에서 찾을 수 있고, 그 설교의 ‘참행복’(마태 5,3-12)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궁극적인 목적을 담고 있습니다. 그 목적은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만이 행복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채워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은 도덕적으로 자유와 양심에 따라 사는 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령의 빛과 힘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갑니다. 이 모든 길은 예수님을 통해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누구이신지 밝혀 주셨고,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소명을 지니고 있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전 생애를 통해 몸소 보여 주신 인간의 품위와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2013년 7월 21일 연중 제16주일(농민주일) 대전주보 4면, 김두한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28)

제3편 - 제1부 - 제1장 - 제7절 : 덕(德)


덕(德)은 선을 실천하고자 하는 몸에 밴 마음가짐입니다. 우리는 흔히 훌륭한 품성이나 바람직한 인격을 보고 ‘덕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노력에 따라 덕을 기르고 이를 실천하여 고귀한 인품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유학에서는 덕을 갖춘 사람을 군자(君子)라 하고, 그를 존중하고 따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교에서, 덕은 자신의 인격적 완성에 있지 않습니다. 덕이란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지키는 것, 항상 하느님께 향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덕(인간적인 덕)이 있지만,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갖출 수 없는 덕(신적인 덕)이 있습니다. 이 신적인 덕은 우리들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행동하여 구원의 자격을 얻게 하고자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혼에 불어넣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인간적인 덕’은 현명, 정의, 용기, 절제입니다. 이 네 가지의 덕은 모든 덕의 ‘중추적’ 역할을 한다하여 사추덕(四樞德)이라고 부릅니다. 현명의 덕은 우리가 참된 것을 식별하고 그것을 실행할 바른 방법을 선택하게 합니다. 정의의 덕은 하느님께 마땅히 드릴 것을 드리고,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게 합니다. 용기의 덕은 어려움과 유혹 중에도 우리의 도리(道理)를 바르게 걷게 합니다. 절제의 덕은 우리의 능력과 재물과 시간 등을 바르게 사용하고 절도와 중용을 지키게 합니다. 여기에 하느님께서는 사추덕을 꾸준하게 추구하도록 은총을 내려 주십니다.

다음으로 ‘신적인 덕’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입니다. 이 세 덕은 하느님을 향한 덕이기에 향주덕(向主德)이라 불립니다. 향주덕의 근원과 동기와 대상은 ‘성삼위 하느님’입니다. 향주덕은 성령의 은총에 원천이 있고,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에 목적이 있으며, 그리스도를 본받는데 그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신덕)으로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거룩한 교회가 가르친 것을 모두 믿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께 우리 자신을 의탁하고 믿는 바를 실천합니다. 우리는 희망(망덕)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바라고 참행복을 기대합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결코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보답하고자, 우리는 사랑(애덕)으로 하느님을 모든 것보다 사랑하고,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서로 사랑합니다(1요한 4,19). 우리는 ‘사랑으로’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갑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덕의 바탕이며 귀결이기 때문입니다. [2013년 7월 28일 연중 제17주일 대전주보 4면, 김두한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29)

제3편 - 제1부 - 제2장 : 인류 공동체


오늘 우리들이 살펴볼 부분은 ‘사회교리’입니다. 왜 교회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할까요? 교회는 세상을 세상의 잣대로 판단하거나 이권을 지키려 간섭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과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관심을 갖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탕으로 참 인간됨과 참 사회화를 통해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인권과 생명의 존엄성은 국가나 정치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상대로 우리를 창조하셨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행복에로 초대하셨습니다. 이 행복을 누릴 권리는 인류 모두에게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 모두는 동등한 존엄성을 가지고 서로 평등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사회(가정, 직장, 국가)는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에 부합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즉 ‘공동선’을 실현하는 장(場)이 되어야 합니다. 공동선은 모두가 함께 행복해지는 사회를 향한 원리입니다. 그래서 공동선은 개인의 인격을 존중하고, 사회의 안녕(安寧)을 책임지며, 평화를 지향합니다. 그러나 공동선을 달성한다는 미명 아래, 옳지 못한 법률이나 윤리 질서에 어긋나는 조치를 행사한다면, 사회의 공적 권위(공권력)는 더 이상 공권력이 아닌 압제입니다. 이처럼 국가의 강제 개입은 개인의 자유와 자발성을 위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인들과 집단들을 도와주되 간섭하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보조성의 원리는 국가나 더 넓은 사회가 개인들과 중간 집단의 자발성이나 책임을 대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한편 개인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헌신하고 공동선을 책임지는 권위를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또한 우리의 능력, 환경, 조건이 서로 다르기에 우리들 사이에 차이가 생겨납니다. 이러한 차이는 서로 주고받는 ‘나눔’으로 보완하고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연대성의 원리는 인간적이고 그리스도인다운 형제애로 서로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계각층 사이의 연대성으로 사회-경제적 문제(이익의 분배와 근로의 보수)를 해결하고 공정한 사회 질서를 확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연대성은 물질적 이익을 넘어 영적 재화의 나눔까지 포함합니다.

대전교구는 5년 전부터 사회교리학교를 지속적으로 운영하였습니다. 올해 전반기에 ‘목동성당’에서 있었고, 9월에는 ‘천안쌍용동성당’(9기)과 ‘온양성당’(10기)에서 있을 예정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사회교리에 더욱 관심을 갖기를 부탁드립니다. [2013년 8월 4일 연중 제18주일 대전주보 4면, 김두한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30)

제3편 - 제1부 - 제3장 - 제1절 : 법(法)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삶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의 헛된 우상들을 멀리하고 ‘하느님의 법’에 따라 살아가려 노력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에게 법(法)이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먼저 하느님 법(神法)은 일반적으로 우리의 이성으로 자연스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선과 악이 무엇이고, 진리와 거짓이 무엇인지 식별할 수 있는 도덕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자연법(自然法)이라고 합니다. 자연법은 우리 본성에 새겨진 ‘양심’을 통해 자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당신의 법을 계시하셨습니다. 이 법은 구약성경의 ‘율법’이고, 십계명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십계명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어긋나는 것을 금(禁)하고, 그 사랑을 위한 기본적인 행실을 명(命)합니다. 십계명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부르심을 일깨우고 하느님의 길을 밝혀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연법과 구약의 법(옛 법)을 완성하는 새 법, 곧 복음의 법을 주셨습니다. 복음의 법은 그리스도의 업적이며, 특별히 산상 설교(마태 5-7장)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법’(마태 22,37-40)을 당신의 삶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킬 새로운 삶의 규범은 사랑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로마 5,5 참조)으로 그리스도의 법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법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국가)에 의해 제정된, 정당한 실정법(實定法)을 양심적으로 지킵니다. 또한 천주교 신자는 교회가 정한 교회법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교회는 신앙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조직을 갖춘 가시적 사회이기 때문에 제도상의 권위와 법적 위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교회법은 하느님의 법에 대한 구체적인 실현 방향을 제시한 것이므로, 우리는 존경과 사랑으로 따라야 할 것입니다.

천주교 신자들이 지켜야 할 ‘여섯 가지 의무’를 보면, ① 모든 주일과 의무 축일에는 미사에 참석해야 합니다. ②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고해성사를 받아야 합니다. ③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부활 시기에 영성체를 해야 합니다. ④ 정해진 날에 단식재와 금육재를 지켜야 합니다. ⑤ 교회의 유지비(교무금)를 부담해야 합니다. ⑥ 교회가 정한 혼인법을 지켜야 합니다. [2013년 8월 11일 연중 제19주일 대전주보 4면, 김두한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31)

제3편 - 제1부 - 제3장 - 제2절 : 은총


은총은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호의이며 거저 주시는 도움입니다. 은총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자격이나 능력을 보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은총은 오직 당신의 자비와 사랑으로 조건 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은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성화 은총(聖化恩寵)으로, 하느님과 함께 살고, 하느님의 사랑을 행동할 수 있도록 우리 영혼 자체를 완전하게 합니다. 성화 은총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세례’로써 받게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우리 삶 안에서 하느님의 은혜를 생각하든, 생각하지 못하든) 늘 성화 은총 안에서 살아갑니다. 또한 이 은총은 지속적이고, 변함없이 살도록 도와주기에 ‘상존 은총’(常存恩寵)이라고 부릅니다. 다만 ‘대죄’를 짓게 되면 이 은총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는데, 고해성사로 회복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조력 은총(助力恩寵)입니다. 이 은총은 ‘도움의 은총’으로, 우리 안에 항상 머물러 있는 은총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지성과 의지를 하느님께 향할 수 있도록 우리 편에서 힘이 되어 주는 은총입니다.

비록 은총은 우리의 감각 기관(눈, 코, 입, 귀, 피부)으로 감지할 수 없지만 ‘신앙’으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곧 우리는 우리의 일상에서 은총을 받고 있다는 믿음과 신뢰를 갖고 청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의 아름다운 예를 잔 다르크 성녀의 고백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만일 제가 은총 중에 있지 않다면 하느님께서 저를 은총의 상태에 두시기를 바라며, 만일 제가 은총 중에 있다면 저를 그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키는 것 역시 ‘은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원의를 일으키시며 일을 시작하시고, 우리의 의지를 북돋우며 일을 완성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은총은 하느님의 주도(主導)로 베풀어지지만, 더불어 우리의 자유로운 응답을 필요로 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은총에 협력하며 선행을 실천할 때, 우리는 공로(마땅히 받을 상)를 희망합니다. 엄밀히 말해 하느님 앞에 공로를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미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가 되었으니, 영원한 생명을 받을 권리를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거저 베푸신 ‘참된 공로’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선행에 스스로 만족하기에 앞서 마땅히 드려야 할 감사와 찬미를 주님께 봉헌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선행의 공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2013년 8월 18일 연중 제20주일 대전주보 4면, 김두한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32)

제3편 - 제2부 : 십계명


우리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편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제1부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소명, 인류 공동체, 법과 은총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해했다면, 이제는 제2부 ‘십계명’을 통해 이러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십계명을 소개하고 다음 주부터 계명 하나하나를 설명하겠습니다.

십계명(十誡命)은 열 가지 계명을 말하지만, 원래 하느님의 ‘열 마디 말씀’을 뜻합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계약의 조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십계명은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된 다음,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지침들입니다.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신명 30,16). 그래서 십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하느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고, 약속된 ‘생명과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받아들이셨고, 또한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십계명의 참 의미를 밝혀 주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이처럼 십계명의 정신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따라서 십계명은 이 ‘사랑의 계명’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율법을 완성하기 때문입니다(로마 13,10 참조). 그래서 십계명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실천을 가르치는 계명입니다.

또한 십계명의 각 계명은 다른 계명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찬미하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을 올바로 존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피조물인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흠숭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한 계명을 어기는 것은 다른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그 자체보다 그 정신을 깨닫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마태 19,16-17).

일.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이.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삼.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사.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오. 사람을 죽이지 마라.
육. 간음하지 마라.
칠. 도둑질을 하지 마라.
팔.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구.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십.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2013년 8월 25일 연중 제21주일 대전주보 4면, 김두한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33)

제3편 - 제2부 - 제1장 - 제1절 : 첫째 계명


첫째 계명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입니다. 첫째 계명은 다른 모든 계명의 기본이 되는, 으뜸가는 계명입니다. 만일 첫째 계명은 소홀히 지키면서 다른 계명들을 열심히 지킨다 해도 그것은 무익한 일이 될 것입니다.

첫째 계명은 하느님만을 믿고, 하느님께 바라고, 모든 것보다 하느님을 사랑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믿음, 희망, 사랑 곧, 향주덕(向主德)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심과 불신을 물리치고, 우리의 신앙을 기르고 지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에 부르셨음을 알기에, 그 구원의 약속이 이루어지리라 희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하지 않고, 자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고, 그 사랑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합니다. 따라서 무관심과 미움은 주님의 사랑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그럼, 하느님을 어떻게 섬겨야 할까요? 하느님을 섬기는 일은 흠숭과 예배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에 대한 흠숭은 그분을 나의 하느님으로, 창조주요 구세주로, 주님이며 모든 것의 주인으로, 사랑과 자비가 무한하신 분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알아 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는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섬기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느님께서 누구이신지 모른 채 흠숭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흠숭의 표현은 예배입니다. 예배에는 기도, 희생제사, 약속, 서원이 포함되는데, 외적인 예배와 동시에 우리의 삶으로 흠숭해야 합니다.

첫째 계명은 미신을 금합니다. 미신은 우리가 참 하느님께 드려야 할 예배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미신은 우상 숭배, 점, 마술 등입니다. 우상 숭배는 하느님 아닌 것을 숭배하고 공경하는 것입니다. 잡신, 마귀, 권력, 쾌락, 인종, 조상, 국가, 재물 등이 우상 숭배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하느님처럼 섬겨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섬기고자 그 모든 것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 계명은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적입니다. 우리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알아 ‘나의 주님’으로 섬기고,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우리의 부족함에 인내해 주시며, 우리의 불충실성에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신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가장 큰 ‘섬김’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28) [2013년 9월 1일 연중 제22주일 대전주보 4면, 김두한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34)

제3편 - 제2부 - 제1장 - 제2절 : 둘째 계명


둘째 계명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입니다. ‘이름’은 무엇일까요? 이름은 한 인격체의 본성과 특성을 나타냅니다.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진 존재와 본질적으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이름을 드높이거나 욕되게 하는 것은 그 이름 자체보다 그 이름을 가진 존재를 칭송하거나 헐뜯는 것입니다. 또한 이름은 서로 통교하고 인격적 관계를 맺게 합니다. 이름을 알리는 것은 타인에게 자신을 알리는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타인이 자신을 인격적으로 부를 수 있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그들에게 내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름을 가지고 계십니다. 구약시대,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셨고(탈출 6,2-8 참조), 예언자들과 사제들은 야훼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뜻을 전하고 백성들을 축복하였습니다(신명 10,8). 신약시대의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은 우리가 아닌,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느님의 이름은 하느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둘째 계명은 하느님의 이름을 존경할 것을 명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은 우리의 청원과 그분께 대한 찬미와 영광으로 존경받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불러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둘째 계명을 직접 거스르게 됩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나쁘게 말하고, 그분에 대해 불경스러운 말을 하고,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 등입니다.

만일 ‘하느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정당화하는 데 남용하고,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데 끌어들인다면, 이것은 하느님을 소유하고 자신의 틀에 가두는 중대한 잘못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위해 불릴 수 없고, 죄를 은폐하기 위해 내세울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남에게 한 ‘약속’은 하느님의 명예와 성실, 진실과 권위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약속한 것은 꼭 지켜야 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지킬 생각이 없는 약속을 하거나, 맹세를 하고 그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거짓 맹세를 한 것입니다. 거짓 맹세는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을 거짓 증인으로 내세우는 것이므로, 충실하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큰 잘못입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면서 긋는 십자 성호로써 기도와 활동을 시작하고 끝마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바치는 십자 성호는 온갖 유혹과 어려움에서 우리를 굳세게 해 줄 것입니다. [2013년 9월 8일 연중 제23주일 대전주보 4면, 김두한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35)

제3편 - 제2부 - 제1장 - 제3절 : 셋째 계명


셋째 계명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입니다. 이 계명은 자칫 ‘주일미사’에 거룩하게 참석하라는 말씀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셋째 계명은 주일미사뿐 아니라 ‘주일 하루’를 거룩하게 지낼 것을 명합니다. 그래서 주일은 어떤 날인지 잘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째 계명은 안식일의 거룩함을 깨닫게 해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신 다음 이렛날에는 쉬시면서 이날을 안식일로 정하여 거룩히 지내도록 명하셨습니다(탈출 20,11 참조). 또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시고 그 백성과 계약을 맺으시며, 그 계약을 영원히 간직하도록 안식일을 주셨습니다(탈출 31,16 참조). 안식일은 하느님의 창조 업적과 당신 백성을 위한 구원 업적을 찬미하고 기리는 거룩한 날, 곧 하느님의 날입니다. 이날은 하느님께서 스스로 이렛날 쉬면서 숨을 돌리셨듯이, 사람들(특히 가난한 사람들)이 일상의 일을 멈추고 쉬도록 마련되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어겨 비난받으셨다고 기록하지만, 사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대해 올바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돕고 나누는 날입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생긴 것이기에(마르 2,27 참조), 악한 일이 아니라 착한 일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마태 12,5 참조).

그리스도인들은 토요일에 지내던 안식일을 일요일에 지내는 ‘주일’로 대치(代置)하였습니다. 안식일 다음날인 “주간 첫날”(마르 16,2)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날,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고, 안식일의 영적 참의미는 완성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날은 모든 날 중의 첫째 날, 모든 축일 중의 첫째 축일, 주님의 날, 곧 주일(主日)이 되었습니다.
 
사도 시대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성찬(미사)을 거행하며 주일을 경축하였습니다. 주일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경축하는 날이기에, 교회는 가장 중요한 ‘의무 축일’로 지킵니다. 그래서 주일미사는 교회 생활의 중심이 되고, 우리는 주일마다 미사에 성실히 참여합니다.

주일은 휴식의 날입니다. 우리의 삶이 노동과 휴식으로 이어지고 있듯이, 주일에는 충분한 휴식과 여가를 즐겨야 합니다. 그러나 주일미사, 자선의 실천, 적당한 휴식에 방해되는 일이나 활동은 삼가야 합니다. 주일은 전통적으로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데 바쳐져 왔습니다. 더불어 주일은 가족과 친지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고 보살피는 때입니다. 비록 주일에 일을 해야만 하기에 충분한 여가 시간이 없다면, 기도와 정성으로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야 할 것입니다. [2013년 9월 15일 연중 제24주일 대전주보 4면, 김두한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36)

제3편 - 제2부 - 제2장 - 제4절 : 넷째 계명


넷째 계명은 “부모에게 효도하여라.”입니다. 이 계명은 자녀로서 마땅히 드리는 부모 공경과 부모의 자녀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심으로써 가정을 세우셨고, 가정의 기본 구조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가정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남녀는 부부 공동체를 이루고, 그 사랑의 결실로 얻은 자녀를 기르며, 가족끼리 서로 헌신과 존중, 감사와 존경을 나눕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가정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가장 기초적인 신앙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가정 교회라고 합니다. 가정의 구성원들은 동등한 존엄성을 지니고, 각자가 가정 안에서 책임과 권리와 의무를 가집니다.

자녀들은 자신을 낳고 길러 준 부모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부모의 은혜에 보답해야 합니다. 부모 공경은 참다운 공손과 순종으로 드러납니다. “자녀 여러분,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콜로 3,20) 부모 공경은 하느님 공경과 밀접히 연결됩니다. 하느님을 향한 신앙의 첫 열매가 효도입니다. 보이는 부모님을 제대로 공경할 수 없다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겠습니까?

특히 부모의 노후를 정성껏 보살펴 드려야 합니다. 자녀들은 힘닿은 데까지 부모의 노년과 병환 중에, 고독하거나 곤궁한 때에 물질적 정신적인 도움을 드려야 합니다. 또한 부모 공경에는 형제자매들 간에 우애 있게 지내는 것이 포함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부모와 조상들의 기일을 기억하며 기도드리고, 필요하다면 제사를 바쳐야 할 것입니다.

부모는 하느님께 받은 권위와 책임을 가지고 자녀들을 보살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자녀 교육은 부모의 기본적이고도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며 의무입니다. 성장해 가는 자녀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부모의 가치관, 습관, 태도, 생활 방식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생활의 모든 면에서 우선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는 자녀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보아야 하고, ‘인격을 갖춘 인간’으로 존중해야 합니다. 부모는 원하는 행동과 선택을 자녀들에게 강요하기보다 그들의 솔직한 생각을 듣고 이해하면서 바른길을 제시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의 신앙생활을 위한 교리교사입니다. 부모는 가정 안에서 자녀들에게 신앙을 전해 주고, 그 신앙에 따라 살도록 가르칩니다. 부모가 하는 신앙 교육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기도를 가르치고 미사에 함께 참여하는 신앙생활로써 신앙의 올바른 기초를 마련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2013년 9월 22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대전주보 4면, 김두한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37)

제3편 - 제2부 - 제2장 - 제5절 : 다섯째 계명


지난 9월 11일 천주교 생명운동연합회는 탄방동 성당에서 생명 수호 결의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교회는 405명의 태아를 낙태한 의사들에게 ‘선고유예’와 ‘형의 면제’를 판결한 대전지방법원을 규탄하면서, 태아의 생명권 보장과 엄정한 법집행(형법 제27장 ‘낙태의 죄’)을 촉구하였습니다. 이날 생명수호 미사의 ‘성명서’는 낙태에 대해 분명하게 말합니다. “낙태는 흉악한 죄악이며,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대한 도전입니다.” 고의적인 낙태와 그에 대한 협력은 “사람을 죽이지 마라.”는 다섯째 계명을 어기는 중대한 죄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임신(受精)되는 순간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태아도 우리와 동등한 위치에서 완전하게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전적으로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을 존중하고 소중하게 이어 가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인간 생명을 해치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 목적에 어긋나며,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거나 손상시킬 아무런 권한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다섯째 계명은 ‘직접적이고 고의적인 살인’뿐만 아니라 간접적인 방법이라도 남을 죽이려고 의도하거나 죽을 위험에 놓이게 하는 행위, 또한 위험에 처한 사람의 요청을 거절하는 행위를 금하는 명령입니다.

또한 신체장애인, 병자 또는 임종을 목전에 둔 사람의 목숨을 끊는 직접적인 안락사는 다섯째 계명에 어긋나는 행위입니다. 안락사는 환자의 동의가 있든 없든 불법이자 살인입니다. 그러나 자연적인 생명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을 때, ‘지나친 치료’를 위한 의료 기구의 사용 중단은 정당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고의적으로 병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막을 수 없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생명을 보존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살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자살은 올바른 자기 사랑에도 어긋나고, 동시에 이웃 사랑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의 구원에 대해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만이 아시는 방법을 통해 구원에 필요한 회개의 기회를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계명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어긋나는 모든 행위를 금합니다. 악한 표양, 온갖 형태의 과잉(음식, 술, 담배), 마약, 테러, 고문, 공권력의 부당한 행사 등은 인간 생명을 해치는 것입니다. [2013년 9월 29일 연중 제26주일 청주주보 4면, 김두한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38)

제3편 - 제2부 - 제2장 - 제6절 : 여섯째 계명


여섯째 계명은 “간음하지 마라.”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계명을 인간의 성(性) 전체와 관계하여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성 자체에 머물지 않고 왜 우리의 성이 신성하고 소중한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 안에서 설명하였습니다. 이 소명은 하느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남녀의 결합으로 사랑과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놀라운 선물인 자녀를 출산하여 하느님의 창조능력과 부성(父性)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섯째 계명은 무엇보다도 부부간의 사랑을 보호합니다. 부부생활은 가정생활의 기초가 되고 사회생활의 원동력이 됩니다. 부부 사랑에 있어서 배우자 이외에 다른 사람과의 사랑은 있을 수 없으며, 제3자에 의해 침해되어서도 안됩니다. 이 여섯째 계명은 혼외정사를 금하는 명입니다. 부부의 부정(不貞)을 가리키는 간음은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혼인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죄입니다. 간음은 배우자의 권리를 침해하고, 혼인의 기초가 되는 부부의 신의를 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섯째 계명은 성의 본래 목적에 부합하는 정결한 생활을 명합니다. 정결은 성이 인격 안에 훌륭히 통합되어 있고, 그 때문에 육적이며 영적인 존재인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적 일치를 뜻합니다. 성은 인간의 품위에 맞게, 남녀가 온전히 서로 내어주고, 인격 대 인격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섯째 계명은 단지 금지에 대한 조항이 아니라 사랑을 배우고 성에 대한 올바른 관계를 이루기 위한 지침입니다.

정결은 자제력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적 유혹과 충동에서 그 유혹을 따라가느냐 아니면 물리치느냐 하는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절제의 덕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정결한 사람이 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신분에 알맞게 정결한 생활을 하도록 요청받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 동정을 지키는 이들은 독신생활로써 정결을 실천하고, 혼인한 사람들은 부부로서 정결을 지킵니다.

정결을 거스르는 죄는 방탕, 자위, 사음(邪淫), 포르노, 매매춘, 강간, 동성애 등이 있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동성애 행위를 그 자체로 무질서라고 천명해 왔습니다. 그런데 동성연애자들이 스스로 동성애 성향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이 성향은 그들 대부분에게 시련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존중하고 동정하며 친절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들에게 어떤 부당한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013년 10월 6일 연중 제27주일(군인주일) 대전주보 4면, 김두한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39)

제3편 - 제2부 - 제2장 - 제7절 : 일곱째 계명


일곱째 계명은 “도둑질을 하지 마라.”입니다. 이 계명은 이웃의 재산을 빼앗거나 부당하게 차지하거나 이웃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을 금합니다.

우리의 재산 소유권은 기본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와 존엄성을 유지하고, 우리와 우리가 책임지고 있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기 위해 재산을 소유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따라서 정당한 방법으로 획득한 개인의 재산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만일 그 재산을 소유한 주인의 정당한 의사를 거슬러 훔치거나 빼앗는 짓은 도둑질입니다. 이 도둑질에는 임금을 정당하게 지불하지 않는 행위, 습득한 물건을 일부러 간직하는 일, 장사할 때 속이는 것, 수표나 계산서를 위조하는 행위 등이 포함됩니다. 또한 탈세, 타인이나 공공 재산의 파괴, 공유 재산의 유용이나 낭비, 부패 등도 이 계명을 어기는 죄입니다.

교회는 인간의 기본권과 구원을 위해 필요할 때 경제나 사회 문제에 대하여 윤리적 판단을 내립니다. 교회가 사회에 개입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탕으로 참된 인간과 참된 사회를 이루고,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회 교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경제생활을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 지난 7월 11일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발표하신 ‘자의 교서’는 경제 · 금융 분야의 궁극적 목적인 ‘인간의 발전과 공동선의 실현’에 부응하고자 교회부터 쇄신의 노력을 표명한 것입니다.

경제 활동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저 물건을 많이 만들고 이윤이나 경제력을 높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경제생활의 주인이고 중심이며 목적이어야 합니다. 개인은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면서 노동에 참여합니다. 우리의 노동은 자신과 가족의 삶에 필요한 것을 마련하고 인류 공동체에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노동은 인간을 위한 것이지, 인간이 노동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권을 해치는 노동 행위나 경제 활동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업은 이윤의 증대뿐 아니라 인간의 선익에도 협력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국가는 노동자와 사용자가 동등하게 노동의 결실을 누릴 수 있게 해 주고, 특히 개인의 자유와 재산, 통화 안정과 공공 부문 서비스를 보장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사랑을 실천해 왔습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은 예수님처럼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선과 나눔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사랑의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2013년 10월 13일 연중 제28주일 대전주보 4면, 김두한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40)

제3편 - 제2부 - 제2장 - 제8절 : 여덟째 계명


여덟째 계명은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입니다. 이 계명은 진실을 왜곡하는 것을 금합니다. 진실을 어기는 것은 말이나 행실로 정직하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정직은 우리 행동으로 참된 것을 보여주고, 우리의 말로써 참된 것을 드러내고, 위장과 위선을 피하게 하는 덕입니다. 우리가 정직해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진실하신”(로마 3,4) 분이시기에, 하느님 백성의 지체들로서 우리는 마땅히 진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증언하고자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8,37). 진리를 증언한다는 것은, 물론 진리이신 하느님을 증언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거리낌 없는 양심으로”(사도 24,16) 신앙을 분명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증인입니다. 이 증언은 우리의 말과 행실로 신앙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진리에 대한 최상의 증거는 ‘순교’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죽음 앞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신앙과 진리를 증언하였습니다.

우리 속담에 “세 치의 혀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그릇된 말(증언)은 한 사람, 한 가정, 한 단체, 한 국가를 혼란스럽게 하고 파괴할 수 있습니다. 진실을 직접적으로 어기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은 진실을 전하기는커녕 오히려 속이려고 거짓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은 너와 나, 우리와 진리이신 하느님 사이의 관계를 왜곡시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실생활에서 작은 거짓말을 자주하게 됩니다. 말장난이나 농담 같은 거짓말, 예의상 건네는 친절한 거짓말(“나 몸무게 조금 줄었어.” “정말 그래 보인다.”), 사람관계를 공고히 다지는 거짓말(“여보, 당신이 최고야!”), 사람을 보호하거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불가피한 거짓말 등이 있습니다.

반면에 조직적, 계획적, 의도적으로 진실을 숨기고 거짓을 말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신뢰를 깨뜨린다면, 이러한 거짓말은 여덟째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거짓 맹세, 경솔한 판단, 악담과 비방, 중상과 모략, 지나친 아부와 아첨 등이 포함됩니다.

그러나 진실을 알 권리는 무조건적인 것은 아닙니다. 비밀을 맹세하거나 사생활을 지켜야 할 때 모든 진실을 알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의 계명에 따라 진실을 알리는 게 좋은지 아닌지 신중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직업상의 비밀은 엄격히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비밀을 지키는 것이 타인과 공동체에 중대한 손해를 끼치게 되고, 진실을 누설함으로 손해를 피할 수 있는 경우는 예외가 됩니다. 아울러 대중 매체는 도덕률과 인간의 정당한 권리와 존엄성을 존중하면서 올바른 정보를 정직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2013년 10월 20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주일) 대전주보 4면, 김두한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41)

제3편 - 제2부 - 제2장 - 제9절 : 아홉째 계명과 열째 계명


십계명의 마지막 두 계명은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입니다. 이 계명들은 ‘탐내는 것’을 금합니다. 즉 악한 행실을 하게 하는 마음, 곧 ‘탐욕’을 경계하도록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내가 존재하는 곳이고 우리의 숨겨진 중심입니다. 마음은 우리의 심리적 성향의 가장 깊은 곳이기에, 결단을 내리는 곳입니다. 우리는 온 마음으로 하느님께 기도하지만, 반대로 마음으로 하느님과 멀리 떨어질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 등이 나오기 때문입니다(마태 15,19 참조).

행복 선언에서 예수님은 여섯 번째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뵈올 것이며, 하느님을 닮게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거룩함에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일치시킨 사람들입니다. 마음의 깨끗함과 육체의 깨끗함과 신앙의 순수함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깨끗한 마음을 가짐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시각(視角)으로 자신과 세상을 보고, 타인을 ‘이웃’으로 받아들이며, 우리의 육체를 성령의 성전으로 감지할 수 있습니다.

아홉째 계명이 육체의 탐욕을 금한다면, 열째 계명은 재물에 대한 탐욕과 지나친 소유욕을 금합니다. 재산을 소유하고 부를 누리는 것은 축복이며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재물의 집착은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게 만드는 무절제한 욕망입니다. 타인의 소유물에 대한 욕심은 광대하고 무한하며, 또 “돈을 사랑하는 자는 돈으로 만족하지 못한다.”(코헬 5,9)는 성경말씀처럼, 결코 채워지지 못할 것입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이 있다.”(마태 6,21) ‘어디에’ 우리의 보물이 있습니까? ‘무엇이’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입니까? 우리의 마음은 ‘무엇을’ 갈망합니까? 진정한 행복의 갈망은 재물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의 행복을 누릴 때 채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십계명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고 구속하는 명령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은 족쇄도 아니고 관습도 아닙니다. 십계명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이웃과 평화를 이루며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내려주신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하나의 계명으로 묶어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3,34) [2013년 10월 27일 연중 제30주일 대전주보 4면, 김두한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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