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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회교리68: 야만은 먼 옛날의 남의 이야기일까?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7-27 조회수1,721 추천수0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68) 야만은 먼 옛날의 남의 이야기일까?

힘 없는 제자들 선택하신 이유


지난 호에서 '가난'과 관련해 루카복음을 성찰하며, 우리가 부와 가난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동안 우리 사회의 실제 부와 가난 사이의 불균형은 도를 넘어서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 실제 부와 가난 사이의 불균형이 생활 전체 영역으로 확산되고, 그것도 모자라 대물림되려 한다. 경제적 가난과 부는 곧 정치ㆍ사회ㆍ문화적 영역의 불균형을 심화한다. 불균형이라는 표현은 점잖은 편이다. 불균형이 아니라 독차지와 빈털터리 지경으로 치닫고 있다. 소수 관료 및 정치인과 다수의 보통 시민, 소수 사회ㆍ문화 영역의 권력자들과 다수의 그 구성원 사이의 균형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것이 우리 세대의 무감각과 탐욕의 자업자득에 그친다면 그래도 괜찮다. "내 탓이오!"하면 되니까….


가난과 부유함의 대물림을 끊을 수 없는가

그런데 이 극소수의 독점과 절대 다수의 빈곤이 대물림되는 징조가 보인다. 어느 국회의원이 서울특별시 자치구 가운데 땅값이 높은 3곳과 땅값이 싼 하위 3곳 출신 청소년의 소위 SKY 대학 진학 현황과 미래의 희망을 분석해 지역과 대학 진학, 그리고 지역과 미래의 희망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음을 밝혔다.

평균 땅값 상위 3개 자치구 출신 중고등학생들은 소위 명문대에 높은 진학률을 보이며, 고소득 전문직을 희망했다. 반면 하위 땅값 3개 자치구 출신 학생들의 명문대 진학률은 낮고, 안정적 직업을 희망했다. 말하자면 심각한 불균형이 미래에까지 지속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뜻이다. 이런 경우 기성세대는 어찌해야 할까? 그냥 "자식들이 부모 잘 만나 대박 났다", 혹은 "자식들이 부모 잘 못 만나 쪽박을 찼다"라고 헛웃음을 지어야 할까.

그럴듯하게 표현하면, '기회의 평등권'이 실종되고 있다는 것이며 민주주의의 실종을 슬퍼해야 한다는 뜻이다. 신분과 혈통으로 계급이 구별됐던 그 시절로 돌아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보다 못한 사회로 역진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신분과 혈통으로 사람을 차별했을 그때(살아보지 못했으니 그 차별의 정도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고매한 신분의 소수는 무지렁이 다수를 보살피고 살리고 돌볼 책임감이라도 있었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오늘의 우리 모습을 보라. 모든 것을 독차지하다시피 한 이들은 그 모든 것을 고스란히 물려주려 한다. 권력이 있고, 금력이 있으니, 사회의 제도와 법을 마음껏 활용해서…. 여기에는 세상과 이웃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능력과 기술까지 포함된 듯 보인다. 대신 경제ㆍ사회ㆍ정치ㆍ문화적으로 힘없는 이들은 아무것도 물려주지 못한다. 정당하게 분노하고 저항할 힘조차 대물림되지 못한다.


나누고 베풀 때 건강해지는 사회

오늘의 우리 모습에서 교회의 신원과 사명을 다시 생각한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선택하시는데, 그 면면이 좀 그렇다.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어부 형제였는데, 물고기 153마리에 배가 가득 찰 정도로 작은 배로 생계를 꾸렸던 초라한 이들이었다. 세리 마태오는 멸시받으며 살았던 이였을 것이다. 아마 다른 제자들도 고만고만했을 것이다.

예수님과 동행하며 동고동락했던 이들은 배가 고파서 남의 밀밭 서리를 했던 그런 이들이었다. 예수님과 움직이면서도 끼니와 묵을 곳을 걱정하던 이들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ㆍ정치ㆍ경제ㆍ문화ㆍ종교적으로 아무것도 갖고 있지 못했을 그들에게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을 마련해주지도 않으시면서 오히려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돌보라고 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막연히 짐작만 한다.

한 사회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돌볼 이들은 누굴까를 묻고 싶다. 당연히 건강하고 힘 있는 사람이 아닐까. 복음에 등장하는 율법학자, 바리사이, 사제, 원로, 대사제 등 그런 사람들 아닐까? 그래야 사람 사는 세상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그 몫을 내팽개쳤다면 어떨까? 예수님께서는 이 야만(?)의 세상에서 아버지의 이름과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고 세우고 펼치시기 위해 그들을 겁도 없이 꾸짖으셨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그 시대 그들에게서 사람됨을 찾을 수 없었나 보다.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다 갖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 더 나아가 힘없는 사람의 모든 것을 빼앗고, 때리고, 초주검으로 만들어놓는 불의를 환히 드러내기 위해 힘없는 제자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닐까.

[평화신문, 2013년 7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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