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25) 인간이 사라진 경제활동, 민영화
“민영화로 가장 이득 보는 사람은 누구?”
오늘날과 같은 복잡다단한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하셨을까 하는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성경을 읽어본 이들이라면 거침없이 당신의 깊은 뜻과 참 생명의 길을 열어보여 주시는 예수님의 지혜에 탄복하게 되는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지혜는 인류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바탕으로 세상 만물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담고 있는 것이기에 누구라도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이 혼란스럽고 도무지 주님의 뜻을 헤아리기 힘든 때일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따라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지혜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는 모든 지혜의 샘이자 지식의 뿌리인 그리스도의 사랑이 제대로 드러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왜곡되게 나타나 진리를 허물어뜨리는 상황마저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현실들 속에 이러한 불의가 똬리를 틀고 혼란에 빠져있는 이들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효율이라는 명분 아래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사상을 비롯한 모든 도덕적 가치와 규범, 진정한 인간애는 사라지고 뼈대만 남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합니다.
단적인 예가 철도 등 기간시설과 의료 등 공공재까지도 돈벌이 수단으로 만들려는 민영화 정책입니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전형이자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민영화’는 때때로 이름을 바꿔가면서 더욱더 혼란을 부추깁니다. ‘공기업 선진화’나 ‘경쟁체제 도입’ ‘OO산업 발전방안’ ’공기업 개혁방안’ 등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조리한 문제 상황을 단 한 번에 개선해 효율을 높임으로써 경제나 살림살이에 결정적 도움이 될 것처럼 보입니다. 또한 공공부문을 민영화하고 선진화하기 위해 경쟁체제를 도입함으로써 얻는 경제적 효율성에 대해, 관계된 이들뿐만 아니라 시민의 입장에서도 다양한 시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을 일거에 정리해줄 수 있는 물음이 있습니다. “민영화를 통해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은 누구인가?”
근래 대자보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던져진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물음은 기간산업을 비롯한 공공부문의 민영화가 국민 전체의 이익이 아닌, 거대자본과 관료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계산된 움직임 내지 시도’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사회에 적잖은 울림과 충격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한동안 민영화 논란의 중심에 있던 철도 자회사 설립을 전제로 한 수서발 KTX 분할에 대해 정부는 국민연금기금을 59% 투입하기 때문에 민영화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상식의 잣대를 놓고 생각해보면, 국민연금기금을 어떠한 투자처에 넣는다는 것은 시장에서의 수익을 추구하는 시장펀드(자본)가 참여하는 것이나 조금도 다름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철도산업 민영화를 통해 국민연금기금이 거두게 될 수익은 반대로 국민들에게는 ‘민영화 비용’으로 고스란히 전가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민영화 방식은 KTX 수서발 철도 자회사 설립과 같이 ▲ 자회사 형식을 통한 시장자본 참여 방식을 비롯해 ▲ 민간위탁 ▲ 지하철 9호선 식 민간투자사업 등 다양하게 추진되고 있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인간이 아닌 자본 위주의 정책이라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어느 분야에서건 문제가 없는 곳이 없겠지만, 기능한 한 많은 이들의 지혜를 모으고 마음을 한데 합칠 때,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톨릭신문, 2014년 1월 12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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