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33) 가난의 풍경, 자살
‘형제적 사랑’으로 함께 극복해야
한 세대 전으로만 기억의 태엽을 되감아보면 우리 주위에는 마음 놓고 쉬며 놀만한 곳이 지천에 널려있었습니다.
마을 언저리에는 사람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너른 공터 한두 개쯤 없는 곳이 없어 수시로 동네를 돌아다니던 가설영화관이나 서커스 극장이 세워져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습니다. 골목 어귀에서는 언제든 고무줄놀이나 딱지치기 하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경제논리를 앞세운 산업화의 파고는 이런 아름다운, 인간다운 풍경을 한순간에 앗아 가버렸습니다. 이제 사람 냄새가 사라진 곳을 돈을 내야만 들어갈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곳들이 대체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은 놀 곳, 마음 둘 곳마저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일까요, 가난한 이들 가운데는 유독 우울증이나 조울증, 강박증 등 예전에는 앓지 않던 병리현상을 보이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인간, 그리고 인간다움이 사라진 세상이 또 다른 비용을 청구하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것, 특히 돈에 눈을 두지 말라고 말씀하시지만 우리 눈은 한시도 ‘돈’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돈 중심, 경제력 중심으로 굴러가게 된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책임이 없는 것일까요. 오히려 더 많은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보았으면 합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 그것도 부자들이 많이 산다는 어느 구에서 정상적 활동이 불가능한 두 딸과 근처 놀이공원 식당에서 일하던 어머니가 넘어져 팔이 다치면서 곤경에 빠진 세 모녀가 함께 자살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공공의료와 복지 전달 체계의 문제점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이러한 사회적 제도적 시스템에 앞서 ‘이웃’이 사라진 우리 시대의 슬픔을 먼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 모녀를 죽음으로 내몬 주범은 누구일까요. 이웃의 아픔에 눈감아버린 우리 모두가 공범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더 슬프게 하는 것은 이러한 비극이 앞으로도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잘 알려진 대로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에서 8년째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2013년 우리나라에서는 하루에 42명의 가여운 영혼들이 삶의 끈을 놓았습니다.
자살과 빈곤이 높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보건복지부가 1998~2007년 네 차례에 걸쳐 실시한 ‘국민건강영양조사’ 자료를 분석한 ‘건강 불평등 완화를 위한 건강증진 전략 및 사업개발’(2009) 보고서를 보면, 소득 하위 25%에 속하는 남자 가운데 설문 시점부터 과거 1년 사이에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는 응답자가 13.0%였습니다. 상위 25% 상류층의 4.0%보다 3배 이상 많은 수치입니다. 실제 자살 사망률에 있어서도 ‘2000년 우리나라 성인 자살자의 인구 사회적 특성’(2005)에 따르면 대졸 이상 학력을 가진 인구에서는 한 해 10만 명당 7.9명이 스스로 몸을 끊었지만, 초등학교까지만 다닌 사람 가운데서는 10만 명당 121.4명이 자살을 선택해 두 집단의 자살 빈도는 무려 15.3배 차이가 났습니다.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 못 한다’는 말에는 가난이 공동체의 문제가 아니라 게으르고 어리석은 개인의 무능 때문이라는 잘못된 사고가 깔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가난한 이를 한 형제로 받아들이고 가난을 함께 극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며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4년 3월 16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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