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63) 임마누엘 아멘
하느님이 나와 함께 계십니다!
■ 꿩 대신 닭?
어떤 교회에 항상 맨 앞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는 형제가 있었다. 이 형제는 목사님의 설교 도중 감동을 받는 부분이 있으면 언제나 큰 소리로 “할렐루야!”, “아멘!”을 외쳤다. 이 소리가 내심 신경 쓰이던 목사님은 어느 날 형제를 조용히 불러 말했다.
“형제님, 아무리 제 설교가 감동적이어도 속으로만 ‘아멘’을 해주시면 예배 분위기가 훨씬 더 좋을 것 같군요.”
형제가 알겠다고는 했지만 약속은 번번이 허사가 되었다. 그러자 목사님이 그 형제를 다시 불러 “다음 주일, 조용히 예배를 드려주면 구두를 사주겠다”고 약속했다. 경제사정이 시원치 않아 낡은 구두를 신고 다니던 이 형제는 심각하게 고민하더니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런데 다음 주일 예배 시간, 설교를 통해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증거되자 교회 내 전체에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구두가 문제야? 나, 구두 필요 없어! 할렐루∼야!”
그렇다.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와 닿는다면 구두가 문제겠는가. 그런데 이야기가 재미있다. ‘아멘’을 자제시켰더니 ‘할렐루야’가 터져 나왔다. 꿩 대신 닭인가? ‘아멘’과 ‘할렐루야!’ 서로 우선순위를 가릴 수 없으니, 이 말도 적절치 않다. 여하튼, 확실한 것은 이야기 속 주인공 형제에게 ‘구두’에 대한 미련은 끝까지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다.
웃자고 만들어낸 얘기 치고는 알맹이가 야물다. 은혜가 차고 넘치면 절로 ‘아멘’과 ‘할렐루야’가 입술로 튀어 나오는 법! 개신교에서 떠도는 얘기라는 것이 슬그머니 아쉬워지는 대목이다.
이번으로써 ‘아멘’에 대한 글을 마감한다. 편의상 마감일 뿐, 아멘의 지평은 시공으로 열려 있다.
■ 천국의 3대 언어
나는 지상에서 쓰고 있지만 천국에서도 사라지지 않을 언어들이 있다고 믿는다. 장난삼아 그 중 3대 언어를 꼽아 봤다. 바로, ‘아멘’, ‘할렐루야’, ‘감사합니다’다.
우선, ‘아멘’이 왜 천국의 언어일까.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앞에서 많은 얘기를 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아멘’은 긍정이며 칭찬이며 궁극적으로 사랑이다. 우리는 ‘아멘’으로 구원받는다. 또 ‘아멘’은 순명이다. 그러니 ‘아멘’이 천국의 언어 아니겠는가.
추임새로 “아멘” 하면 된다. 나도 그런 연습을 많이 했다. 회의하다가도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면 “아멘” 한다. 이처럼 집에서, 직장에서, 단체에서 대화하다가 상대방이 좋은 말하면 “아멘” 해 보자. 서로 기가 산다.
아울러 우리 주님께도 “아멘”을 많이 해 드리면, 저 위에서 들려오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아멘” 소리가 소낙비처럼 들려올 것이다.
다음으로, ‘할렐루야’는 어떻게 천국의 언어일까. 할렐루야는 ‘찬미하다’를 뜻하는 ‘할렐루’와 ‘야훼’를 뜻하는 ‘야’의 합성어이니, ‘야훼를 찬미합니다’라는 뜻이 된다. 누구든지 ‘아멘’을 잘하여 하느님의 은혜를 입으면 입에서 ‘찬미’가 절로 나온다. 하느님의 피조물만 보아도 그 영광에 반하여 ‘할렐루야’가 터져 나온다. 그야말로 천국의 퀼리티다. 실로, 천국에 있는 성인들이 하는 일은 무엇일까? 모르긴 모르되 온통 ‘할렐루야’ 합창일 것이다. 그렇다고 지루할까. 천만의 말씀이다. 철학적 용어로 그 ‘분여’에 불과한 이 세상살이가 흥미진진한 것을 보면, 그 본래적 실체는 얼마나 더하겠는가. 여하튼, ‘할렐루야’는 가장 확실한 천국의 언어다.
끝으로, ‘감사’는 어느 면에서 천국의 언어일까. 에둘러 설명해 보자.
우리가 감사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감사는 ‘선순환’을 가지고 있다. 물론 불평의 ‘악순환’도 있다. 이들의 연쇄고리를 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은총’(축복)을 많이 받으면 그것을 인정하고 ‘감사’하게 된다. 이를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감사한 마음을 담아 ‘봉헌’ 예물을 올린다. 봉헌을 많이 할수록 다시 은총을 받게 된다. 이처럼 감사의 선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한편, 자신의 상황에 ‘불만’을 갖게 되면 ‘불평’이 절로 나온다. “나는 받은 것이 없어”, “내 삶은 불행의 연속이야” 등. 그러면 사람은 ‘인색’해져서 나눌 줄도, 감사할 줄도 모른다. 이렇게 인색하니까 또 받지 못하게 되고 다시 불만이 쌓여간다. 이처럼 불만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기도하다 보면 가끔 이런 말이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요즘엔 왜 응답이 안 올까? 내 기도 끗발이 떨어졌나?” 이런 때 바로 점검이 필요한 순간이다. 응답이 안 오는 이유는 틀림없이 내가 떼먹은 감사가 있기 때문이다. 내 이름이 지금 감사 신용불량자 명단에 올라가 있는 것이다. 일단 신용불량자는 거래가 안 된다. 이 거래를 다시 트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태 안 갚은 것을 갚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천국에 이르는 확실한 사람은 ‘감사’를 아는 사람이다. 사실, ‘찬미’와 ‘감사’는 이웃사촌이다. 둘 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에 대한 우리들의 반응인 것이다. 지상에서나 천상에서나! 이런 까닭에 나는 감사를 천국의 언어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 세 단어를 자주 쓰는 사람에겐 지금이 천국이고 여기가 천국이다.
■ 그리스도교식 나무아미타불
소설 「빙점」으로 유명한 일본 여류 작가 미우라 아야코는 독실한 가톨릭인이다. 폐결핵과 척추결핵으로 13년간 투병생활을 하면서 그녀는 신앙을 갖게 됐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그녀는 언젠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
“그리스도교에는 불교에서와 같은 염불이 없나요?”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리스도교에는 염불이 없습니다. 그러나 비슷한 말은 있어요. 바로 ‘임마누엘 아멘’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은 ‘부처와 함께 있다’라는 의미인 듯한데 그와 비슷해요. ‘아멘’은 ‘참으로, 진실로’라고 동의하는 말이며 이것은 세계 공통의 말이에요. ‘임마누엘 아멘’이라고 하면 ‘하느님이 나와 함께 계십니다. 실로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뜻이 되지요. 나는 오랜 요양생활 가운데 문득 쓸쓸해지면 곧잘 이 ‘임마누엘 아멘’을 불렀어요. 그러면 이상하게도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내 곁에 계셔서 온전히 나를 지켜주시는 것이 느껴지면서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미우라 아야코는 긴 투병생활 중에 ‘임마누엘 아멘’, 곧 “하느님이 나와 함께 계십니다. 감사합니다”라고 기도를 드리며, 주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시기를 청했다. 그러면서 어렵고 외로운 투병생활을 견뎌냈다. 우리는 그녀의 신앙을 통해서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놓이더라도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공감하게 된다.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4년 4월 6일,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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