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67) 8가지 참 행복 - 누리는 자는 행복하다
‘영의 가난’은 하느님 안에서 ‘몽땅’을 누리는 삶!
■ 신앙선배들의 지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다 중요한 것 같다. 어떤 때는 중요한 것이 너무 많아 헷갈린다. 신앙의 성숙은 결국 여러 중요한 갈래들을 줄여나가는 과정이다. 교회사에서 그 부산물로 생겨난 것이 바로 ‘향주삼덕’과 ‘복음삼덕’이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덕이 될 만한 여러 인자들을 저렇게 묶어서 그 가닥을 따라 단출하지만 본질적인 것에 올인 할 줄 알았다.
향주삼덕이란 주님을 향한 세 가지 덕으로서 믿음, 희망, 사랑을 가리킨다. 복음삼덕이란 ‘복음서에 드러난 으뜸 덕으로서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세 가지’를 두고 쓰는 말인데, ‘청빈’, ‘순명’, ‘정결’이 이에 해당한다. 흔히 이는 수도자들 및 사제들에게 요구되는 덕으로 알려져 있다. 하여 ‘복음삼덕’이 뭐냐고 신자들에게 물으면, 아예 모르거나 알더라도 자신들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다반사다.
“아, 그건 수도자들이나 지키는 거 아녜요? 청빈? 그거 저랑 별 상관없는데요. 순명? 그거 신부님이나 수녀님에게 해당하는 거잖아요. 정결? 그거 독신 말하는 거 아녜요, 전 못해요.”
하나같이 손사래를 치기 마련이다. 하지만 오묘하게도 신자들의 덕목인 향주삼덕과 수도자·성직자들의 덕목인 복음삼덕은 서로 겹쳐서 결국 하나가 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우선, 믿음이 완성되면 청빈이 된다. 믿음의 절정은 무엇인가? 완전한 의탁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하기에 무엇을 자꾸 쌓아서 안전장치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하느님을 믿고 살면 하느님께서 알아서 다 먹여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의당 영성적으로 ‘청빈’의 삶을 선택하게 되어 있다.
다음으로, 희망이 완성되면 순명이 된다. 희망의 절정은 무엇인가? 바로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의 뜻, 땅의 것들을 추구하다가 수준이 높아지면, 비로소 아버지의 뜻을 구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는 게 ‘순명’이다.
마지막으로, 사랑이 완성되면 정결이 된다. 사랑 중에 제일 질 좋은 사랑이 무슨 사랑인가? 오롯한 사랑이다. 이를 다른 말로 ‘정결’이라 부른다. 정결은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오롯한 사랑을 바치기 위하여 독신을 허원함으로 추구된다. ‘오롯한 사랑’이 정결의 요체라면, 이는 결혼한 신자들도 실천 가능한 덕목이라는 말이 된다.
숲을 보기 위하여 향주삼덕과 복음삼덕의 관계를 확인해 봤지만, 일단 여기서 우리의 주제인 ‘청빈’이 성숙된 믿음의 귀결이라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
청빈은 자발적 가난을 가리킨다. 어쩌다 신자들과의 대화에서 이 주제가 나오면 신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수도자들 정말 대단해요. 어떻게 그렇게 욕심을 버리고 가난한 삶을 살 수 있어요? 독신으로 사는 건 또 어떻고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꼭 지적하고 넘어간다.
“욕심을 버렸다고요? 천만에요. 욕심을 버린 것이 아니라, 작은 욕심 대신에 큰 욕심을 택한 것이죠. 하느님은 결국 몽땅이시니, 부분을 버리고 몽땅을 택한 셈이죠!”
■ 가난의 영성
지난번 글에서 ‘영으로 가난함’에 대해서 언급했다. 영의 가난은 한마디로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도우심을 청하는 자세다. 곧 하느님의 존재와 하느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자신의 삶을 몽땅 하느님께 의탁하는 자세다. 그러기에 자신의 소유, 능력, 재물에 자신의 안전을 맡기려는 사람은 영으로 가난한 사람이라 할 수 없다.
이렇게 영으로 가난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소유 중심의 삶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노예처럼 산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려는 것이 인간의 욕심이기 때문이다.
반면 존재 중심의 삶은 왕같이 산다. 이미 하느님 안에서 전부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 마지막, 큰아들을 향해 아버지가 한 말에서처럼 ‘아버지 것이 다 내 것’이다.
나 역시 ‘영으로 가난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기에 어떠한 계획을 세울 때,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마음을 얻고자 노력한다. 이렇게 말이다. “하느님, 하느님이 제 편이 되어 주시면, 저는 이 일을 시작하겠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제 편이 되어 주지 아니하시면, 당장 접겠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하느님만 청하라. 그러면 다 받는다.
행복의 순도는 결국 이 ‘의존의 순도’에 비례한다. 얼마나 맡기고 의지하느냐에 비례하여 행복의 순도가 결정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순도 100%의 행복을 누리려면 100% 하느님께 의탁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런데 영으로 가난한 사람은 이윽고 자발적으로 나눌 줄 안다. 이는 영의 가난이 자비의 실천과 잇닿아 있음을 의미한다.
물질적으로 부자면서도 가난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바로 그들 재산이 ‘하느님 것’임을 아는 자들이다. 그들은 단지 ‘관리자’일 뿐, ‘소유자’가 아니다.
그러기에 천억 원을 가지고도 가난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셋방살이를 하면서도 가난하지 못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탐욕과 증오로 가득 찬 사람은 여기서의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
정리해 보자. 앞에서 ‘영의 가난’은 결국 하느님 안에서 ‘몽땅’을 누리는 삶이라고 말했다. 비결은 누리는데 있다. 세상 모든 것은 소유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의 것이다. 꽃은 꺾어서 화분에 담을 수 있다. 그러나 봄은 화분에 담을 수 없다.
누리는 것이 곧 지혜다. 장미 한 송이가 자신이 지닌 향기를 다 표현하는 데는 12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이 말은 곧 하나의 장미향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12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순간 반짝하고 향기를 맡을 수는 있어도, 시간에 따라 변하는 그윽한 향기를 누리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얼마나 피상적으로 누리며, 순간적으로 사는가.
세상에서 제일 큰 집을 갖기로 작정한 달팽이 한 마리가 있었다. 달팽이는 곧 아름다운 큰 집을 만들어 화려하게 꾸며놓고 행복해했다.
세월이 지나 달팽이가 살던 양배추에는 더 이상 먹을 것이 없게 되어 이사를 해야 했다. 그러나 달팽이는 집이 너무 크고 무거워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한 어린 달팽이가 말했다.
“나는 작은 집을 가져야지. 어디든 가고 싶은 데로 갈 수 있게 말이야.”
달팽이는 소유로 인하여 자유를 잃었다. 하지만 어린 달팽이처럼 그냥 누리려 할 때는 다시 자유를 회복하게 된다. 누릴 줄만 알아도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4년 5월 4일,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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