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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68: 8가지 참 행복 - 그들은 위로 받으리라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4-05-12 조회수1,848 추천수0

[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68) 8가지 참 행복 - 그들은 위로 받으리라

우리가 울고 있다면, 한층 더 희망을 품자!



■ 당신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지난 2014년 2월 20일, 부산 이기대 성당에서 치러진 경주 마우나 오션 리조트 붕괴 사고 희생자 고 박주현 라파엘라 양의 장례식에서 보인 아버지의 모습은 의연함 그 이상이었다. 그는 외려 조문객을 위로했다.

“제 딸이 그토록 다니고 싶어 했던 학교의 교직원 학생 여러분,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우시면 제 딸이 길을 잘 못 찾을까 염려됩니다.…가족을 대신해서, 주현이를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모든 걸 다 용서하겠습니다. 제 딸이 사고 없는 하늘나라에서 편히 살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엊그제, 세월호 침몰현장에서 학생들 탈출을 돕다가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고 남윤철 아우구스티노 단원고 교사의 장례식에서 부모는 독했다. 아버지는 “사랑한다, 내 아들아, 자랑스런 내 자식”이라며 단장의 슬픔을 삼켰고, 어머니는 “내 아들, 의롭게 갔으니까 그것으로 됐다”며 신앙의 끝을 보여주었다.

이분들이야 말로 신앙의 아들이요 딸이다. 어찌 이들에겐들 슬픔이 작았겠으며, 분노와 원망이 없었으랴. 왜 이분들 가슴엔들 책임자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통탄과 절규하고픈 격분이 없었으랴. 하지만, 이들은 전혀 다른 길을 택했다. 나는 같은 신앙인으로서 이분들이 마냥 자랑스럽다.

결국, 답은 선택에 있다. 헤리 로더라는 가수가 있었다. 그는 공연 중에 자신의 아들이 전쟁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헤리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웃으며 노래를 불렀고, 성공리에 공연을 마쳤다. 그리고 곧장 아들의 시신이 있는 야전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아들의 시신을 붙잡고 우는 대신, 오히려 그곳에 있던 군인들을 위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훗날 한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헤리는 이렇게 말했다.

“아들의 죽음이 슬프지 않았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나는 고통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세상을 비관하며 좌절하든지, 술로 파멸하든지, 아니면 하느님께 슬픔을 맡기고 자유롭게 되든지 말입니다. 나는 하느님께 제 슬픔을 맡겼습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놀라운 위로와 힘을 제게 공급해 주셨고,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증거하였을 뿐입니다.”

헤리 로더의 노래는 아마 눈물보다 더 슬픈 노래였으리라. 누가 말했던가.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지만, 아버지는 피눈물을 흘린다.” 그럼에도 그는 지혜로써 슬픔을 하느님께 맡김으로써, 위로 받을 줄 알았던 것이다.

일찍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지혜를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TV나 성지순례를 통해서 보았던 ‘통곡의 벽’이 그 좋은 예다. AD 70년경 예루살렘은 로마에 의해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다. 이 때 유다인들은 성벽의 일부였던 이 벽 앞에 와 통탄하면서 성전 파괴와 예루살렘 함락을 슬퍼하고 그 회복을 기원하였다. 나중에는 애통해 할 일이 생기면 이곳을 찾아 기도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것이 점차 발전하여 오늘날의 통곡의 벽이 된 것이다.

이렇듯 유다인들은 위로 받을 길이 없을 때 하느님을 향해서 울 줄 알았다. 이는 우리에게 신선한 영감을 준다. 우리의 옛 조상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임금에게 신문고를 올리는 것이 최선이었다면, 이스라엘 신앙의 선조들은 더 나아가 하늘의 위로를 기대할 줄 알았던 것이다.


■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예수님이 선포하신 두 번째 행복은 ‘슬퍼하는 사람’들의 그것이다. ‘슬퍼하다’의 의미로 마태오 복음에서 사용된 그리스어는 ‘펜툰테스’(penthountes)다. 이 단어는 보통 슬픔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의 극심한 상실의 슬픔, 곧 사별의 슬픔을 뜻한다. 사실 살면서 가장 큰 슬픔이 사별의 슬픔 아니던가?

한편 루카 복음에서는 ‘슬퍼하는 사람들’ 대신에 ‘우는 사람들’로 표기되어 있는데, 여기서 사용된 그리스어는 ‘클라이온테스’(klaiontes)로 이 단어는 ‘울다’, ‘애통해 하다’를 의미한다.

이를 종합할 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슬퍼하는 사람’은 상실과 고통으로 인한 극도의 절망으로 절통해 하는 사람, 나아가 자신의 죄와 허물을 통회하며 눈물로 애통해 하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슬퍼하는 사람이 행복한 이유다. 그 까닭은 하느님의 ‘위로’다! 예수님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에서 수동태 문장은 거의 무조건 그 주어가 하느님이라고 보면 맞는다. 감히 하느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어 부득불 그렇게 표현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 말은 ‘하느님께서 위로해 주실 것이다’라는 뜻이 된다.

핵심은 이렇다. 하느님은 웬만한 슬픔은 인간들 사이에 맡기신다.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사소한 슬픔들은 친구끼리, 가족끼리, 연인끼리 서로 위로해 줄 수 있다. 하지만 때로 사람이 위로할 수 없는 슬픔을 겪을 때가 있다. 그럴 때 하느님이 몸소 나서신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원인이야 어떻든, 과정이야 어떻든 지금 엄청난 슬픔에 휩싸여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느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 슬픔의 영성

세상적인 슬픔을 슬픔의 영성으로 승화시킬 줄 알아야 한다. 하느님 위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슬픔의 영성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사막의 영성가 샤를르 드 푸코(1858~1916)는 슬픔의 영성을 이렇게 노래한다.

“울고 있는, 무죄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우리 모두는 희망을 품고 또 품자. 육체적인 고통이나 영혼의 괴로움 때문에 울고 있다면 우리는 희망을 품자. 그 고통이나 괴로움은 연옥 역할을 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 잘못을 속죄하고, 우리가 그분을 향해 눈을 들게 하며, 우리를 정결하게, 거룩하게 하시려고 그 고통과 괴로움을 활용하신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운다면 희망을 더욱더 품자. 왜냐하면 이러한 자비심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불러일으키신 것이고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을 직접 보고 싶어서, 그분과 떨어져 있는 것이 괴로워서 울고 있다면 희망을 품자. 왜냐하면 이러한 사랑의 열망은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움직이시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울고 있는 이유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오로지 사랑하기 때문이라면 한층 더 희망을 품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바라고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그분의 영광만으로 행복해지기 때문에 우리가 울고 있다면 한층 더 희망을 품자.”

어떤 슬픔이 되었건, 궁극적으로 이 슬픔은 현세에서의 슬픔이다. 이 슬픔은 마지막 날에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묵시 21,4).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4년 5월 11일, 차동엽 신부 (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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