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창희 신부의 살며 배우며 실천하는 사회교리] (17) 사회교리의 출발점인 가정 공동체
어린 시절 나의 공동체 생활은 가정에서 시작됐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우리 4남매는 함께 사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배우며 성장했다. 요즘처럼 핵가족화된 사회에서는 가족 구성원 개인이 더 중요하게 생각될지 몰라도 당시 우리 가정의 중심에는 항상 나보다는 아버지 먼저, 형 먼저와 같은 보이지 않는 ‘우리’라는 공동체가 우선이었다.
▨ 공동체 정신을 배운 가정
우리 가정은 경제적으로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절약정신으로 서로 나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전기ㆍ물ㆍ물자 등 모든 것을 아끼고 나눈다는 것을 배운 곳이 가정이다. 집안의 큰일을 결정할 때도 아버지는 가족 구성원 전체의 의견을 물으시곤 하셨다. 명절 때는 사촌 형제들과 함께 정을 나눴고 함께 차례를 드리고 음식을 나눴다. 이런 생활로 개인보다는 가족이란 공동체를 더 우선하는 삶을 배울 수 있었다.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내 삶의 중심은 항상 가정이었고, 그 안에서 한 인간으로서의 가치관과 신앙심이 형성됐다.
신학생이 된 이후의 삶 역시, 개인보다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시간이었다. 함께 기도하고, 공부하고, 운동하면서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소소한 갈등들을 해결해 나갔고, 동료 신학생의 슬픔과 고통에 함께 아파하며 기도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처음으로 동료 하나가 성소를 포기하고 신학원을 떠났을 때 우리는 가슴으로 아파하며 그의 결정을 안타까워했다. 함께 사는 신학생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첩 제목이 ‘Familia’(파밀리아)란 라틴어 제목이었는데, 이 단어가 뜻하는 것이 바로 ‘가족’이었다. 신학원 공동체는 그 형태와 구성원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Familia’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가족의 연장선이었다. 항상 신학원 전체에 도움이 되는 것을 생각했고, 남들에 대한 배려와 나눔이 어떠한 것인지를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사제 수품 후 떠난 유학 생활에서도 이러한 공동체성은 중요한 것으로 다가왔다. 나는 초기 유학 시절을 제외한 기간 대부분을 이탈리아 수도원에서 수사들과 살았다. 처음 손님으로 들어갈 때, 원장 신부는 나를 수도원 공동체에 받아들이는데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는 수도원에서 공동으로 하는 모든 기도 시간과 미사 시간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사실 유학하는 사제들은 학업 때문에 기도 시간에 종종 빠지는 경우도 있었는데, 원장 신부님은 그러한 생활이 수도자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했다. 둘째 조건은 공동 식사 시간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원장 신부님의 조건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고 기숙사비로 얼마를 내야 할지 물어보았는데, 돌아온 답변은 그야말로 단순했다. “네가 결정해서 내고 싶은 만큼 내면 된다.” 짧은 답변 속에서 원장 신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금전적인 것보다는 공동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수도원 안에서 모든 공동체 생활을 함께하기가 쉽지 않았다. 모든 공동체 기도와 미사에 참여했고 매주 토요일마다 이어지는 거룩한 독서 시간, 그리고 복음 묵상 나누기가 이탈리아 말로 진행됐다. 초기에는 잘 알아듣지 못해 힘들었지만, 언어적 어려움은 시간이 지나면서 해결됐다. 그리고 방학 중에는 이탈리아 수사들의 개인 가정을 방문해 인간적 관계를 쌓았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얼마 가지 않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완전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들의 가족이 된 것이다.
▨ 최초의 사회 가정공동체
가톨릭교회는 가정을 최초의 자연 사회로서 명확하게 표현한다. 이처럼 가정이 개인과 사회에 지니는 중요성과 중심성은 성경에 거듭 강조돼 나타나고 있다. 창조주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가정은 개인과 사회를 위한 인간화의 첫 자리이며, 생명과 사랑의 요람임을 가톨릭교회는 가르치고 있다. 주님의 사랑과 충실성, 그리고 이러한 사랑에 응답할 필요성을 배우는 곳이 바로 가정이다. 교회는 성경 메시지에 비추어서 가정을 고유한 근본 권리를 지닌 최초의 자연 사회로 여기며, 가정을 사회생활의 중심에 두고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219-211항 참조).
사회교리의 출발점 역시 이 가정 공동체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가정 공동체가 파괴된다면 결국 사회 공동체 전반의 붕괴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처럼 점점 무너져 가는 가정을 다시 살려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진정한 사회 복음화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무너져 가는 가정 공동체를 먼저 살려야만 할 것이다.
[평화신문, 2014년 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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